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탄생과 가족의 변화
오늘부터 영화 ‘잠’이 슬슬 극장에서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잠은 봉준호 감독이 인정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 박스오피스에서도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영화라서 그런지 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런 모호한 부분을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제가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씀드리려고 글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제가 감독의 의도를 읽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 설명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서 읽기를 중단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긴 글을 다 읽기 지루하신 분들을 위해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짧은 요약도 준비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실 수 있으실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둘만의 사랑을 다짐해 놓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신입니다. 배신은 단순한 미움보다 더 끔찍한 애증의 감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유일한 단짝친구가 나보다 다른 친구와 더 친하게 지내는 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어떨까요? 겉으로는 별 것 아닌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소외감과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것 같습니다.
둘만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제삼자가 등장해서 둘의 관계가 셋으로 변한다면 안정감은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셋의 관계에서는 내가 소외될 수 있다는 위험, 그리고 함부로 다가갔다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부부를 생각해 봅시다. 둘 사이는 너무 단단해서 어떤 어려움도 둘만 힘을 합하면 이겨낼 수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 부부가 아기를 낳는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당연히 현실세계에서는 아이 덕분에 우리의 사랑이 더욱 단단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부부들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 다툼이 잦아집니다. 그 이유는 출산 이후 아내가 겪는 호르몬 불균형 때문이고, 아이를 돌보느라 부부 모두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갑자기 부모가 되어서 생기는 부담감과 스트레스 때문이고, 자녀가 혹시 다치지 않을까 예민해지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문제의 전부일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부부들이 출산 이후에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소한 실수일 뿐인데 아내는 이전처럼 나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안 좋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화를 냅니다. 아내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나를 아껴줘야 할 남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아이의 아빠로만 대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이 나를 아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엄마로만 대하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나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운해지기도 합니다. 둘이 아니고 셋이 ‘우리’가 되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영화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부부입니다. 남편은 다정하고 아내는 남편을 아끼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군요. 거실에는 ‘둘만 힘을 합치면 모든 일을 이겨낼 수 있다’는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은 사실 더 이상 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진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지요.
수진의 배가 불러가면서 현수는 점점 이상해집니다. 마치 다른 두 명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 명은 현실의 남편이고, 다른 한 명은 밤의 남편입니다. 현실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하며, 곧 태어날 아이까지 끔찍이 귀여워합니다. 밤의 남편은 생고기와 날생선, 날계란을 씹어먹고 폭력적이고 충동적입니다. 그런데 날 것을 먹고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이것이 마치 현수의 속마음과 본능을 나타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드(id)를 나타내는 은유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무당은 현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합니다. 귀신은 영화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의 불편하고 잘못된 부분을 투사해 우리가 완전하고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주는데 필요한 가상의 존재입니다. 아들이 자꾸 나쁜 짓을 하면 귀신에 들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은 귀신이 아니고 아들인데, 그 간단한 사실을 부모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의 귀신은 현수의 불편하고 나쁜, 그러나 본능적인 모습이 투사된 대상일 수 있습니다. 무당은 말합니다. 잠이 든 이후는 귀신이 들리기 쉬워진다고요. 현수는 렘수면행동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이 병은 꿈속의 내용을 그대로 현실로 옮겨서 행동하는 증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꿈은 역시 현실이 아니고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입니다.
수진의 임신 이후 현수의 가정은 2자 관계가 3자 관계로 변하면서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꿈속에서 현수의 본능은 두 가지를 공격합니다.
첫 번째는 가정의 강아지입니다. 강아지는 현대 세계에서는 자녀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진짜는 아닙니다. 즉, 강아지는 가짜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수가 가짜 자녀를 공격하는 것은 언젠가는 진짜 자녀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화에는 혹시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딸만 없어지면 부부는 다시 아름답고 안정적인 둘만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녀를 공격하는 것은 인륜을 무시하는 크나큰 잘못이며 우리는 자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있습니다. 감히 딸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 죄책감으로 현수는 스스로를 처벌해야 합니다. 현수는 피가 나도록 뺨을 긁아야 하고 깊은 꿈 속에서는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려 스스로를 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 현수의 본능은 딸에게 점점 화살을 돌립니다. 딸이 숨어있는 화장실의 문을 공격하기도 하고, 수진의 꿈속에서는 딸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합니다.
