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수억 명을 관찰하려다 한 명도 못 본 사람들에게

by jeromeNa

예전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할 때 일이다.

화이트보드 가득 타깃 페르소나가 적혀 있었다. 이름도 붙어 있었다. '민준, 32세, 직장인, 연 소득 4천만 원대, 점심은 혼자 먹는 편, 주로 쓰는 앱은 카카오톡과 네이버.' 팀은 몇 주를 거기에 쏟았다. 인터뷰를 했고, 설문을 돌렸고, 경쟁사를 분석했다. 슬라이드 덱은 80장이 넘었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이제 방향이 잡혔다"고 했다.


그리고 만들었다.


아무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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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 아니다. 드문 일도 아니다. 스타트업이든, 대기업 신사업팀이든, 1인 창작자든 — 이 경로는 비슷하게 반복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클수록, 결과물이 실제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역설. 처음엔 그게 방법론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더 잘해야 한다. 샘플을 더 늘려야 한다. 분석 도구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도구를 바꿔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향이 잘못된 문제를 방법으로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찾는 방식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은 밖을 향한다. 시장을 읽고, 트렌드를 추적하고, 경쟁자를 분석하고, 고객을 관찰한다. 이 모든 행위의 공통점은 하나다. '나' 바깥에서 답을 구한다는 것. 타인의 불편을 포착하고, 타인의 욕구를 예측하고, 타인이 기꺼이 돈을 낼 것을 찾으려 한다.


틀린 접근이 아니다. 다만 순서가 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는 건, 지도를 펼치기 전에 내 위치를 지우는 것과 같다. 기준점이 없으면 방향도 없다. 수억 명의 데이터를 쌓아도,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 데이터는 그냥 숫자로 남는다.




처음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꽤 오래전이다.


당시 작업 중이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인터뷰도 했고, 관련 커뮤니티도 들여다봤고, 유사한 해외 사례도 찾았다. 나름 촘촘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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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의 반 이상을 개발자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글과 창작자, 후배 양성으로 살아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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