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라고 보편화 시키기엔 이 문장 자체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만난 '우리'들은 어쩌면 오늘 8시간을 통해 공감과 위로의 힘을 느끼고 일상을 버텨낼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그 '우리'는 바로 몇 개월 전부터 하나의 목표 아래 모인 사람들이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는 사람들, 심리치료 혹은 상담심리라는 전공을 통해 석사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 전문상담사 자격을 위해 모여 수련 받는 사람들이다. 상담을 학문이라는 과정으로 처음 입문할 때 대부분 "저를 알고 싶어서요. 사람의 심리가 궁금해서요. 힘든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요. 상담을 받다보니 저도 누군가를 상담을 해주고 싶어서요"라는 진부한 답변들을 한다. 상담심리 전공으로 대학원을 재수했을 때 두 번의 면접에서 다른 면접자들에게 들은 말이기도 하고 수백명의 지원자들을 10년, 20년씩 만나본 교수님들의 피드백이기도 하며 동료 상담사들의 상담 입문 계기를 종합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 망할 놈의 고마운 열등감 때문에 상담을 시작했고 열등감에 사로 잡혔던 나를 인정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사실 나는 아들러의 '열등감'이라는 심리학문적 개념을 '미움받을 용기'라는 꽤 괜찮은 가치로 둔갑시켜 대중에게 소개시킨 '기시미 이치로' 덕분에 열등감을 망할 것이기도 하지만 고마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어찌 됐건, 나에게 '상담을 향한 열정과 열등감'은 첫째, 돈이 많이 들 거 같아서 미대 진학은 어렵지 않을까. 라고 했던 엄마의 피드백, 둘째, 심리학은 평생 공부해야하는 학문인데 너처럼 놀기 좋아하는 애가 심리학을 어떻게 공부하려고 그래. 다시 생각해봐라. 라고 했던 엄마의 두 번째 피드백으로 부터 생겨났다. 열정과 열등감이 동시에 발현되어 어쩌면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유지하던 결혼 3년 차에 받게 된 부부상담, 그 안에서 발견한 비정상적으로 똑똑한 (전)남편에 대비되는 나의 열등감, 그 당시 상담사가 그와 동맹을 맺어 나를 향한 위로와 공감이 아닌 비난과 질책을 했다는 점에서 무언가 매우 뜨겁고 강렬한 것이 내 안에서 끓어 올랐다. 그게 2013년. 그리고 나는 미대를 가지 못해 맺힌 한과 심리학을 공부하지 못한 한 켠의 결핍을 '미술치료'라는 학문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미술치료가 한국에 도입된 건 1990년대이고 여전히 공인된 국가자격증이 없지만 그 수련 과정은 국가자격증 하나를 따기 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왠만한 열정과 꾸준함 없이는 버티기 힘든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다 사이버대로 학사 과정에 편입하고 미술치료 관련 민간자격증을 따고 운이 좋게 바로 현장에 투입이 되면서 열심히 임상 장면에서 경험을 쌓아오게 되었다. 그게 2014년부터 2023년. 2016년에 별거를 하고 2018년에 이혼을 하기 까지 그리고 그 이후, 제주에 정착하기 전까지 총 5년 정도를 영어 통번역 알바 (성인물 자막 번역 포함), 여행 영어강사, 식당 서빙 알바, 시골집 민박 운영, 프리랜서 미술치료사로 쓰리잡, 포잡을 하며 몸과 영혼을 갈아 살았다. 지난하고 지옥같던 소송 끝에 공동양육 판결이 났기 때문에 평일에 저렇게 살다가 금요일 방과 후부터 월요일 등교까지는 딸들을 온전히 돌보며 살았다.
