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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ana May 17. 2022

문득 궁금한 나의 첫사랑에게

기타와 그 애

Photo by arstyy on Unsplash

섬세한 기타 소리에 조미료처럼 얹어지는 일렉 기타, 박력 터지는 드럼. 거기다 무심한 보컬의 목소리까지. 2011년 겨울. 스무 살의 난 밴드 음악에 빠져있었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밴드는 자우림, 윤도현 밴드, 국카스텐, 로맨틱 펀치, 데이브레이크... 열거하자면 너무 많다.


그 당시 최애는 자우림!이었다. 시처럼 아름다운 가사에 두근거렸고, 가파른 리듬을 좇아갈 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깊게 가수를 좋아한 적이 없어 어느 정도를 '빠순이'라 칭하는진 모르겠다. 여하튼 당시 밴드를 진심으로 애정했던 '빠'였던 건 분명하다.


생각해보자면 이 애정엔 어느 정도 허세가 첨가되기도 했다. 짱짱한 사운드도 좋지만 그들 음악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되게 있어 보이는 게 더 좋았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던 어린 나이에 ‘밴드 음악이 더 내 취향이다’라는 한마디로 독특해 보였달까.


타지에 처음 홀로 발을 디딘 미성년에게, 괜스레 얕잡아 보이기 싫은 어린이에게, 외로움을 보이기 싫은 아이에게 이들의 음악은 적절한 허세이자 위안이었다.

Photo by goumbik on Unsplash

다시 ‘무심한 보컬의 목소리’, 첫사랑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의 진짜 첫사랑이 밴드 음악은 아니니까.


스무 살, 그때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집과 대학이 그리 먼 건 아니었지만 통학하기엔 교통편이 까다로웠고, 기숙사 생활을 했어야만 했다. 아마 스쿨버스가 제대로 운영됐었다면 통학을 했을 거다. (그땐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내려가면서도 매번 부모님과 헤어질 때면 대성통곡을 할 때였다.)


대학 생활에 별 감흥이 없던 난 밴드 음악 외엔 관심이 없었다. OT다 MT다 과생활도 논외. 그냥 기숙사에 가서 음악이나 크게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뭐 그런 나에게 딱히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말이다.


귀찮은 대학 생활은 '필참'이 어찌나 많던지. 아싸이지만 미움받긴 싫었던 난 그런덴 필히 참석했다. 참석하고 난 뒤엔 내가 없었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는 걸 깨닫고 궁시렁 되긴 했지만.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여러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난 동 떨어진 기분에 이어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동기들은 연극, 힙합, 축구, 댄스 동아리 선배를 따라서 다른 강의실로 이동했고, 난 기억도 나지 않는 동기의 TMI를 들어주고 있었다. 자기 고향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친구들 얘기까지. 이 지루하고 의미 없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기숙사로 가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Photo by nate dumlao on Unsplash

그때 그 애를 봤다. 맞은편 어느 강의실에서 기타가 있었다며 들고 온 애는 처음 기타를 본 듯 헤헤 웃어댔다. "기타 쳐본 적 있어?" 낯을 가리지도 않는지 몇 번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은 내 앞에 턱 하니 앉더라.

 

"아니,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는데" 건조한 내 대답에 그 앤 내 책상에 기타를 얹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기타를 톡톡 쳤다. 만져보라는 건가. 진짜 내가 기타를 한 번도 만져보지 않았다. 정도로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기기 전, 아파서 기타 연주하길 포기했다고 말하기 귀찮아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얼른 기타를 만져봐!라는 듯이 나를 빤히 보기에 기대에 부응해야겠다 싶어 대충 기타 줄을 손가락으로 쓱 쓸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강의실에 동기를 혼자 두기 미안해 감흥 없는 이야길 계속 듣고 있었는데, 한 명이 왔으니 잘 됐다 싶었다.


어, 근데 이 애가 사인을 잘못 이해했나 보다. 내가 본격 기타를 쓰다듬을 줄 알았던 건지 기타를 제대로 보라는 듯 세워줬다. 기타를 대충 툭툭 친 채 자리를 뜨려는데 그 애가 떡하니 기타를 메었다. 기타 줄을 튕기더니 턱을 치켜세우더라. "나 기타 잘 쳐!"


