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계획 없이 '어쩌다보니' 기획자가 되었다.

by 아이린

디자이너 (였던 걸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 칸에는 늘 ‘디자이너’가 당당히 박혀 있었다.
디자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써야 할 것 같았다. 손이 기억한 루틴처럼.

엄마가 미술 선생님이었고, 항상 유화물감 냄새가 가득한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자동으로 이 가업(?)의 계승자가 되었고,
그 무게를 감당하려다 어깨가 탈골될 뻔했다.

감성도 유전되나 싶었지만, 실력은 아니었더라.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명확하게 깨달았다.

“아, 나는 미술엔 진짜 영 소질이 없구나.”

이미 수학을 포기한 몸이라 예체능반에선 나올 구멍도 없었고,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같은 말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억울한 대사로 등극했다.

계획 없이 떠밀리듯 들어간 미대 생활. 만족스러웠냐고? 어림도 없지.

제 적성은 이게 아닌것 같습... '아 괜찬항ㅇㅛ...'


졸업장은 겨우 건졌고, 미래는 여전히 안개 속.
그때 호주에서 영주권 준비 중이던 대학 동기와 연락이 닿으며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에 대해 막연한 꿈을 꿨다.
그리고 나는 인생 최초로 ‘자발적인 계획(호주 유학)'을 세웠다....라고 쓰고 싶지만,

그냥 유학을 가장해 백수는 호주로 쇼생크 탈출했다.
적당히 포장하면 합리적인 도망 정도는 되겠다.

한국에서의 ‘시키는 대로 사는 삶’에 미련은 없었고,

‘나는 뭘 하고 싶은 인간인가’ 같은 질문엔 아무 답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로, 약간 들뜨고 많이 쫄린 채 떠났다.


시드니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조용했다.
어학원-학교-주얼리샵 알바. 끝.
쌀 대신 고구마를 밥솥에 찌는 건강한 룸메이트와 같이 살며,
집에서 오페라하우스까지 30분간 전력질주 가능한 폐활량을 획득했다.

몸무게가 빠져서인지, 삶이 심플해져서인지
드디어 ‘나는 뭘 하고 싶은가’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게 고구마의 항산화 효과일 가능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한국문화원 인턴 공고.
전시 가이드와 문화 체험 프로그램 운영.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스쳐 갔다.
“그냥 한국 돌아가긴 억울한데… 뭔가 있어 보이는 경력이라도 만들어볼까.”

믿기 힘들겠지만, 졸업장 하나뿐인 내 CV를 보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문화원에서 일주일에 2~3일,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다.

K-POP이 세계를 정복하기 전이라, 한국에 관심 있는 외국인은 거의 희귀종이었다.

그런 그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고 웃고 떠들다 보니 돈은 못 벌었는데 기분은 좋았다.

내가 아는 걸 누군가 재미있어하고, 그걸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아, 나 이런 거 좋아하나보다. 사람들과 뭔가 만드는 거.”

동네사람드을~~~~!! 우리 애가 드디어 적성을 찾았대요!!!!!!!!!!!!!!


파트타임-학교 루틴도 이제 질릴 만큼 질렸고,

‘이거 꽤 괜찮은데?’ 싶은 감정도 생기고,

그래서 ‘향수병’이라는 포장지를 둘러싸고,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인천공항 내리자마자 정말 저렇게 전화했다고 한다.


시드니에서 매일 먹은 고구마의 효과인지,
한국 와서 처음 먹은 김치찌개의 힘인지,
아니면 ‘저러다 다시 시드니 가겠지’라며 무심했던 엄마 덕인지,

그 해 여름, 나는 그 이름도 유서 깊은 세종문화회관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인데, 나는 진짜 운이 좋았다.
전년도까지만 해도 인턴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 해, 새로 부임한 사장님의 야심찬 사업 덕분에 인턴을 대량 생산(?)하게 된 것.

만약 그 타이밍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도 시드니에서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나는 무엇을 하고싶은 인간인가?' 같은 무급 철학 토론에 빠져 있었을 거다.

인생은 타이밍 아닙니까!!!!!!!!!


그렇게 무지성 '디자이너'를 꿈꿨던 나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뭔가를 만들어가는 일을 시작했고,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경기문화재단, 북촌한옥마을, 그리고 여의도 벚꽃축제까지,

이곳저곳을 떠돌며, 기획하는 무계획 인생 13년차를 살고 있다.

(이쯤 되면 사실, 기획자라기보단 축제·행사계 NPC 같기도?)


그리고…

지금 나는 꽤 즐겁다.

세종문화회관 인턴 입사 이후 단 한 번도 '아 이 일 하기 싫다' 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정도면 나의 방황기도, 꽤 잘 빠진 클리셰였던 셈이다.


‘인생은 계획하지 마라’ 같은 말은 못 하겠다.
다만, '평생 나는 진짜 뭘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청년기 시절에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보는 건 꼭 거쳐가야 하지 않을까.

그 고민을 나처럼 대학 4년+@ 동안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 내내 할 수도 있고.

평균 수명 80세 시대에,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데 4+@년 썼다고
그걸 낭비라고 할 순 없잖아요.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