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인어공주>
인어공주의 방에는 오래전 휩쓸려온 이름 모를 석고상이 하나 있었다. 인어공주는 석고상을 보며 이런 사람과 실제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바랐다. 소원은 그 주인공이 인어가 아닌 인간이라는 운명의 장난과 함께 이루어졌다.
왕자를 보기 위해 인어공주는 매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왕자가 탄 배는 인어공주가 머무는 공간 근처에 올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약속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인어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배가 나타나지 않는 날에는 초조하고 불안해하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으나 왕자는 항상 단단한 땅 위를 빠르게 뛰었고 인어공주는 힘없이 미끄러지기만 했다. 좌절감과 함께 현실로 돌아오면 인어공주는 가만히 누워 인간의 다리를 떠올리며 꼬리를 천천히 움직여봤다.
왕자는 인어공주를 알지 못했지만 인어공주는 왕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마냥 행복했다. 배 주위를 맴돌고 있으면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노랫소리 사이로 왕자의 웃음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움직이는 왕자를 발견하면 인어공주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슬픔에 못 이길 때에는 혼자 멀리서 인사를 건네거나 하고픈 말을 전했다. 언뜻 왕자는 자신의 말에 호응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는 듯했고 눈썹을 찡그리면 자신의 말에 기꺼이 슬퍼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기쁜 마음은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고 평소보다 더 깊은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그리운 감정이 독약처럼 온몸에 퍼져나갔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인어는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슬픈 결말을 맺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궁전에 도달하는 인간은 모두 죽어버린다고 했다. 인간은 살아서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이 인어공주가 사는 곳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건 알았지만 보고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기에 인어공주는 매일 왕자가 탄 배를 기다렸다. 익숙한 형체가 보이면 높은 파도가 만드는 거품 아래 숨어서, 쏟아지는 빗줄기에 숨어서, 커다란 바위틈에 숨어서, 뛰어오르는 고래의 지느러미에 숨어서, 석양이 만드는 그림자에 숨어서 살아 숨 쉬는 석고상을 바라봤다. 육지를 향해 멀어져 가는 배를 보는 인어공주에게 바람이 짓궂게 물결을 일으켰다. 파도가 인어공주의 얼굴을 연거푸 쓸며 남긴 물방울은 마치 인간이 흘리는 눈물 같았다.
괴로움에 슬퍼하는 인어공주에게 마녀가 찾아와 왕자가 죽지 않고 궁전에 도달할 수 있는 구슬을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구슬의 대가는 다채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인어공주의 능력이었다. 눈을 뜨면 왕자와 함께 하는 대신 눈을 감으면 암흑뿐인 세상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왕자가 없는 인어 공주의 세상은 어둠과 같아서 인어공주는 마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구슬을 쥔 인어공주는 설레는 마음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갑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왕자가 보였다. 문득, 두 다리를 이용해 경쾌하게 뛰던 왕자가 생각났다. 인어공주가 꿨던 마지막 꿈에서 왕자는 지금처럼 환히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와 이루어질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거센 바위가 되어 인어 공주의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왕자가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인어공주는 용기를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왕자를 향해 흔들었다. 왕자도 이에 답하듯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인어공주의 손에 들려있던 구슬이 중력을 타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어공주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을 만들 수 없어서 터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아름다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웠다. 하늘과 바람과 바다도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 인어공주에게 다가왔다. 노래에 실린 인어공주의 감정이 고조되자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바람은 태풍처럼 거세게 불고 파도가 높이 솟았다. 배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뱃머리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커다란 파도가 갑판을 덮쳤다. 누군가와 다급하게 말을 주고받던 왕자가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인어공주는 노래를 멈췄지만 악화된 날씨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휘청이는 배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발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인어공주는 구슬을 떠올리며 왕자를 찾기 위해 물살을 가로질렀다. 달빛을 받은 인어공주의 꼬리가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수면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다는 잔잔해졌고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물의 표면이 햇볕을 받아 기분 좋게 빛났다. 배가 있던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상처 입은 지느러미가 깊은 어둠을 향해 헤엄쳤다. 인어공주가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인어공주의 꼬리 곁에 단정한 갈색 구두를 신은 두 다리가 물결의 흐름에 따라 살랑거렸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photos/moonlight-boat-old-boat-wreck-2853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