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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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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Mar 03. 2020

감당할 수 있는 가사

해석이 중요해.

노래에 맞춰 발을 움직여야 하는 수행평가가 있었다. 설명을 들어도 어리둥절한 학생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시범을 보여주셨다. 팔은 가만히 있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발만 노래에 맞춰서 움직이면 되는 수행평가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스텝을 수행평가 조건에 맞게 밟으면 되는 거였다. 학생들에게는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제자리에서 뛰다가 반 바퀴 돌다가 한 바퀴를 돌아도 되는 정사각형만 한 공간이 허락됐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춤은커녕 몸을 자연스럽게 흔들며 리듬을 타는 일과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는 수행평가를 고득점 맞겠다는 집념이 모든 걸 앞질러 있었다. 수행평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눈으로 보는 동안 머릿속으로 여태 봤던 음악방송을 훑었다. 발 쓰는 안무를 하던 무대들을 떠올려봤다. 안무를 창작하는 건 어렵지만 비슷하게 따라 하는 건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아이돌 무대를 떠올렸을까. 다시 돌아간다면 느린 노래에 맞춰 여유롭게 흐느적거리고 싶다.


노래를 정했다. 안무를 돌려보면서 발을 굴리며 정사각형에 맞는 스텝을 창조해냈다. 움직이는 방향을 종이에 적으면서 구상해냈다. 머리로 외우고 다리로 외우고 손가락을 다리라고 생각하며 성실하게 암기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친구를 만나 연습했다. 장소 고르기가 은근히 까다로웠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장소를 찾느라 시간을 거의 다 쓴 것 같다. 주로 연습한 곳은 주차장 구석이나 운동장이었다.


친구는 팝송을 선택했다. 소리를 최대한 키워도 바람 소리에 한없이 흩어져 버리는 노랫소리에 맞춰 연습을 하는데 갑자기 팝송의 제목이 궁금해졌다. 멜로디는 발랄했고 목소리는 통통 튀었다. 처음 들어보는 가수였고 제목은 알고 있던 영어 단어였다. 


수행평가를 봤다. 애썼다.


시간이 지나도 친구가 선택했던 노래가 입가에 맴돌다 사라지고는 했다. 갑자기 제목이 궁금해졌던 것처럼 갑자기 가사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가수는 가물가물했지만 제목은 알고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검색을 하다가 노래를 찾았다. 상큼 발랄한 멜로디와 귀여운 뮤직비디오 그리고 섹슈얼한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였다. 


이후로 팝송을 듣다가 반해버리면 가사 해석을 꼭 찾아본다. 혼자 듣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누군가에게 가사의 내용도 모르고 추천해줬다가 충격을 주면 안 되니까. 나는 심의를 지키며 상대방의 나이에 맞는 적절한 노래를 알려주고 싶으니까!


세상에 좋은 노래들이 정말 많다. 영어를 잘 알면 팝송을 들으면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영어 공부에 대한 열망이 노래 시작과 함께 잠깐 피어났다가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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