뭐지 싶었다. 0점만 맞다가 처음 백점 맞은 초딩? 딱 그 모양새였다. 남녀공학을 나와 남고생에게 익숙했는데, 이런 류는 처음이었다. 우리 동네엔 입에 욕을 달고 사는 허세 덩어리 혹은 시커멓고 징그런 남자애들 밖에 없었는데. 얜 좀 귀엽달까. 근데 얜 왜 여기서 재롱을 부리고 있지.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는 또 어디 갔대.


그래도 딱 그만큼. 나는 이미 귀찮음이 만땅이었고, 참석하고 싶지 않은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한 터라 피곤했다.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자리를 뜨자 싶어 의자를 밀어 넣었다. 지금 아니면 또 다른 선배한테 잡혀 시간을 버릴지도 모른다. 얼른 도망가야 했다. 내 저녁은 소중해.

Photo by Jruscello on Unsplash

뒤돌아 가려는 순간, 이상하게 귀여움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주인 없는 기타를 가져온 이유도 치고 싶어서인 거 같은데. 괜히 내가 휑하니 가버리면 상처받는 건 아닐까. 꽤 진지하게 튜닝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치는 애 같기도 하고. 궁금했다.


그냥 선 채로 가만히 있으니 그 애가 덧니를 보이면서 씩 웃었다. 매정하게 돌아서질 않길 잘했다 싶었다. 고맙게도 눈치 없는 동기가 나서 줬다. "뭐야, 얼마나 잘 쳐? 말하면 다 쳐?" 그러더니 자기는 래퍼를 좋아한다며 딱히 생각나는 곡이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날 툭툭치고는 "뭐 시켜봐,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게"라고 거들었다.


스치듯 밴드 음악을 좋아했을 때부터 정해뒀던 내 이상형이 떠올랐다. 사실 그 애가 기타를 흔들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해뒀을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의 이상형은 꽤나 단순하고 명확했다. 윤도현 밴드의 '잊을게'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 "난 그거 좋던데, 잊을게"

Photo by jefflssantos on Unsplash

정적, 공백도 없었다. 고민도 않고 바로 기타를 치더라.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약간 떨리던 그 목소리와 가느다란 손가락. 옅은 웃음. 가끔씩 나를 보던 눈빛까지. 그때 알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찌르르하고 울리기도 하구나.


심장이 찌르르 움직인 건 매끄러웠던 기타 소리가 아닌 그 애의 목소리였다. 무심한 보컬의 목소리.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이 기타를 치고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더라. 기타를 들고 헤헤거릴 땐 그냥 소년이더니 그땐 꽤, 남자답더라.


아쉽게도 노래는 후렴이 시작하기도 전 끝이 났다. 앞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왜 아직 여기 있냐고 묻던 (재수 없는) 선배 때문이었다. 그 애는 기타를 책상 위로 벗어놓으며 선배에게 아직 동아리 선택에 고민하고 있다고 짹짹거렸다. 선배 눈에도 걔가 귀여웠는지 잠깐 와보라며 다른 강의실로 데려갔고.


멍하니 있었다. 옆에서 동기가 무슨 말을 건넸던 거 같기도 한데 기억나진 않는다. 오히려 선배가 그 얠 데려간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그 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으니까. 기숙사로 곧장 가려고 했던 계획은 온데간데없고, 한껏 달아오른 볼이 진정될 때쯤엔 우리 과에서 자주 가는 맥주 집에 앉아있었다.

Photo by iameeshangarg on Unsplash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문득문득 그때 그 아이가 생각이 난다. 덧니가 귀여웠고 해맑았고 꽤나 멋졌던. 소년과 남자 어디쯤에 있었던 미숙한 그 애가. 기타 소리를 들을 때면 유난히 더 기억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때처럼 심장이 팔딱거리기도 하고.


아마 결(結)이 없던 관계라 더 아련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부끄러워 오래 쳐다보지도 못해서. 같이 듣는 수업 전날이면 기숙사 옷장을 뒤집어대던 요란하던 그 스무 살의 내가 생각나서.


대학은 졸업한 지 한참이고, 그 애와 난 고향도 다르고, 지금 하고 있는 업도 다를 거다. 이제 더 이상 만날 거리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도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할 거 같다. 아마 과거에 설레였던 그 기억에 젖은 채로 멍하니 있지 않을까.


뭐 말을 건넬 심장이 남아난다면 묻고 싶긴 하다. 아직 기타를 잘 치냐고, 여전히 그 노래를 기억하냐고. 사실 그때 난 너를 좋아했었는데... 혹시, 혹시나 너도 그랬냐고. 그냥, 가볍게 묻는 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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