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또 보틀 케이크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젤라또를 만들고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 단 하나의 의문점없이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컵에 반반 나눠 담고, 포장용기에도 나란히 담는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다 그러기 때문에 그게 법칙처럼 생각했었다.
손님께 스쿠핑을 하다보면 그런 광경을 발견할 수 있다.
'저 맛 섞이는거 싫어서 그냥 한 가지맛으로만 먹을게요.'
'맛끼리 잘어울리는 조합이 없을까요?'
어떤 조합은 우연히 만나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어떤 맛은 섞이는 순간, 서로의 개성을 흐리거나 아예 무너뜨리기도 한다. 특히 향이 섬세하거나, 단맛의 결이 다른 경우에는 옆 맛의 잔향만으로도 전체 인상이 바뀌어버린다. 그때의 경험은 ‘새로운 조합’이라기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선택에 가깝다.
나란히 담긴 젤라또 중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맛도 있다. 언제, 어떻게 먹어도 큰 차이가 없는 맛들이다. 하지만 어떤 맛은 다르다. 온도, 질감, 단맛의 순서까지 의도된 흐름 속에서 먹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같이 있을때 시너지가 나는 맛들이 분명히 있고, 이 맛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싶었다. 고민하는 지점이 어느 순간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맛을 만드는 방법에서, 맛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으로.
내가 가게를 열면서 정말 많이 감사해하는... 나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감사한 가게가 있다. 그것은 바로 '파티세리 송버드'다. 덕분에 젤라또를 어떻게 고부가가치의 디저트 상품으로 포지셔닝할지, 맛의 레이어를 어떻게 쌓을지 고민하게 됐다.
매번 신메뉴가 나올때마다 먹어볼 정도로, 그럴때마다 단 한 번도 실망이 없을 정도로 그저 GOAT인 가게다.
그러던 중 초여름에 송버드에서 나온 블루베리 베린느를 먹게 되었다. 베린느를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투명한 컵 안에 여러 요소를 층으로 쌓아 보여주는 디저트다.
한 스푼으로 크게 떠 먹으면, 블루베리와 콩포트, 크림의 요소가 입안에서 겹겹이 조화를 이룬다. 젤라또도 잘 어울리는 맛끼리 베린느처럼 구성하면 어떨까?
그리고 실제로 미국엔 Gelato Layers라고 젤라또와 갖가지 요소들을 한 컵에 담아 파는 상품이 있다.
송버드와 Gelato Layers에 영감을 받아 우리 가게만의 독창적인 맛을 담은 'Gelato Journey'를 기획했다. 내가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맛봤던 맛을 재현했고, 각 나라의 맛을 한 컵에 온전히 담는 것을 구상했다.
부드러움만 이어지면 금세 평면적으로 느껴지기에, 반드시 한 가지는 식감에 변화를 주는 요소를 더했다. 시리얼이나 쿠키 크럼블처럼, 씹는 순간이 남도록.
일회용 플라스틱컵은 너무 얇고, 종이컵은 마땅치 않아 쿠키용기를 샀다.
디자이너분께 디자인도 의뢰드렸으나..
여름 성수기 대응과 이것저것 잡다한 일들. 아무튼 우선순위에 밀려 결국 시도를 못했다.
그렇게 서서히 잊고 있던 찰나에 비수기가 왔다. 따듯한 음료를 추가할지, 아니면 젤라또로 다른 상품을 개발할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마음을 다 잡게된 계기가 몇 개 있었는데...
첫 번째는, 추석 선물세트를 팔았을 때 깨달은 인사이트였다. 이번 추석때 흔히 보기 어려운 제철 과일로 소르베 선물세트를 기획했었는데, 그 당시 유동인구가 많지 않았음에도 객단가가 높아 매출에 큰 보탬이 됐다.
어차피 겨울은 추워서 사람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계절이니, 단순히 컵을 많이 파는 것보다 포장박스나 선물세트 등 객단가를 높이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또 12월은 연말이라 모임이 많을테니 다음과 같은 방향을 생각했다.
1. 객단가가 높아야 하는건 당연한거고
2.지인 또는 가족들과 함께 나눠먹기 좋고
3. 비주얼적으로도 괜찮은
4. 포장 자체도 예뻐야 하는 것 !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안성재 셰프 채널에서 본 내용이다.
맞네. 나 하고 싶은거 하려고 젤라또 가게 차린건데. 이왕 겨울에 손님이 많이 없고 시간이 남는다면, 어떻게든 하고 싶은 기획을 실행해보자. 실패하더라도 핑곗거리, 그리고 배움이 있을테니깐.
평소에 파티세리, 케이크 가게 계정을 팔로우 해놓고 많이 보고 있다. 젤라또 업계가 아닌 비슷하면서도 다른 타업계의 게시물을 보면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샘케이크 브랜드 자체의 미감을 굉장히 리스펙하는데, 연말을 맞아 딸기 보틀 케이크를 준비하신듯 했다. 궁금해서 한번 먹어봤는데 맛이 괜찮았다.
트리 모양도 연말에 딱 맞고! 간편하게 먹기도 좋아서 맘에 들었다. 어랏 생각해보니 이 용기(트리)에 젤라또를 층층이 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겨울 시즌을 겨냥해 트리 뿐만 아니라 눈사람 용기도 있었다! 이왕 하는거 트리와 눈사람에 각각 젤라또를 층층이 쌓아 기획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1) 눈사람 보틀케이크
겨울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눈사람! 그 포근한 이미지를 젤라또로 풀어내고 싶었다. 가게의 시그니처인 소금우유 젤라또를 중심으로 쿠키 크럼블을 더하고, 리치 젤라또와 딸기 소르베를 차례로 쌓았다. 잘 만든 딸기 케이크를 젤라또로 구현한 느낌이랄까.
리치 젤라또를 중간에 배치한 데엔 이유가 있다. 부드러운 풍미의 소금우유 젤라또와 상큼한 딸기 소르베 사이에서 맛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브릿지 같은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디저트인 이스파한에서 착안했다. 라즈베리와 리치, 장미를 조합한 디저트인데, 직접 먹어보면 그 조화로움에 반하게 된다. 리치와 베리류의 궁합이 좋다는 점을 몸소 깨달았기에, 이 조합만큼은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2) 두바이 쫀득 트리 보틀케이크
지금은 두쫀쿠 전성시대. 이 흐름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젤라또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카다이프 대신 파에테 포요틴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 파에테 포요틴의 넓은 결이 만들어내는 바삭함이 피스타치오 페이스트에 버무렸을때 더 경쾌한 식감을 자아낸다.
'피스타치오 젤라또 - 피스타치오 페이스트에 버무린 파에테 포요틴 - 초코 젤라또' 순으로 구성했다. 많이 판매하고 싶었지만, 피스타치오를 수급하기 어려워 소량만 열어두고 바로 판매를 중단시켰다.
판매하고 나서, 손님분들의 반응을 들었다. 만족하실 거라 예상한 만큼, 호평이 많았다ㅎㅎ 한 입에 맛이 풍부하게 느껴져 좋았다는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다. 어울리는 맛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그 조합에 의미를 더해 기획하는 과정이 보람 있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파에테 포요틴이나 쿠키 크럼블 같은 바삭한 식감의 변주가 있어 좋았다는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앞으로도 층층이 레이어를 쌓아 만든 젤라또 보틀 케이크를 다양하게 개발해가고 싶었다.
잘 어울리는 맛과 식감을 조합하고, 그 안에 의미를 담은 상품.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