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 일지

38세 증권사 싱글남의 여피스런 일상다반사

by Jeremy Yeun
20161215_231527.jpg 서울 대한민국 2016


1. 10년간 해온 PB를 뒤로하고 본사 발령이 났다. 발령이 나고 회사 동기 페친들을 다 끊어버리니 왜 끊었냐고 난리. 얘들도 내 페북을 눈팅만 하고 있었구나... 하긴 남자들은 대부분 페북을 눈팅만 하고 있지. 왜 끊었냐는 말에 내가 한 대답은 '내가 페북에 실수할 수도 있어서 그래.' 왜냐면... 말이라는 것이 돌고 돌더라. 암튼 동기뿐만 아니라 회사 사람들은 싹둑 다 잘랐다. 20명 정도 되는 듯.


2. 여의도에 가면 여의도에서 일하는 페친들을 많이 뵐 수 있을듯하다. 페북상에서 교류만 했던 분들... 그게 쉬운 건 여의도의 독특한 문화 '점약' 때문일 수도. 점심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 무능의 의미로도 여겨지나 보다. 그래서 업계 사람이든 어디든 점심 약속을 잡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면 '아~ 그 사람은 내가 예전에 점심 한번 한적도 있었지.'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하긴 나도 '아~ 그 사람 나랑 페친인데....'라는 것과 비슷. #페친이_모?


3. 여의도에서는 점심에 커피 한 잔을 하고 마음에 들면 저녁에 식사를 하던 문화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업계 사람을 소개로 만나고 싶지는 않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시장이 안 좋으면 같이 '쩔어' 있어야 하니까.


DSC_8487.JPG 계림 중국 2017


4. 파생상품 발행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도매 업무부터 차근차근 배워간다. 근데... 이 파생상품이라는 게.... 대표적으로 ELS... 이건 내가 대략 근무할 5년 동안에 한 번은 털릴 것 같은데... 음모론이 아니라 언젠가는 한 번 시장은 또 폭락장을 경험할 테니 말이다. 그 햇살 밝던 2007년을 뒤로하고 리만사태가 터졌던 것처럼 말이지. 그때도 폭락장을 예견했던 루비니 교수 같은 일부의 사람들이 있었듯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아예 없지도 않다. 게다가 남의 돈을 10년은 운용해본 나 같은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펀더멘탈만 분석하는 사람들에 비해 겸손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크든 작든 털린다는 것을 매맞아 가며 경험해봤으니. 그래서 시장을 분석할 때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듯 의심하며 보게 된다. 돈을 운용하다 깨지는 것과 펜대만 굴리다가 깨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니까.


5. 작년에 샀던 허먼 밀러 의자. 본사에서도 쓸까 하는데 동기말로는 '야~ 그 부서에 자기의자를 쓰는 사람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집으로 가져가는 중이다. 이래서 내가 본사를 그동안 멀리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자율성 없이 깝깝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DSC_7390(1).jpg 교토 일본 2017


6. 6년간 살던 청담동을 지나 10월 중으로 여의도 한복판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마포 신길 대방 당산... 이런 곳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나는 그럴 바에는 그냥 회사에 걸어 다니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 한 10년은 다닐 테니 그게 나을 것이다. 대략 오피스텔 단지를 보니 다들 깨끗한 애들은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쪽에 많다 ㅠㅠ 회사는 동여의도 쪽 금융타운인데... 자전거도 애매하다.


7. 이사를 가려니 그동안 쌓여있던 미수선 충당금 같은 거 받아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그간 연락 한 번 없이 지냈던 주인 집하고도 통화해야 하는데 ㅋㅋㅋ 월세를 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또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듯하다. 바로 전 잠실 살 때도 뜬금없이 주인 할머니가 고맙다고. 일단 집을 깨끗이 썼고 월세 안 밀려서. 나 나름 퀄리티 세입자였어...


8. 금요일 발령이 나고 월요일 본사 출근인데 이틀간은 지점 일을 정리할 시간을 받았다. 신입 때부터 YEUN 주임 대리시켜줘야지 했던 분들부터 지금은 소원해진 손님들까지 모두 전화를 드렸고.. 어떤 분은 자그마치 1시간 40분 동안 통화한 분도 계셨다. 집에 오니 9시다.


