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은 조금 다를지언정 이 가정은 아마 행복하리라

영화 <애비규환>

by 전하민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애비규환>, 2020
'저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저 문장은 자기소개서에 절대 쓰면 안 되는 진부한 문장으로 꼽힌다.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세상엔 여러 형태의 가족이 있다. 문제가 없어 보여도 속으로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인 채로 사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도 서로 위해주며 사는 가족도 있다. 조금 이상한 가족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특히 잘 만들어진 영화는 언제나 깊은 울림을 준다. 최하나 감독의 <애비규환>도 그중 하나다.


영화 <애비규환>, 2020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태어난 토일(정수정)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덜컥 임신을 한다. 심지어 아이의 아빠는 토일이 가르치던 고등학생 호훈(신재휘). 서로 스트레스받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5개월이 넘어서야 이 사실을 부모님께 밝힌 토일은 돌연 가출을 한다. 서울을 떠나 찾아간 곳은 바로 대구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보지 못 한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으러 무작정 고향을 방문한 것이다. 토일은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으로 최 씨 성을 가진 기술가정 선생님을 찾아 대구를 누빈다.


영화 <애비규환>, 2020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환규(이해영)를 찾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잘 지냈냐거나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대신 버럭 화를 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뱃속 아이의 '애비'인 호훈이 행방불명된 것을 알게 되고, 불안에 가득 차 행방을 찾아 해맨다. 재혼한 엄마 선명(장혜진)과 키워준 아빠 태효(최덕문)뿐만 아니라, 십몇년만에 처음 본 친아빠 환규까지 합세하여 동네를 돌아다닌 끝에, 결국 독서실에서 잠든 호훈을 발견한다. 토일은 호훈이 또다시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혼을 망설이지만,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힌다. 그리고 낳아준 아빠도, 길러준 아빠도 아닌 '가장 편한 사람'인 엄마 선명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한다.


영화 <애비규환>, 2020


코미디 영화라고 선언이라도 하듯, 시작부터 쏟아지는 웃긴 장면들에 깔깔 웃었다. '누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호훈의 엉뚱한 구애에 토일은 박력 넘치는 키스로 답한다. 한문 선생님인 태효와 토일은 생소한 사자성어를 쓰면서 싸우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호훈의 부모님은 토일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리는 심각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야한 농담을 한다. 이런 비현실적인 대사들이 극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와 군더더기 없는 편집 덕분이다.


영화 <애비규환>, 2020


촬영과 편집에서 감탄을 느낀 순간도 많았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묻은 오리배 앞에서 고향 친구와 토일이 대화를 할 때, 그녀 뒤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은 정말 따뜻했다. 그 빛은 가족을 닮아서, 저절로 윤가은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또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필름을 넘기듯 유년을 회상하는 장면도 좋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들. 그런 장면들은 기억에 길게 남는다.


영화 <애비규환>, 2020


부모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또 가족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토일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부푼 배를 안고도 과감하게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가족들은 어떤가. 엄마 선명은 비록 결혼에 한번 실패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태효는 친딸이 아닌 토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배려한다. 환규도 한때는 가족보다 자신을 우선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토일을 돕는다. 그들은 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거대한 바위를 들기 위해 노력한다. 토일이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의 책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영화 <애비규환>은 이 문장에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혼 가정에서 자라 과외 학생과 덜컥 아이를 가지고 결혼했지만, 뭐 어떤가. 모습은 조금 다를지언정 이 가정은 아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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