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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Sep 26. 2020

복숭아로 물수박 지우기

창문으로는 가을이 찾아오고 입안으로 늦여름이 사라졌다.

빗물도 씻어내지 못한 꾀죄죄한 방충망 너머로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초가을 하늘이 보였다. 햇볕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중풍으로 부는 바람 소리에 사사로운 감정들도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 찾아오는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서 집 안쪽으로 가지 않고 창문 곁에서 서성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날이었다.


방송을 시작하는 전자음이 울렸다. 관리실이나 경비실에서 울리는 건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는데 소리는 창밖에서 바람과 함께 실려왔다.


충북 00 지역에서 달고 맛있는 복숭아와 사과를 아파트 정문에서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트럭에서 녹음된 음성을 확성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 같았다. 방송은 두 번 나왔다. 궁금한 마음에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확인해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방송을 들으면서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요즘 저렇게 방송한다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거의 마트나 시장에서 사지 않나? 과연 사는 사람이 있을까? 누가 저런 걸 살까? 맛은 있을까? 예전에 트럭에서 저렴하게 샀던, 빨간 과육보다 흰 부분이 반 이상을 차지했던, 단맛은 커녕 싱거운 맛이 났던 수박이 떠올랐다. 과연, 맛이 있을까?


확성기에서 소리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5kg 2만 원. 한정 판매 특가 상품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아까 외출했던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한 손에 거대한 봉지를 들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게 뭐냐고 여쭤보니, 요 앞 트럭에서 저렴하게 판매하길래 샀다고 하셨다. 엄마도 분명 그때 그 수박을 드셨을 텐데?! 5kg에 2만 원이요? 확인용으로 한 번 더 여쭤보니, 어떻게 알았냐고 하셨다.


바닥에 내려놓은 봉투에 가까이 가니 복숭아의 향긋함이 들숨 가득 들어왔다. 기분이 좋았다. 향기와 다르게 눈으로 직면한 복숭아의 외면은 그리 향긋하지 않았다. 


복숭아는 힘을 주면 살짝 들어갈 정도로 딱복과 물복 사이에서 익어가고 있었으며 저렴한 가격임을 드러내듯이 곳곳에 거뭇하게 곪은 상처가 있었다.


어떤 맛이 날지 예상되는 복숭아는 먹지 않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다음 날 나는 배가 고팠다. 설거지를 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식탁에 있던 복숭아를 하나 집었다. 곪은 부분을 칼로 도려냈다. 복숭아의 빨간 부분은 얘가 다 먹었구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붉은 그라데이션 몸통을 가진 애벌레를 만났다.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애벌레를 보내며 역시,라고 내뱉었다. 칼로 도려낸 부근을 따라 복숭아의 향긋함이 솔솔 올라왔다. 맛있으니까 벌레가 있었겠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복숭아를 한 번 더 물에 헹궜다.


한 입 베어 문 복숭아는 딱복과 물복 사이를 지나고 있어서 너무 물컹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최상의 식감을 가지고 있었다. 맛도 향을 배신하지 않았다. 방송했던 달고 맛있는 복숭아는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즙이 팔꿈치를 타고 흘렀다. 싱크대에 서서 복숭아 뼈대가 나올 때까지 꼼꼼하게 소화시켰다.


창문으로는 가을이 찾아오고 입안으로 늦여름이 사라졌다. 엄마 덕분에 누가 저런 걸 살까? 하는 호기심도 해결하고 물수박의 맛을 향긋한 복숭아가 지워버린 날이었다.


엄마 발이 빼꼼 나온 사진으로 한 컷. 예전에는 복숭아만 편집해서 올렸을 텐데 요즘은 의외의 부분도 같이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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