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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Jul 21. 2024

누수된 자취방에서 정신승리하는 법

원영적 사고로 오히려 좋아

월세살이를 하고 있는 내게 몇 달 전부터 집주인이 종종 전화와 문자를 주셨다. 


잘 지내고 있냐는 따뜻한 안부여도 임대인-임차인 관계라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겠지만 집에 물 새는 곳이 있냐는 연락이라 마음이 더 불편했다. 어떻게 따지고 보면 안부 연락이기는 한데 이제 내가 아니라 집이 궁금한 안부 연락인 셈.




이 매거진 첫 번째 글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모르시더라도 알려드리자면) 월세 상승의 요인인 방수 페인트칠을 한 이후로 걱정스러우신지 특히 비가 오면 연락을 더 자주 주셨다. 


집주인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으신데 자신의 집에 물이 새고 천장이 가라앉아 리모델링 공사로 돈이 많이 들어서 월세를 올린다고 한 상황인 데다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직접' 고치라는 말까지 주셨던 터라 제발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별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거주하는 동안 집에 대해 특별히 요구한 일도 없었는데 맥락상 임대인 몫도 임차인인 내가 고쳤으면 하셔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상황이랄까. 


심지어 이 연락의 끝은 대부분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고 돈이 많이 깨져서 요즘 어렵다는 말로 마무리되어서 나의 보증금이 걱정되었다.




주로 전화를 주셔서, 전화를 받은 날이면 퇴근 후 집에 가서 천장과 바닥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내 드린 뒤 안심하며 잠을 청했다.


간절한 나의 바람을 자취방도 알았는지 그 뒤로도 비는 왔지만 누수 없이 무탈히 지냈고, 집주인도 안심되셨는지 점점 연락의 빈도도 줄어들었다.








여름철 장마 시즌이 왔다.


비가 억세게 쏟아진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맡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게 하루 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안돼!!!! 멈춰!!!!!!!!!!




누수된 자취방 일부 사진




척척하게 젖고 물이 고인 모서리 부분이 침구 머리가 놓이는 자리라 왠지 더 찝찝했고 하룻밤 사이 벽지에 퍼진 곰팡이의 번신력에도 놀랐다.


곰팡이 특유의 콤콤한 냄새가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자취방에 퍼져서 기관지 어딘가가 꽉 압박되는 기분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 준비를 하며 집주인한테 어떻게 연락을 드릴까 고민했다.


착잡했다. 비슷한 사례를 검색해 봤는데 다행히 건물 하자는 임대인이 수리해 주는 것이라고 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상태가 심해서 원활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면 월세 일부 차감 또는 다른 숙박 시설 이용 시 금액을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고 나와서 또 안심.


집주인에게 월세 차감이나 숙박비와 관련해 말씀드리면 대노하시며 절대 안 주실 것 같지만.. 심각하면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벽지 뜯고 바로 수리가 되면 다행인데 배관 잘 못 되어서 뜯고 말리고 할 때 초대하지 않은 손님.. 바선생을 또 마주치게 된다면.. 진짜 이 집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절대 싫다 진짜..




집주인에게 사진과 함께 상황을 설명드리니 평일 오전에 설비 기사님이 오실 거라며 비밀번호를 알려주라고 하셨다. 찜찜해서 내가 집에 있으면서 문을 열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한 번에 끝나면 좋겠지만 추가 방문이 있다면 그때도 내가 참관하고 싶은 마음인데 소중한 직장인의 연차 소진 없이 빠르게 수리가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제발..








이후로 비가 스콜처럼 미친 듯이 몇 번 쏟아져 내렸는데.. 곰팡이와 누수 얼룩이 더 퍼져나가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이겠지..?




좀 울적해져서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누워서 생각하다가 수리하러 기사님과 임대인이 오시기 전에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원래도 2주에 1번 정도 화장실 청소도 하고 방 정리도 하는데 좀 더 꼼꼼하게 해 보자고!


우울한 기분을 날리고 싶기도 했고 집주인이 오셨을 때 괜히 꼬투리 잡히고 싶지도 않은 마음도 컸지만, 이 기회로 정말 오랜만에 대청소도 한다는 원영적 사고와 오히려 좋아 정신을 발휘하는데 의의를 두었다.




평소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창틀의 검은 때를 닦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한 데 모여 죽어있는 날파리 무덤을 치우고, 쌓여있던 계절 옷을 확인하며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을 나누었다.


검은 때가 손 끝에서 지워지고 바삭하게 말라버린 무덤을 치울 때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정리했고, 옷을 정리할 때는 습한 집에 있느라 곰팡이가 슬지 않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샅샅이 살펴봤다. 집이 습해서 내가 아끼는 검은 바지에 하얀 곰팡이가 슬었던 전적이 있기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옷은 발견되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새벽부터 일어나 시작한 청소가 저녁 먹을 시간 즈음 종료되었다. 청소하면서 평소에 먹는 양보다 배로 더 먹었다. 덕분에 칼로리 소모도 하고 집도 깨끗해지고 좋아하는 음식도 양껏 먹고.. 잘했다.. 진짜..


새 습기제거제를 뜯어 곳곳에 배치하고 곰팡이 냄새를 가리고자 산뜻한 탈취제를 뿌리며 소소하게 기분 좋은 순간을 누렸다.




탈취제 향을 곰팡이 냄새가 다시 잠식하기 시작할 때 집 밖으로 나왔다. 


주말에 집에 누워있지 않고 산책이라니 완전 럭키하잖아! 오히려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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