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이 속속 까발려지고 있는 한심한 시국, 마침 이 시기에 적합한 이슈를 반영한 대중문화 콘텐츠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원자력발전소 폭파 사고 이후 펼쳐진 대혼란기와 헛발질만 하는 무능력한 정부를 그린 재난영화 ‘판도라’가 그 첫 번째 작품이다. 명문 고등학교 학생 사망사건 이후 진실을 숨기려는 어른들과 이를 파헤치려는 아이들의 대립을 다룬 드라마 ‘솔로몬의 위증’도 현 시국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이달 7일 ‘판도라’가 극장에서 먼저 관객을 만나고, 이어 ‘솔로몬의 위증’도 9일 첫 방송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판도라’의 극 중 뉴스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방송사 로고 중 하나가 JTBC라는 점. 게다가 ‘솔로몬의 위증’을 내보내는 방송사 역시 JTBC다. 두 편의 콘텐츠에 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알리고 현 정부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데 앞장선 언론사 JTBC의 이미지가 오버랩돼 묘하게 현실감을 살려준다. 우연히 방영 및 상영 시기가 겹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쨌든 두 작품 모두 적절한 시기에 세상에 나와 이목을 집중시킨다. 다만, 두 작품의 관계자들은 역대 최악의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막장 리얼리티 쇼’의 재미를 따라갈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이 크다. 최순실 게이트와 청와대를 흥행 라이벌로 담담히 받아들인 채 대중과의 만남을 준비 중이다.
‘판도라’가 다룬 무능한 정부, 현실과 같아
지난달 29일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영화 ‘판도라’는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인한 국가적 재난사태를 다뤘다. 배경이 되는 장소는 원자력발전소가 세워진 어촌 마을이다. 발전소 설립 후 40여 년이 지난 시점, 마을 주민들은 일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도 노후한 1호 원전의 관리 문제로 불안해한다. 발전소 내에서도 오래된 1호 원전의 관리 상태가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무능한 간부는 이 내용이 정부 고위층에 알려지지 않도록 은폐하려 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발생한 지진으로 1호 원전이 폭발하고 방사능이 유출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비전문 어용 간부 배치, 안전대책을 세우기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 위주의 업무 지시, 사고 발생 이후에도 조용히 무마하려고 애를 쓰는 공무원들과 청와대 관계자들, 눈과 귀가 틀어 막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대통령, 힘없는 정부를 뒤로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국민들. 이 모든 상황들이 한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데 묘하게 현 시국과 겹쳐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국민의 안전을 챙기기보다 사건이 알려졌을 때 발생할 국가적 손실을 고려하는, 이기적이고 한심한 정부의 모습이 묘사될 때 특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정도 설명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판도라’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기존 재난영화의 클리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신파적 요소까지 활용해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지금과 같은 시국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몰입하지 못하고 이 영화의 만듦새와 선동적인 연출을 두고 비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개봉 시기를 잘 만난 것 역시 이 영화의 운이다.
하지만 '판도라'는 분명 칭찬할만한 요소가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단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원전사고를 소재로 택해 새로운 그림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세계 최대 원전 밀집 지역을 만들어놓고도 상대적으로 안전 문제를 등한시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특히 사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시뮬레이션화한 듯 설득력 있게 묘사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목적의식 뚜렷한 재난영화
현실에서 월성원전을 끼고 있는 경주 지역에 지속적으로 지진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이 심화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판도라’는 기존 재난영화의 흥행법칙을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가상’이 아닌 ‘실제’의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지구 멸망의 과정을 보여준 ‘2012’나 ‘투모로우’가 마니아층을 끌어들이며 뛰어난 CG 기술과 완성도로 호평을 끌어내던 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말이다. ‘판도라’가 보여주는 재난 사태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펼쳐질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영화는 상영 시작 후 20여 분 뒤 사고가 발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뒤로 발생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인다. 사고 이후로는 웃음기를 싹 거둔 채 ‘이 사태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잘 알아둬라’며 경고하는 듯 진지하게 사태 수습 과정을 다룬다. 방사능 수치가 치솟는 원전 내부, 피폭돼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2차 폭발을 막으려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그들이 가족을 위해 희생을 택하는 사이 대통령은 총리를 비롯한 참모진들에게 농락당해 눈과 귀가 틀어 막힌 상태에서 우왕좌왕한다. 총리는 국가가 전복될 수 있는 위기상황을 눈앞에 두고도 언론을 통제하고 해외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극 중 대통령 역을 맡은 김명민은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국민들의 힘을 빌리려 한다. 이에 주인공 강재혁 역의 김남길은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국가를 위해 내가 왜 나서야 하냐”며 격하게 반응한다. 억울한 건 결국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판도라’는 지극히 비판적인 내용을 다뤘다는 이유로 우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지난해 7월 촬영을 마치고 올해 여름 블록버스터로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개봉이 연기돼 한동안 표류했다. 그 사이에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판도라’의 개봉 자체가 미지수란 말이 나왔다. 극장 측에서 ‘판도라’를 내걸 수 없는 상황이라 상태가 지속됐을 경우 상영 자체가 묘연해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영화진흥위원회 측이 위탁한 민간투자운용사의 모태펀드를 투자받으려 했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투자가 철회돼 애를 먹기도 했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인 NEW가 ‘변호인’을 내놓은 뒤 세무조사를 받는 등 불이익을 당했던 터라 또다시 외압에 시달리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분분했다. ‘판도라’의 박정우 감독은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외압설에 대해 “아니다”고 일축했지만 이 정도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영화라면 충분히 현 정부에서 압력을 가했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분명 ‘판도라’는 흔한 재난영화의 틀을 가져오면서도 국내 원전 관리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정부의 안전 불감증을 지적하는 등 명확한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영화 말미에도 우리나라를 원전 밀집도 1위 국가라고 다시 한 번 알려준다. 다분히 선동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에 대항한 아이들
‘솔로몬의 위증’은 일본의 스타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화했다. 명문 정국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고, 학교 측과 경찰은 빠르게 속도를 내 자살로 규정하고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이란 의문이 제기된다. 이어 재판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이를 중심으로 학생들은 어른들이 감추려 했던 진실에 조금씩 다가선다.
이 드라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만히 있으라”고 막아서는 어른들과 능동적으로 추악한 어른들의 잘못을 캐내려 움직이는 아이들의 대립이다. 세월호 사건, 그리고 부정부패와 비리로 점철된 대한민국 땅의 현실과 오버랩돼 이목을 집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건 극 중에서도 숨기려는 자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밝히고 문제적 인물을 처벌한다고 해도 당한 이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안타깝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