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또 케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번 여름부터였다. 젤라또는 보통 한 컵 또는 박스에 담기는 디저트다. 그리고 주로 가게에 직접 가서 먹는 디저트이기도 하다.
젤라또는 행복한 순간을 상징하는 아이코닉한 디저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순간은 꼭 밖에 있어야만 가능한 걸까? 가게를 들러야만, 그 자리에서만 먹어야 할까?
만약 젤라또를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소중한 사람들과 집에서 나눠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의 가치는 더 커지지 않을까. 따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연말, 젤라또 케익으로 그런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각 모양의 레터링 케익, 반원형 돔(Zuccotto) 등 여러 형태를 고민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닿았다. 젤라또 케익은 맛은 기본, 그리고 '예뻐야 한다.'
소중한 순간을 함께 나누고, 그 장면을 기록하고 싶어지려면 모양부터 괜찮아야 한다.
크리스마스, 연말하면 떠오르는 매개체를 정리하고, 그에 맞는 실리콘몰드를 찾아봤다.젤라또 케이크는 형태를 잡기 위해 꽝꽝 얼려야 하기 때문에 탈형이 쉬운 실리콘 몰드가 필수다. (독특한 실리콘몰드는 미페이스트리에 많다.)
연말 케이크는 보통 4인 이상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소규모 모임이나 둘이서 보내는 연말도 많다. 양이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2명이서 먹기 좋은 소형 케이크를 구상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오브제가 있어 볼거리가 있는 케이크를 떠올렸다.
(다음에 만든다면 크기를 키울 생각이다. 들어가는 노력은 거의 같은데, 차라리 큰 케이크가 효율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은 미약한 그림에서부터.)
트리는 우선 확정. 그 옆에 놓일 요소를 진저맨으로 할지, 눈사람으로 할지 고민했다.
그림을 그린걸 바탕으로 우선 만들고 비교를 해봤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고민만 지속...
혁오의 옛날 앨범을 종종 즐겨듣는 편인데, 공드리를 오랜만에 듣다가 뮤비 장면이 떠올랐다. '아 이거 뮤비 장면이 완전 겨울겨울했는데.. 한번 다시 봐볼까?'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떠올려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조용히 눈이 내려앉은 숲이다. 케이크의 형태는 이 장면에서 정했다.
하얗게 쌓인 트리, 그 옆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 진저맨.
차갑고 고요한 풍경이지만, 눈 속에 벌러덩 누워 쉬고 있는 사람을 상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내가 눕고 싶은 것도 있다)
그래서 젤라또 케이크를 ‘하얀 숲의 겨울잠’이라 이름 붙였다.
트리는 잘 어울리는 맛의 조합, 진저맨은 같은 재료(초콜릿)를 다른 식감으로 풀어냈다.
트리: 익숙하지만 검증된 맛의 조합
노릇하게 구운 피스타치오로 풍미를 살린 피스타치오 젤라또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빈을 아낌없이 넣은 바닐라 젤라또
신선한 설향 딸기로 만든 딸기 소르베
진저맨: 초콜릿 식감의 변주
오독오독 씹히는 초코바가 연상되는 초코 코팅
바삭한 파에테 포요틴
꾸덕한 초코 젤라또
일반적인 케이크 시트는 차가운 젤라또와 만나면 금세 눅눅해지기 때문에 바삭한 식감을 넣었다. (딱딱한 초콜릿 층과 바삭한 파에테포요틴) 다만 이 장치를 진저맨에만 적용한 탓에, 트리의 식감이 상대적으로 단조로웠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젤라또 케익을 만들때 생각보다 정보가 많이 없어 처음엔 애를 먹었다. 하지만, 무스 케익 제작 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얻었다.
무스 케이크는 각각의 구성 요소를 따로 준비한 뒤 몰드 안에서 레이어를 쌓아 냉각시키고, 탈형으로 형태를 완성한다. 젤라또 역시 낮은 온도에서 형태를 잡고 몰드에서 꺼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구조가 가장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느꼈다.
*트리
*진저맨
젤라또를 몰드에서 꺼내면 표면이 고르지 않은 경우가 많아, 그걸 어떻게 가릴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젤라또 기술은 있지만 제과 기술이 충분치 않아 아이싱은 애초에 배제했다. 크림을 바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선택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처음에 트리에 식용색소를 탄 글라사주를 만들어 뿌릴까 하다가.. 식용색소 냄새가 너무 심하고, 글라사주에 대한 기본기가 너무 없어 포기했다.
결국 트리엔 데코 스노우를 뿌리고 식용 볼을 올려표면의 흠을 가렸다.
진저맨은 코코아 파우더를 뿌리거나, 꺼낸 뒤 초콜릿을 입히는 등 여러 시도를 거쳤다.
결론은 몰드에 미리 초콜릿을 입히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진저맨 몰드는 구조상 초콜릿을 얇게 바를 경우 탈형 과정에서 쉽게 파손된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손과 다리의 연결부는 다른 부분보다 두껍게 초코를 발랐다.
이 방식은 작업하기에는 편리했지만, 글라사주나 가나슈에 비해 초콜릿층이 두꺼워져 식감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초콜릿이 너무 딱딱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매끄러운 식감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젤라또는 상온에 있으면 금방 녹기 때문에 형태 유지를 위해 급속냉동고가 필수다. 작업할 때마다 급속냉동고에서 꺼냈다 넣기를 반복해야 했고, 일반 디저트처럼 한 번에 작업 공정을 진행할 수 없었다.
매번 하나씩 작업해야 한다는 점이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큼직한 다인용 케이크가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가게는 홀 공간은 넓지만, 주방은 오픈형으로 비교적 좁은 편이다. 처음 가게를 기획할 땐 손님이 머무는 공간에 집중했지만, 장사를 할수록 젤라또 개발에 욕심이 생겼고 주방 구조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됐다.
너무 좁고 비효율적으로 설계가 되어있다. 다시 돌아간다면 주방을 더 넓히고, 공간 자체를 새로 설계하고 싶다. (주방을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시스템을 만드는게 중요하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다.)
첫 시도라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시도했기에 앞으로 보완할 지점이 분명해졌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다음에 한다면
1) 식감의 변주를 더 늘리고
2) 젤라또를 감싸는 층은 더 얇게 만들고
3) 크림이나 다른 제과적 요소도 함께 활용하고 싶다
그리고 생각보다 젤라또 케익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내가 너무 늦게 예약을 오픈했고, 미리 준비하지 못했지만 다음 시즌때는 아예 각잡고 일찍부터 준비해서 더 풍족해지고 싶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