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을 한 문장으로 설명 못 하는 사람 여기 모여라.
자, 아래 대화는 내가 지난 13년간 이 업계에서 일하면서,
내 직업을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반복되는 장면이다. (특히 소개팅에서)
리슨 케어풀리.
① 브런치씨: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② 아이린: 안녕하세요, 저는 13년간 문화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아이린이라고 합니다.
③ 브런치씨: 문화기획자요? 아, 어디서 일하고 계신가요?
④ 아이린: 아, 저는 지금 00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⑤ 브런치씨: 아 문화재단 직원이시군요? 박물관 같은 곳에서 일하시나요? (큐레이터쯤으로 착각한 듯)
⑥ 아이린: 아니요, 저는 지역문화팀이라 옛 대학교 폐교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 청년들의 문화예술 창업을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⑦ 브런치씨: 아, 네...(복잡하고 낯선 얘기에 급속 냉각)
이런 식의 소개를 하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예술 쪽은 잘 모르겠는데, 특히 기획자라고? 에라, 설명해줘도 뭔 말인지 모르겠으니 그냥 웃고 말자’
라는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낯선 분야에 호기심이 폭발해서 질문폭격기로 돌변한다.
혹시 이 하찮은 브런치를 읽고 있는 당신은 ‘변호사’, ‘외과의사’, ‘초등학교 교사’처럼 직업명만 들어도 대충 어떤 일 하는지 짐작이 가는 직업을 가졌나요?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살아오셨군요! … 아니죠, 부럽습니다. 진심으로요.
그래서 나는 낯선곳에서 나를 소개할때, 직업 대신 '직장명'이나 일하는 '장소명'을 꺼내는 편이다.
'00문화재단' '00아트센터' 라고 말하면 적어도 뉘앙스로 내가 무슨 판에서 노는지는 눈치챌 수 있으니까.
진정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뭐 하세요?’라고 묻겠지만,
대부분은 ‘어, 저 00아트센터 근처 맛집 잘 아는데!’로 화제를 돌린다.
사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문화예술 쪽 기획자도 ‘(주)아이린축제대행사’ 같은 개인 사업체를 차리지 않는 이상, 결국 어딘가에 소속돼서 조직의 뜻에 맞는 기획을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조직의 요구에 맞춘 기획을 하고, 연차가 쌓이기 전엔 거대한 프로젝트의 부품 같은 일을 한다.
전체 구성을 윗분(대표 또는 PM)이 잡고 나는 그 밑에서 실행하는, 우아해 보이는 백조의 미끄러지는 발놀림…의 그 경박한 다리 역할 정도?
그리고 어느정도 초짜 티를 벗고 나서, 조직의 요구에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을 슬쩍 섞을 수 있는 ‘짬’이 생긴다.
그럼 언제쯤, 몇 년 차에?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을 마음껏 할 수 있냐고?
아마... 다음 생에? ... 농담이고, 그럴려면 대행사를 차려 CEO가 되던가, 문화재단 같은 기관의 대표가 되면 된다.
근데 그 CEO도 대표도 결국 돈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윗선 눈치 봐야 하니까 나름의 고충은 있다.
(아무래도 진짜 다음 생에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화예술'은 다른 분야보다 열려있고 자유로울 거란 환상,
'기획자'라는 자기 정체성 진하게 담을 수 있을거란 착각,
그 두 개가 합쳐진 '문화예술 기획자'는 창의적이고 톡톡 튀고 자유로운 영혼들한테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 욕망보다는 조직 요구,
남들 일할때 일하고 놀 때 일해서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못 즐기는 '문화 소외계층',
내 회사를 차려도 결국 먹고살려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할 수는 없는 현실을 겪어보면,
그리고 거기에 문화예술 특유의 '짠내(a.k.a.박봉)'가 합쳐지면,
내가 가진 기획자로서의 위대한 포부따위는 사라지고 '그냥 공공기관 직원' 이 되거나, '무엇이든 아무거나 돈이되면 해드리는 대행사 대표'가 되기도 한다.
자, 이렇게 문화예술 분야를 모르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기획자에 대한 모든 환상을 한 방에 깨줬다.
이래도 아직도 이 직업이 꽤 좋아보이는가?
(좋아 보이면 아래로 스크롤, 싫어도 스크롤하시오.)
그래서, 대체 왜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냐고?
글쎄, 가끔은 나도 묻고 싶다. 내가 미련한 건지, 아니면 이 일만이 주는 묘한 쾌감 때문에 놓지 못하는 건지.
이 직업은 일단, “내 인생 박살 내고 남 인생 반짝이게 만들기” 경쟁 종목이다.
행사 준비할 땐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더라?”를 백만 번쯤 되뇌고,
현장에선 눈 밑 떨면서 포스터 붙이고, 하루종일 나만 찾아대는 모든 관계자의 욕받이가 되고,
행사 끝나면 허리 삐끗한 채로 행사장 쓰레기 줍고 있다.
하지만 막상 완성된 현장을 보면 ‘그래, 이 맛에 하는 거지’ 싶은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춤추고,
누군가는 자기 작업을 처음으로 세상에 꺼내 놓고,
누군가는 “아, 이런 것도 있네” 하고 눈을 반짝일때,
그 한순간에, 내가 경박스러운 백조 다리질을 얼마나 했는지, 예산을 얼마나 쥐어짰는지 다 잊게된다.
집에 돌아오면 정신적 공허와 물리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바닥에 드러누워
“오늘 너무 좋았어요!” 카톡 한 줄을 보며 피식피식 웃는 내가 좀 무섭긴 하지만.
(이쯤되면 직업적 정신병 맞는것 같기도)
이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무언가를 만들어 올리는 일이다.
그게 비록 한철 지나면 사라질 팝업이든, 남들 기억에서 잊힐 작은 전시든,
내 손끝에서 뭔가 시작된다는 감각. 아마 그게 없었으면 진작에 다른 일 찾았을거다.
그러다 다시 엑셀 열고, 정산표 앞에서 울면서 커피 빨아야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요약하면 문화예술 기획자란?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자기 삶은 헌납하는 직업”,
혹은 “나만 빼고 다 즐거운 판을 만드는 사람들”.
사실상 문화판의 자영업자 메타, ‘문화 소외계층’의 왕좌라고 할까나.
<기획자의 웃픈 진혼곡>을 지금까지 듣고도 이 직업이 좋아 보이는가?
좋아 보이면 연락 주세요. 현장 일손은 늘 딸리거든요.
그리고 부탁인데, 이 업계 들어오면 어디가서 “워라밸”이란 단어는 꺼내지 말아야 한다.
싫어 보이나요? 잘했어요. 본능이 살아있군요. 앞으로 제 글을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