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만든 시선

박제리 작가 기획전시_프롤로그_그 안경

by 다르샤나의 기록

이 전시는 작가 박제리의 오빠이자,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박제민의 경험에서 출발했습니다.

‘감정이 만든 시선’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는 그가 오랜 시간 품어온 감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했습니다.

그의 오랜 동반자였던 ‘그 안경’은

이번 전시의 중심 오브제로 자리합니다.





나의 안경의 이름은, ‘그 안경’입니다.

이름을 붙이며 떠올랐던 감정은,

서운함, 그리고... 미안함이었습니다.

나는 내내, 섭섭한 마음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남들이 쉽게 해내는 걸, 나는 할 수 없을 때,

그때마다 스스로를 비교하고, 작게 만들고,

내가 내 몫을 다하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났고,

어느 순간, ‘그 안경’이 바로

그 서운한 마음의 모양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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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2D.

어딘가, 고흐의 시선처럼 비틀려 있었습니다.


눈 대신, 귀로 사람을 읽곤 했는데요.

표현되지 않은 감정,

목소리 속에 묻어난 슬픔이나 떨림을 들을 때면,

나는 오히려 그 안에 푹 잠겨버리곤 했습니다.


관계는 늘 조심스러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땐,

사람들과 굳이 엮이지 않으려 했고,

무언가 작게나마 해낼 수 있을 때에만

그들과 가까워지곤 했죠.


가장 강하게 기억나는 시선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계주를 하던 날입니다.


나는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할 수 있는

‘특별한 배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배려받는 아이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구경당하는 원숭이처럼 느껴졌어요.


그 기억은, 마흔이 넘도록 나를 따라다녔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속을 게워내듯 그 감정을 꺼내야 했습니다.


결국 나는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잘하게 되었고,

칭찬도 받았지만…

그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숭이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나이.

이제는, 누군가의 시선이 아닌

나의 기쁨으로 설 수 있는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시선은, 내게 잘린 손가락 같았습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

나는 끝없이 채우고, 잘해내려 애썼지만,


이젠 그 손가락마저도,

나의 일부라 여깁니다.


남을 만족시키려 애쓰던 치열한 노력 대신,

지금은 나 스스로 좋아하는 걸 하며

게으르게 노력하는 중이에요.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어요.


눈 수술을 한 후,

오른쪽 눈이 아주 조금 보이게 되었고,

양쪽이 볼록렌즈가 된 안경을 쓰고 있었죠.


그걸 본 조카가, 이렇게 말했어요.


“멋지다.”


그 말이, 오래 남더라고요.


내 안의 감정은, 서운함이 가장 컸고,

그 밑바닥엔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있었어요.


그걸 감추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했고,

때로는 교만하거나, 우쭐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감정들을

지우려 하지 않고,

인정하며, 부드럽게 순연시키려 합니다.


‘그 안경’을 처음 썼던 건,

3~4살 때였는데,

내 손바닥 위에 다 올라오는 작은 안경이었죠.


그리고 마흔이 되어,

글자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볼록렌즈 안경을 썼습니다.


그건 새로운 시작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 된 마음으로,

삶을 다시 정비했습니다.


나에게 ‘그 안경’은,

서운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동지입니다.


세상을 더 잘 보고 싶다는 서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있어준 것에 대한 미안함.


나는 이제,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눈이 나쁜 개성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차별과 시선, 배제만 없다면,

나는 그저 키가 작은 누군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누군가,

다른 고민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존재일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그 안경’을 씁니다.


이 감정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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