DSC_8782.jpg 계림 중국 2017



9. 몇 달만에 통화한 분도 있었는데.... 매출 수백억에 당당한 42세 여자 사업가님은 5월에 술 한 잔 했었는데 그 사이 간암 말기에 폐가지 전이가 되어 사지를 헤매다가 겨우 통화가 되셨다. 서울 근교에서 항암 치료 중이신데...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분의 인생을 돌아보기도 하고 완쾌가 되면 좀 다르게 살 것 같다는 이야기 등등...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되어버리니 나 역시도 충격이 컸다. 위로의 말씀을 연신 드릴 수밖에.


10. 6군데의 병원에 갔었는데 대부분은 위가 문제다라고 치부했고 5번째서야 간암과 폐의 전이를 찾아냈다. 6번째 세브란스의 간암 권위자에게 갔는데 간암만 있다고 진단하길래 폐암도 있다고 말을 하니 그제야 폐암이 있는 것을 이야기하더란.... 그러면서 한 달을 허비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의사들이 대부분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험들은 누구나 다 있을 것 같다. 의사들이 일을 대충대충하는 것, 그리고 더 비싼 약으로 유도하며 매출을 올리려는 것들....


DSC_5811.JPG 파리 프랑스 2017

11. 나도 전문가라고 '불리'우지만 솔직히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전문가로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한편으로는 나보다 전문가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전문가가 없는 것 같다고. 그렇게 기대치를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하고 당해도 정신건강에 좋다. 지도 사람이지 하면서...


12. 한식과 야채 위주의 식단, 물 많이 마시고 규칙적인 운동이나 즐기는 운동. 이런 틀에 박힌 '암 예방 수칙'은 주변의 누군가가 그렇게 되어야 뼈저리게 느낀다. 정말 반성을. 이제 여의도에서는 점심시간이 90분은 되니 중간에 요가나 헬스, 권투, 테니스, 하다못해 단체 기합이라고 불리는 크로스핏, 주짓수(이건 뭐지?) 등등 암거나 잡아서 좀 꾸준히 해야겠다. 드디어 머리도 빠지고 올해 체력이 예전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시력도 떨어지고 기억력 떨어진 거야 좀 됐고.... 주차장의 차는 이미 시대를 앞서 자율주행의 시대로 간 거야? 분명 지하 1층에 해놨는데 말이지. 지가 간밤에 어딜 다녀온 거? 노망에 치매까지 더블 콤보다. 확실히 30대 후반이 되면 이제 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같아. 아... 옛날이여....


DSC_8427.jpg 계림 중국 2017


13. 본사에서는... 뭔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한다.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칭찬도 한 5가지 정도 의미를 담아서 하기 때문에 실실 쪼개며 들으면 안 된다. 분위기 파악하기 전에는 말을 삼가야 하고... 일단 들어야 한다. 그리고 꼭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정치를 해야 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또한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숟가락을 올리려는 사람들도 많다. 덧붙여 실력이 있으면 누구도 터치 못하고 거기에 원만함이 끼면 자기만의 영토를 구축할 수 있다. 지점에서처럼 플레인 하게 내 생각을 툭툭 말하면 안 된다. 그게 다 뒤로 바늘 침이 되어 돌고 돌아 평판이 된다. 적어도 이미지가 굳어지는 몇 달간은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엄청난 업무에 치이고 있음을 공작새처럼 활짝 펼치고 있어야 한다. 이게 내가 본사 근무도 하기 전에 느낀 본사의 분위기다. 삼국지라도 읽고 가야겠다. 아, SNS는 절대 노출하면 안 된다. #포커페이스 30% 정도 줄어든 연봉과 이따금의 야근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영업 스트레스 없고 안정된 삶과 맞바꿨다. 공무원이 되어가는 것이다.


1. 한동안 업무파악에 평일 저녁과 주말을 다 쏟아라
2. 사람들에게 돈을 써라
3. 남의 일을 좀 더해줘라
4. 그러나 내가 해줬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줘라
5. 최상단의 직장상사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켜라
6. 사내 스피커이자 아나운서인 여직원들에게 돈을 써라.
7. 그렇다고 너무 에이스가 되지는 마라, 중간에서 위 정도.
8. 어차피 여의도 10년은 근무하니 이사 준비.

9. 엑셀과 영어
10. 그리고 한동안은 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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