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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Jan 21. 2017

수학자의 아침


수학자의 아침/김소연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체는 종종 혼자 걷는다. 혼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걷는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다 맞는다. 그러면서 체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가능한 조용히 혼자 죽어야지. 체는 생각한다. 지구상에 내가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지. 아무에게도 들통나지 않아야지. 그렇게 죽어야지. 부숴지기 쉬운 생각을 바스락 바스락 밟으며.

  나는 때때로 체와 함께 걷는다. 다분히 성큼성큼 오랜 시간 함께 걷는다. 그러면서 나는 때때로 체를 생각한다. 너는 이미 나와 함께 걷고 있다고, 그러니 가능한 조용히 죽겠다는 너의 생각에 나는 변수라고. 체가 들으면 그닥 유쾌해하지 않을 법한 생각을 한다. 나는 체와 함께 걸으며 조용히 죽기 위해 오래 걷는 체의 발등을 내려다본다. 그 발등은 무엇에 자꾸만 밟히는지 보려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모든 사람은 자기 몸에 적당히 맞는 죽음을 입는다고 했다.(정확한 인용이 아니니 [말테의 수기]를 읽어볼 것) 품이 널널하든 답답하든 대충 팔이 들어가고 대충 단추가 잠기면 죽음을 입는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에 맞춘 죽음을 입겠지만.

  체가 혼자 걸을 때마다 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생각했고, 품이 너른 조끼와 품이 답답한 조끼 두 벌을 번갈아 떠올렸고, 그리고 단추를 여미는 나를 상상했다. 조끼를 입지 않은 맨살을 그리기 어려웠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무언가 입을 게 필요했다. 어쩌면 인간에겐 언제나 조끼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고. 그러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 조용히 죽겠다는 체에게 그래 네가 죽는 그 순간 나는 뒤돌아 서 있을게. 라고 했어야 했을까.

  친구 관계에서든 연애 관계에서든 맨살을 드러내는 행동은 위험하다. 한 가지 얼굴만 한평생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서는 마른 세수도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얼굴만 한평생 사용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릴케가 한 말이다. 책을 반드시 읽어볼 것)

  

  얼굴을 뒤집어 쓸 필요가 없을 때. 혼자 걸을 때. 오래 공들여 걸을 때. 체의 텅텅 빈 얼굴 자리를 만져보고 싶은 날들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자다가도 문득 깨어 그 자리를 향해 팔을 뻗게 되는 날들. 고개 돌리지 않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만한 말이 내게 없어서 감정이 고이지 못하는 날들. 그냥 씻겨 내려가버리는 날들. 비가 오는 것 같은 날들.

  나는 오늘 행복했구나 싶은 날이 있다. 나는 오늘 잔인했구나 싶은 날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들의 끝에 나는 혼자 걷고 있을 체를 생각한다. 내가 행복한만큼 잔인했던 날의 끝. 어디선가 체는 얼굴 없이 조끼 없이 죽을 맘을 먹는다. 그 헤아려지지 않는 어디께를 헤아리려다 보면 나는 나의 얼굴자리가 무섭다. 조끼 없는 맨살이 무섭고. 그리고 혼자 걷게 될 내 발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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