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해 가는 과정
7,8년 전에 와이프가 실크스크린을 한다고 사놓은 장비가 있었다. 그 당시 실크스크린 한 개 시도해 보고 고스란히 창고행으로 갔었다. 사놓은 캔버스 천이나 감광기, 고정틀은 볼 때마다 '나 죽을 때 영정사진으로 프린트해 줘'라고 농담으로 던지곤 했었다.
와이프와 사업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그때 실크스크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거라도 프린팅을 할 수 있으니 사용해 보자고 했다. 창고에 처박아둔 장비들을 다시 꺼냈다. 실크스크린은 일반 프린터와 달리 1도 인쇄가 기본이다. 물론 정확한 위치를 맞춘다면 여러 색상도 가능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맞추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작업의 특성상 미세한 오차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실크스크린은 티셔츠보다는 캔버스 천으로 만든 에코백이 실크스크린의 질감과 감성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에코백 샘플을 주문했다. 손에 잡히는 캔버스의 질감과 실크스크린 특유의 두께감 있는 잉크가 만나면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초기 사업 컨셉은 야심 찼다. 고객의 사진을 받아서 작가가 직접 일러스트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프린팅 해서 제공하는 것.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맞춤형 작품을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프린터 사기성으로 무너지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객의 사진을 받아서 일러스트를 그리는 작업, 그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감광기로 스크린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잉크를 스퀴지로 밀어 인쇄하는 마지막 단계까지... 전 과정을 따져보니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최소 3, 4일은 꼬박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각 고객마다 새로운 스크린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비용적으로도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결국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고객의 사진을 받아서 작업하는 것보다는 작가의 작품을 인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미 완성된 작품을 기반으로 한다면 스크린 제작도 한 번으로 끝나고, 여러 제품을 만들 수 있어 효율적이었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작품에는 스토리가 있다. 물론 생각 없이 그린 그림도 있을 수 있지만,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작가의 감정, 그리고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 모든 것이 스토리가 되고, 그 스토리 안에는 때로는 하나의 이야기가, 때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작품의 스토리에 맞는 굿즈를 제작해서 판매하기로 했다. 단순히 작품을 프린팅 한 상품이 아니라, 작품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제품을 만들어야 했다.
처음부터 제품 자체를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제조업에 대한 경험도 부족했고, 초기 투자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제품을 찾아 활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단순히 도매로 구매해서 소매로 판매하는 것은 일반 쇼핑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별점이 필요했다.
작품 컨셉에 맞는 특별한 차별화를 추가하기로 했다. 어떤 차별화를 추가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품에 달려 있었다. 각 작품의 특성과 스토리에 따라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예술 전시회의 굿즈샵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작품 프린팅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제품 자체가 작품과 완전히 동화되어야 했다. 굿즈가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했고,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지녀야 했다. 무엇보다 굿즈가 작품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되었다. 이를 위해 여러 날 동안 브레인스토밍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작품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면서도 예술을 느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초반에 구상했던 사업과 지금의 사업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프린팅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예술과 일상을 연결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었다. 오히려 지금의 사업 방향이 더 가치 있고, 방향성이 확실하게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
사업에는 철학과 가치, 그리고 명확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이것들이 없으면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포기하게 된다. 철학과 가치, 방향성은 사업의 기둥과 같다.
책으로 읽었던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경영 서적에서 수없이 읽었던 '사업의 본질', '가치 창출', '차별화 전략' 같은 개념들이 이제야 피부로 와닿는다. 이전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주어진 일만 했다면 결코 접해보지 못했을 생각들이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정해진 역할만 수행했다면, 이런 고민과 성찰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고 해도 이런 경험은 하기 어렵다. 프리랜서는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을 하지만, 사업 전체를 설계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흔히 직원들에게 사장 마인드, 대표 마인드를 가지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에 서보지 않고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마인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책으로 배우는 것, 체험학습으로 간접 경험하는 것과 실제로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하며 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매일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실패하면 그 책임도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이런 무게감은 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사업은 없다. 있다 해도 개념만 있을 뿐 실제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사업은 부딪쳐 보면서 해결해 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