현수에게 씐 귀신의 이름 ‘춘기’는 영화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남녀 사이의 정욕’을 의미합니다. 자녀 없이 둘만 지내고 싶다는 현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춘기가 ‘개 짖는 소리 없이, 아이 우는 소리 없이 너랑만 지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은 현수의 속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현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원룸을 얻어서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하기도 하고, 차에서 침낭을 놓고 잠을 자기도 합니다. 마치 셋의 관계를 견디기 어려우니 차라리 내가 빠져주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짝친구가 다른 친구를 더 깊게 사귀면 나는 빠져주는 게 내가 상처받지 않는 길이고, 세 친구 중 나 빼고 둘이 연인이 되면 나는 따로 놀 사람을 구하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겠지요.
이 영화에서 주변 인물들의 가정에는 특이한 형태가 있습니다. 현수와 수진의 가정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은 두 명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수진의 원가족은 수진과 엄마로 이루어진 2인 가정이었습니다. 수진의 엄마는 수진에게 이혼을 권하면서 남편이 없어도 충분히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즉, 남편을 빼고 엄마와 자녀, 둘만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뜻이겠지요. 아래층의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머니의 가족은 아들과 자신 둘입니다. 수진에게 힘들다 싶으면 보내는 것도 맞다면서 역시 가정에서 남편을 빼고 자녀와 둘만 남는 게 편하지 않겠느냐고 권합니다. 수진의 엄마나 아래층 아주머니는 수진의 속마음이 투영된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수진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냥 남편을 보내고 딸과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현수가 관계에서 소외되게 두지 않습니다. 그 대가가 어마어마할지라도요. 하지만 둘이 같이 힘을 모으자는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현수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피날레에 이르면, 현수는 부적으로 가득 찬 방 안으로 안내됩니다. 부적은 이곳이 어쩐지 현실의 공간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상징과 무의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현수는 처음에는 집을 나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냥 여기서 빠질게.”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수진은 ‘둘이 힘을 모으면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다 ‘는 글귀가 새겨진 나무판자를 들어서 거울에 힘껏 던집니다. 판자가 바닥에 뒤집혀 떨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글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둘이 잘 지내자는 말로는 안된다는 것을 수진이 깨달은 것 같기도 합니다. 깨진 거울에 현수의 모습이 비칩니다. 실제로 깨진 것은 거울이 아니라 현수의 마음일 겁니다.
하지만 현수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현수는 판자를 집어 들어 다시 벽에 걸어둡니다. 쉽게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수진도 이판사판입니다.
냉장고에는 현수가 죽였던 강아지와 똑같은 강아지의 시체가 들어있습니다. 강아지가 죽어있는 것은 딸이 죽을 수 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진이 현수에게, 네가 하는 생각이 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지 다그치는 것 같습니다. 현수는 당황합니다. 화장실을 열어보니 더 가관입니다. 화장실에는 춘기의 딸이 묶인 채 누워있습니다. 춘기가 현수라면, 춘기의 딸은 곧 현수의 딸입니다. 수진은 강아지만 죽는 게 아니고 진짜 현수의 딸이 지금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면서 위협합니다.
현수는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빠가 딸을 죽게 할 수 있을까요?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과, 딸을 없애고 싶은 본능이 강하게 충돌합니다. 그 내면의 싸움 끝에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이 이뤄지면서 춘기는 현수를 떠나기로 합니다. 현수는 딸을 없애고 아내와 둘만 남고 싶다는 생각을 결국 포기합니다.
이 영화 전반을 볼 때, 갑작스러운 임신과 출산은 가정의 구성원들의 마음에 상당한 영향을 줍니다. 가족은 가깝고 따뜻한 사이이지만, 동시에 사랑과 미움이 쉽게 오갈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대 가족의 한쪽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은 결국 가정을 지키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비극인 것이, 결국 가정의 삼자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오랫동안 소외되는 일도 있다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영화 잠은
아기가 태어난 후
가족이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로 바뀌면서 생기는 긴장감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