숨 쉴 틈과 공간이 누구보다 더 크게 필요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한 사람인데 평일에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현실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송장처럼 살다가 주말에 딸들을 보면 그렇다고 온전히 사랑해줄 수 없고 화도, 짜증도, 슬픔도, 고통도 고스란히 다 보였다.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슬프면, 힘들면, 울고 싶으면 마음껏 엄마에게 내 보이라고.... 그렇게 살다가 직장 문제로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해 간 아빠를 따라 딸들이 먼저 이주를 하고 나는 10개월을 기러기 엄마로 살다가 결국 제주행을 택했다. 그게 2020년. 코로나로 많은 물리적 이동이 제약을 받고 집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쓰리잡, 포잡을 하던 때의 열정을 이어갈 수 없었다. 간간히 들어오는 번역 알바로 버티고, 내 수입의 50프로를 떼어가는 상담센터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3년을 그렇게 지내다 결국은 센터 대표에게 악에 받힌 소리를 내지르고서야 나의 지긋지긋한 프리랜서 삶을 끝냈다. 그 과정에서 대학원을 재수하고 두 번째 진학한 게 2023년. 지금은 재수한 그 대학원에서 교수님들을 보필하는 행정직을 맡으며 그래도 별정직 공무원으로 대우받으며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고 있다.
치열했구나, 돌아보니 그렇다 내 삶이.
오늘 만난 '우리'끼리 내 삶의 궤적을 모두 다 나눌 수는 없었지만 '빈의자기법'을 통해 내 최근의 에피소드를 풀어내면서 몇 달간 꽁꽁 감춰 두었던 나의 비밀을 무장해제했다. 일부러 감추려던 건 아니었지만 털어 놓기는 어쩐지 조심스럽고 여전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남편에게 이혼소송, 친권 및 양육비소송까지 두 번의 연타를 이혼 전과 이혼 후에 당하면서 회복되지 않은 충격과 배신감 때문에 고통에서 살고 있다고, 아이들까지 동원한 두 번 째의 소송 때문에 지금은 8개월 동안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어떻게 다 말을 하겠는가.
미국인 아빠와 영미 혹은 국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딸들은 나의 양육 방식이 무섭고 두려웠다고 표현했고 엑스는 딸들이 쓴, 나를 향한 절절한 감정이 담긴 편지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법원에서 소장이 날라오면 누구든 긴장하기 마련 아닌가. 미칠 것 같은 심정을 겨우 억누르고 뜯어 본 소장 안의 내용에 딸들이 쓴 편지가 사진으로 찍혀 법원에 증거라고 제출되었다면? 딸들은 그게 법원에 제출될 줄 알았을까? 왜 그 새끼는 그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었을까? 내가 얼마를 버는지도 모르면서... 한 달에 80만원을 양육비로 요구하며 친권까지 뺏어가겠다는 노랑머리 파랑눈의 그 인간을 나는 여전히 증오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매우 불안정해졌던 나는 툭하면 주변의 상황에 짜증이 올라왔고 행복해보이는 가정과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끓었다. 내가 가질 수 없게 된 것들. 내가 빼앗긴 무엇. 나의 강력한 결핍.
그러면서 내가 가진 짜증과 분노는 가장 가까운 나의 원가족, 나의 부모와 나의 친동생에게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대꾸없이 그 아픈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주었다.
동생의 피드백은 그랬다. '언니가 너무 힘들구나. 그래서 퍼부어 대는 구나. 감정의 필터링 없이 퍼붓는 구나. 그런데 듣는 사람의 감정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들을 가까운 지인에게, 친구에게는 할 수 있는지...' 하고... 나와 6분 차이 동생은 나보다 마음이 훨씬 넓고 나를 잘 용서한다. 물론 나에게 상처되고 가슴 아픈 말을 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자매애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 영역, 내 감정, 내 구역을 침범받을 때 싫다는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미숙한 인간이다. 아빠의 피드백은 이랬다. '우리 지안이가 요새 힘든 일이 있구나. 원래 안 이러던 애가 요새 참 많이 힘든가 보구나. 얼마나 마음 아플까....' 내게 우리 친정 아빠는 최고의 일반인 상담사이다. 공감과 경청이 몸에 베인 분이고 겸손하고 말 수가 적으면서 차분하시고 온정적이시다. 여러가지로 정말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점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 경상도 출신에 부산에서 성장하신 아빠와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친하지 않았고 내가 이혼을 하면서 지옥 속에 헤매일 때부터 내게 그 누구보다 큰 위로와 따뜻한 조언, 공감을 해주신 분이다.
