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비우네의 두 번째 차모임: 비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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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화가 나면 다리미 코드를 꼽았다. 다리미 예열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또 불 켜는 거 깜빡했다. 깜깜하고 무서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빨리 뭐라도 깨지는 소리가 들리길 기도했다. 무언가가 깨지면 그래도 곧 소란이 멎는다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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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익은 대게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 엄마가 운영하던 컴퓨터 공부방이 끝나고 늦은 밤이 되면 아빠와 학원에서 대게를 쪄 먹곤 했거든. 아빠는 다리 살을 발라서 내 앞에 놔주고 소주와 함께 대게를 먹었어. 아빠가 퇴근하는 새벽 두시에서 세시쯤, 나는 너무 졸려서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면서 아빠를, 아니면 대게를, 아니면 계란말이 김밥을 기다리곤 했어.
아빠는 왜 집에서 안 자고 학원에서 잘까. 엄마와 아빠가 소리를 죽이고 싸울 땐 왜 그러는 걸까. 엄마는 왜 아빠를 못살게 굴까. 아빠는 왜 자꾸만 도망치려고만 할까. 이런 것들을 제대로 물어볼 수도 없었고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도 없어서 나는 종종 옷장 안에 들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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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애인이 생겼을 때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함께 자는 것'이었다. 너무 자주 자다가 깼다. 깨서 옆을 보고 여전히 무서운 건지 안심이 된 건지 모를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짝꿍을 흔들어 깨우곤 했다. 어느 날 짝꿍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랑 결혼하고 싶어,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나는 내 둥지를 갖고 싶어. 입을 크게 벌리고 짹짹거리는 아기 새를 위해 밤낮없이 날아다녀도 행복할 것 같아.
그제서야 알았다. 엄마의 엄마가,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왜 그렇게 불행했는지. 아빠가, 아빠의 아빠가, 그리고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왜 그렇게 답답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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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할 때 거기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국가가 인정한 가족의 형태를 만들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아래와 같은 의무를 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죽는 그날까지 제공해야 합니다.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가정 내에서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신혼부부대출이 소액 가능합니다.
-많은 노동과 적은 임금으로 두 사람이 불행해지더라도 그것은 가부장제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가정 내의 사사로운 문제이므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해내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한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녀에게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 두 사람은 더더욱 불행해지더라도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자녀의 행복과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이란 바로 '정상적'이라고 이야기되는 이상적인 이미지, 즉 관념입니다. 결국 자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할 미래의 역군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부모의 자긍심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자식에게 '양심'과 '죄책감'을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습니다.
위 사항에 동의하고 최선을 다해 복역하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썩은 울타리, 파손 주의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가족의 형태에 관하여서는 알 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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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을 선언하는 것은 가족의 일이라고 치워졌던 문제들을 의심해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혼 선언 이후에는 그간 가족 안에서 만들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관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열린다. 비혼을 다짐했던 내가, 그리고 독신으로 독거하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비우네에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처럼.
비혼식을 준비하는 그링은 '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비혼 선언을 했다고 한다. 정민은 지속 가능한 관계에 전제되는 것은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줄 수 있고 그랬을 때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성소는 비혼 선언이라는 것이 중간 지점을 건너뛰고 너무 급진적으로 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가 국가가 요구하는 가족의 기능, 결혼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 나눔으로서 결혼 상태와 비혼 상태 사이의 어떤 공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상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서 관계에 대해서, 육아(육묘)에 대해서, 노후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연우 씨는 집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연애나 결혼,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느꼈던 답답함이 차 모임을 통해 해소되었고,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여론이 만들어지고 정책 요구로까지 가면 좋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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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숨어 있을 때, 옷장으로 들어가곤 할 때, 나를 좋아하는 짝꿍의 마음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게 될 때마다 나는 내가 가진 어떤 얼굴을 악착같이 숨기려고 했다. 살갗에 들러붙어 아무리 애써도 떨쳐지지 않는 어떤 얼굴을. 비우네에 들어와서도 그 얼굴은 절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한 꺼풀 가면은 쓰고 있어야지.
그링의, 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를 한 번 만졌다는 생각. 정민의, 밑바닥을 보이더라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를 두 번 만졌다는 생각. 아 정말 비우네에 살아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