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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Aug 09. 2016

할리우드발 귀신 좀비, 국내 스크린 장악

[대중문화 이야기]

*이 글은 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인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차츰 세계시장으로 발을 넓히던 소위 ‘할리우드발 귀신’ 좀비가 한국 땅에 완벽히 안착했다. 최근 빅히트작이 된 영화 ‘곡성’에 일부 등장한 데 이어 ‘부산행’에서 떼로 등장해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부산행’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대규모 좀비들과 벌이는 인간들의 사투를 다루는 등 할리우드식 좀비영화의 공식을 차용해 눈길을 끈다. 사실상 국내 상업영화 중 좀비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건 ‘부산행’이 처음이다. 클리셰를 대놓고 활용하는 데도 탄탄하게 구축시켜둔 내러티브와 캐릭터로 관객을 휘어잡고, 또 한국사회의 이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까지 잘 담아내 호평과 함께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관객수 1000만명을 넘어서며 놀라운 흥행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국내 메이저 영화시장에서도 좀비가 통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돼 번져나간 좀비 바이러스가 한반도까지 잠식하고 있다. 


'곡성'의 한 장면


국내 관객도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아 

화제작 ‘곡성’의 후반부. 시체가 깨어나 인간들을 공격하며 한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신이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킨다. 죽은 자가 깨어난다는 설정은 기존 한국영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곡성’에 등장한 ‘살아있는 시체’는 흔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좀비의 이미지와 같았다.

‘곡성’은 무속신앙과 가톨릭 등 오컬트를 전면에 부각시킨 영화다. 사실 오컬트는 장르적으로 좀비물의 특징과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오컬트는 악령과 유령 등 초자연적인 현상에 주목하며 공포심리를 자극한다. 반면, 좀비물은 대개 이미지로 시각적인 공포를 안겨준다. 단순하게는 바이러스로 인해 감염된 좀비들과 이에 맞서는 비감염자들의 치열한 싸움을 보여준다. 또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비감염자들의 심리를 부각시키며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곡성’에서는 서로 뒤엉킨 좀비와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뿐 아니라 은근한 웃음까지 끌어낸다. 나홍진 감독의 장난기가 잘 드러난 신이기도 한데, 할리우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좀비 in 오컬트’를 시도해 절묘한 화학작용을 끌어냈다. 

영화 '새벽의 저주'에 등장한 좀비들


적절한 상황에 등장한 좀비로 인해 관객들도 스릴을 즐기고 웃음까지 얻어갈 수 있었다. 전라남도 곡성군의 산골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화면에 옮겼는데도 그 안에서 뛰어노는 좀비의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더 이상 대한민국 관객이 미국발 귀신 좀비를 이질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할리우드를 넘어 일본 등 아시아권 문화 콘텐츠에도 자주 등장한데다 국내에도 독립영화와 웹툰 등에 모습을 보였던 터라 좀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상태다. 


영화 '부산행'의 주연배우 공유


‘부산행’, 상업영화 최초 좀비 소재 영화

국내 영화계에 좀비를 소재로 한 기획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국내 정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부분 사장됐다. ‘이웃집 좀비’ ‘좀비스쿨’ ‘미스터 좀비’ 등 독립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들이 종종 영화제 등을 통해 주목받곤 했지만, 충무로에서 제작된 상업영화 중에서는 좀비를 전면에 내세운 케이스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일단, 국내 영화계에 좀비가 뛰어다닐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좀비를 길러낼’ 땅을 확보하고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유통시킬 판로까지 확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내 상업영화 제작자들이 손대지 않은 영역이라 지레 겁을 먹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지금 ‘부산행’의 성과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국내 관객이 좀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이 장르의 상업적 가능성을 내다봤을 터.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개봉 준비를 할 때는 누구도 지금과 같은 대규모의 성공을 거둘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여전히 좀비물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강했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하지만 막상 ‘부산행’이 공개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개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다 보면 자칫 비주얼에 신경을 기울이다 전작의 클리셰만 가져다 쓰고 개성을 살리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부산행’은 달랐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좀비영화의 전개방식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여기에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투영해 국내 관객이 공감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할리우드산 좀비를 끌어다 한국적 색채를 입혔지만 영화의 스토리와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국내에 형성된 수요를 잘 파악해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내는 재치가 뛰어났고, 무엇보다 한국적 정서를 적절히 반영하는 솜씨가 돋보였다. 


'새벽의 저주' 중에서 


해외에서 들여온 레시피 한국적으로 바꿔 성공

피자나 스파게티 등 해외에서 들여온 음식을 만들어 팔 때도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최적의 레시피를 활용하는 쪽이 승리한다. 피자에 대한 수요층이 넓어진 지금, 그 경쟁은 더 치열하다. ‘부산행’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내에 좀비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내용물이 부실했다면 결과는 뻔한 노릇이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한국인이라면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다루니 불티나게 팔린다. 

‘부산행’이 사용한 비법 양념은 소위 ‘헬조선’의 투영이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KTX 열차의 승객들이 좀비들과 맞서는 과정을 그린다. 평화롭던 열차 안에서 갑작스레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고 이때부터 비감염자들은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무엇보다 국가가 발칵 뒤집힌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라’는 말만 이어가는 정부,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너무도 태연하게 타인을 희생시키는 이들을 보여주며 현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연출자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연상호 감독의 상상력이 빛을 발해 가장 최근의 좀비영화에서 한층 더 진화된 비주얼의 액션신을 선보인다. 좀비영화의 마니아들까지 열광하게 만들 장면으로 ‘아직 좀비를 통해 보여줄 게 남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부산행’의 성공으로 향후에도 국내에 좀비영화가 만들어질 확률이 커졌다. 다만, 워낙에 익숙해진 소재인 만큼 ‘부산행’처럼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흥행은 보장될 수 없다. 


충격적인 비주얼로 화제가 됐던 영화 '월드워 Z'의 한 장면


좀비가 영화에 등장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성공하면서부터다. 그보다 이전에 등장한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는 지금의 형태와 달랐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를 시작으로 목숨이 끊어진 채 공격성과 식욕 등 본능만 가지고 움직이는 좀비가 수없이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다. 이 당시만 해도 좀비는 공격성이 뚜렷하면서도 움직임은 둔하고 느렸다. 이후 대니 보일이 ‘28일 후’(2002)에서 뛰어다니는 좀비를 등장시키면서 충격을 안겨줬다. 

'새벽의 저주'에서 비감염자들이 타고 있는 차를 에워싼 좀비 떼


이 시기를 계기로 좀비는 넘치는 공격성에 스피드까지 갖춘 모습으로 진화했고 이후로 ‘새벽의 저주’(2004)를 비롯해 거의 모든 영화에서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전설이다’(2007)와 ‘웜 바디스’(2013)에는 자의식을 가진 좀비가 등장했다. 좀비는 바이러스를 통해, 때로는 실험실에서, 또는 주술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해진 규칙 없이 창작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지금의 형태로 진화했다. 어쨌든 이 흔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좀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보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 케이스다. 한국에 정착한 좀비를 이용해 ‘부산행’의 뒤를 이으려면 새로운 좀비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머리 꽤나 굴려야 할 것 같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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