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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그릇 Aug 24. 2024

#20. '역설적이게도' 이별 후 예뻐졌다.

바로 앞 글에서 말한 이별. 

한 쪽에서 헤어짐을 말한 일을 겪고 있는 중이다. 

관계 중에 나의 성급함으로 두 어번 말했던 그 이별.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내가 다시 주워담았기에 재회로 일어났던, 번복했던 이별. 

세 번째의 이별 통보는 그로부터 온 것,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면 재회로 일어나지 않을 일. 

그래서 아마 이별이 일상으로, 사실로, 기어이 이어질 수도 있을 상황. 


오늘, 아니 그러니까 어제 날짜인 8.23(금) 오전 근무 중에 나를 방문한 귀한 손님으로부터 

'아니, 요즘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 그러니까 어제 날짜로 8.23(금) 저녁, 슬리퍼 신고 만나는 동네 친구에게 '너 뭔 일 있냐. 달라졌다. 살도 좀 빠지고. 예뻐졌어' 라는 말을 들었다. 


며칠 전, 그러니까 우리가 이별하기로 아니. 그가 이별을 말하기 불과 2일 전, 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한없이 귀여워하고 아껴주고, 사랑을 주고, 예뻐해주던 그. 

다시 상기하기 힘들고 고통이던 시간을 때론 그와 함께, 때론 그로 인해서 보냈던 지난 1년 그리고 최근 몇 달. 


"그래서 내가 오늘 거울을 보는데 문득 내가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누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않아도 내 스스로가 빛이 나고 있다는 눈빛이 살아있고 빛이 난다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통 속에서 빛난다는 게 얼마나 큰 정화의 작업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충분히 아파봤고 괴로워 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삶에서 맞닥뜨리게 될 어떤 종류의 고통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 그로 인해 내가 더 빛이 날 수 있다면, Fear nothing, Keep on shining, 내 발목에 새겨진 타투처럼 나는 이 모티브로 계속 고통받아 고통받고 빛나고 반복해서 살아나갈 것이다. 고통을 움켜쥐지 않고 단지 내 손 안에서 지긋이 바라보며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을 지켜봐주는 아름다운 작업을 계속해서 해나갈 것이다. 어차피 인생에서 고통은 덜어낼 수 없는,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받아들이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편안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뻐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랑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기 때문에 피부도 고아지고 정말 사랑받는 느낌 때문에, 특히 여자는 예뻐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말 그의 눈에 내가 예뻐 보였나 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나를 찾지 않는다. 내 곁에 그대가 내 곁에 그가 없어진 것인지, 그의 곁이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견뎌진다. 


고통이 승화되면 마치 몸에 사리가 남는 스님의 유해처럼 나의 고통도 사리가 되어 빛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고통을 정말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정말 견딜 만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견뎌진 것이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견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은 흐르기 나름이니까 흐르기 마련이니까.

게슈탈트의 관점으로 고통을 배경에 두고 나의 현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 나의 과업들, 나의 더 큰 목표와 삶의 방향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이 물러나게 되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고통은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이 물러나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다.

 현실치료 관점에서 보면 나는 고통받지 않기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비결정적인 존재로서 태어났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도, 자신의 감정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상황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지극히 비밀스럽고 이 세상에 단둘이만 공유할 수 있는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반드시 그와 고통을 함께 경험했던 그와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경감이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에게 내 고통을 더 분담시키는 것, 더 가중시키는 것이다.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는 우리나라를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히딩크 감독의 은퇴 뒷모습처럼 고통도 그렇게 물러나기를 바라며 바라볼 때 고통이 알아서 물러나고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이고 당신 손에 달려 있다. 내 손에 달려 있다.


나는 이렇게 고통받지 않기로 선택한다.



최근에, 아니 원래 걷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주는 휴식같은 시간, 해변 걷기를 하면서 종종 음성으로 글을 남긴다. 내 마음에서 요동치는 소리를 바로 바로 들려주면 고맙고 편리하게도 클로바라는 AI 친구가 글로 바꾸어 준다. 그렇게, 맨발로 맨발걷기 하면서 남겼던, 나에게 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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