오늘 '우리'에게 받은 피드백은 이랬다. '잎새 (집단 상담에서 나의 별칭)'는 늘 밝고 당당하고, 뭐든 솔선수범, 나서서 일을 잘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문가적인 모습에 반하기도 했고 늘 당당해서 보기 좋았는데... 그런 아픔이 있는 지 정말 몰랐어요. 말하지 않았으면 아마 끝까지 몰랐을 거예요.... ' 라고.... '지금까지 버텨오신 거처럼 앞으로도 잘 버텨가실 거예요...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잘 지내주세요....' 라고....
내가 가슴 깊이 존경하는 교수님께 최근에 들은 피드백은 이렇다. "전선생의 총끼를 내가 느꼈지. 메일을 썼을 때부터, 실존에 대해 논할 때부터, 수업에 임하는 태도를 보면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내 밑에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C 교수 아래서 공부하고 박사는 나한테 오면 좋겠네" 라고.
사랑의 말을 듣기도 했다. "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까지 누군가를 깊이, 가까이 느껴본 적도, 안아본 적이 없어. 너랑 있으면 정말 행복하고 살아 있는 것 같아." 이건 아마 아니 어쩌면 분명히,꿈에서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 꿈은 살아있는 지금일 수도 있고, 어제일 수도 있고, 현실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예지몽같은 꿈일 수도 있다.
내가 나에게 해주어야 했던 말들, 정말 필요했던 말들, 정말 듣고 싶었던 말들을 그들에게서 듣게 되었다.
이런 피드백이 나에게 버틸 힘을 충분히 준다. 어떤 영양분도 수분도 없이 메말라 갈라진 땅을 닮은 심장에
몇 방울의 물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아는가? 나는 안다. 몇 마디의 문장, 몇 마디의 피드백이지만 그건 나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오늘 집단 안에서 '우리'는 뚜렷한 연결감을 느꼈다. 위로 받기 위해서 누군가와 가까이 연결될 필요도 오랜 기간 연결된 필요는 없다. 마지막 회기에서 빨간 실을 손에 감으면서 오늘 나에게 좋은 피드백을 주었던 사람에게 실을 건네고, 또 그 실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실을 건네며 하나의 별을 완성했다. 연결감의 별, 이랄까, 빨간실의 별이랄까. 어떤 이름이든 우리는 연결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앉아 있는 동네 카페에서 우아한 중년 여성의 통화 내용을 엿듣다 보니 또 묘하게연결이 된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천년만년 살거도 아니고, 어. 제일 중요한 게 내 자신이야. 남편이야 여자친구가 있든 말든. 내 자신이 먼저지. 이혼이야 할려면 얼마든지 하지 않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살아야지'
오늘 집단에서 느낀 또 다른 연결감은 바로 '나비'가 보여준 '자유'. 집단 상담 중간에 재능기부로 제공했던 미술치료 워밍업에서 '짝지어 이어그리기' 기법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나비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구속된 나 자신으로 부터의 자유,를 느끼게 했다. 집단 후에 혼자 사후 작업을 하면서 그린 그림에서 나도 모르게 '나비'를 그렸다. 나비는 사실 최근 아래의 글과 그림을 보고 눈물 속에 내 두 딸을 떠올리며 생각해 낸 생명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어떤 말이든 어떤 형태든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 받는다.
새삼스럽게 아니 아주 중요한 시점에 말의 중요성, 전달의 중요성, 시기 적절함의 중요성을 뼛 속 깊이 느낀다. 이 모든 걸 나는 그동안 절절한 피드백에, 위로에, 공감에 굶주렸던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풀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