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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Dec 28. 2018

몇몇 국내 웹툰 작가들에 대한 메모

반바지, 수신지, 란탄, 류경호

반바지는 현재 활동 중인 국내 만화가들 중 '만화'의 속성을 (SF 장치를 끌어들여서) 가장 직접적, 과시적으로 드러내는데, 사실 이게 그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과감함이 부족하달까, 난해할 정도로 난삽한 연출 방식을 쓰면서도 '논리적'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해 결국 지나치게 만화를 안정적으로, 곧 도식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아무리 나아가려고 애써도 결국 "놀랍게도 '만화'란 이런 걸 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고 마는, 자율성의 (복잡해보이지만 실은) 간단한 실제 적용 사례에 머물고 만다. 그 때 '만화'로서의 작품은 스스로의 길을 둘러보지 못하고 그저 요란스런 침묵으로 빠져들 뿐이다. 좀 더 짖굿게 말하자면,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만' 열심히 읽은 티가 나는 게 그의 한계다. 그래서 만화 이론 강의에서 교재로 쓸 만 하겠지만. 

반면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만화를 만드는 것같은 수신지는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동시대적인 단순함을 펼쳐보인다. 이전부터 소소하게, 허나 끈기있게 흥미로운 작업을 내놓긴 했지만 <며느라기>는 당대의 이야기 방식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을 은근히 파헤친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모두 넘어설 정도로 빼어나다. 물론 앞의 문장은 다분히 중의적인 픽션이다. 하나,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같은 SNS 시대에 만화로 이야기를 한다는 건 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전의 만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저 SNS들이 사진첩 속의 (그 사이에 동영상을 넣을 수도 있는) 사진첩, 슬라이드같은 방식으로 이미지를 나열할 수 있게 했다는 것과, 그러면서 인쇄 만화들이 갈수록 페이지라는 단위를 자율적 -물론 여기서의 '자율적'이란 좀 엄격하게 쓰여야 한다- 으로 쓰고 확장하는 반면 웹툰들은 다른 이미지 경험의 방식을 차용해 그 단위를 축소하고 단순화하며 칸의 일회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지를 치고 있다는 게 떠오른다. (인스타그램이 “기본적인 정체성을 세분화하고 개인화하는데 중요한 매커니즘을 제공한다”는 레프 마노비치의 말) <며느라기>에서 서로 엄격히 단절된 레이어들은 서로에 대한 간격 속에서, 프레임으로 세계를 뭉텅 쳐낸다는 것의 긴장을 보다 강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신지는 자신을 앞세우는 대신 min4rin이라는 아이디를 쓰고 민사린이 실제로 작성한 듯한 포스트를 SNS 계정에 올려 작품 자체를 일상 SNS의 데이터로 (승화가 아니라) '환산'함으로서 그 계정 자체를 하나의 픽션으로 물들인다. 민사린이 <며느라기>의 주인공이라는 뻔한 사실을 좀 더 복잡한 사태로 받아들일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며느라기>는 현재의 'plat-form'을 논하기 위한 주요 사례가 된다. 다른 하나. 여성에게 '며느라기'를 전가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가? 그 필연성은 대체 무엇인가? 책임자가 있긴 한가? '고부갈등'이나 '명예남성' 심지어는 (물리적인?) 시스템에 대한 접근으로도 쉬이 잡히지 않는 이 내면화된 억압을, 수신지는 여러 층위에서의 '기괴한' 시차,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끊임없이 뒤섞이고 정체하며 심지어는 한 칸 안에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다시) 흘러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는 시차 안에서 세심하게 잡아내려 노력한다. 그러니 <며느라기>를 그저 '공감툰'으로만 일축하는 관점은 크게 틀린 것이다. "고구마"라는 말로는 여기에 넘쳐흐르는 불안과 폭력을 직시할 수 없다. 두 갈래로 나뉜 이 픽션은 간격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 점으로 모인다. 

얼마 전 페미니즘 웹진 핀치에 첫 정기 연재 웹툰 <화의 방향>을 발표(했으며 1부 완결을 눈 앞에 두기도)한 란탄은, 최근 정체성 정치의 '미적' 동향에 있어 국내의 (어쩌면 해외에서 놓고 봐도) 그 흐름 안에서 그것을 초과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만화가 갖는 차별성이란 (최소한 <화의 방향> 이전까지의) 사각형에 대한 집착이 '여러가지' 두 개의 컨벤션(예컨대 4컷 만화의 프레임과 인쇄 만화'적'인 넓은 프레임, 색과 색, 그리고 가치관과 정체성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놓아 분리/교차하면서 이야기를 (가령 액자 구조처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전적으로 보조하거나 한 쪽 안으로 집중시키는 게 아니라 두 컨벤션'들'의 이질적인 상호작용으로 형성한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그에게 칸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단위(<꿈의 상자>)일 뿐만 아니라 인물을 짖누르기도 하고(<달밤에 24>) 무의미한 범람으로 그 속에서 인물을 고립시키기도 하며(<화의 방향>) 물리적인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실제의 감각을 실재의 감각으로 전환하기? 물론 란탄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 물리적인 힘 때문에, 이 상호작용이란 컨벤션의 분리/교차처럼 종종 대립이기도 하고 보충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키워드의 중첩만이 있을 뿐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예 칸을 덮어버리기도 하는 모순으로 향한다. 그렇게, 이들은 같은 상황을 상이한 국면으로 지시하며 그로 인한 충돌 속에서 상호작용-즉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란탄은 '프레임으로서의 만화'에서 서로 관계할 수 있는 -심지어는 (영화 이론의 말을 빌리자면) 외화면에 있'을' '우리'까지도- 가능한 많은 요소들을 관계지으려 하면서 하나의 사건의 '필연성'이란 반드시 여러 국면의 (역설적인) 엮임 속에서만 가능함을 증명하는 데 주력하며, 이는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로 이어진다. 고로 그의 작품 내부에서 종종 제기되는 질문인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으리라.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류경호는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내 생각에 그의 첫 작품집인 <구간반복>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9컷이라는 자의적 제한 안에서 추상'적'인 형식을 통해 구상적 조형을 운동시켜 만화의 칸을 문제시하는 구성 방식'만'이 아니라 -그것 뿐이라면 굳이 그에게 주목할 필요가 없었을게다- , 얼굴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을 끌어들임에도 불구, 작품 속 조형들에 굳이 얼굴을 부여하는 고집이다. 그것도 저 조형에 붙어있는 것이 눈과 입을 지시한다는 것만을 겨우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표정다운 표정이라곤 없는, 때론 고속의 운동으로 인해 늘어지기도 하는 등 일말의 인격성이나 의미작용조차 철저히 배제한 얼굴. 말하자면 (들뢰즈와 오몽을 떠올리며 말하자면) 소진된 얼굴. 혹은 (애너그램으로) 얼룩. 이전에 나는 모 지면에서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의 (오타쿠들이 '죽은 눈'이라고 부르곤 하는) 피로한 얼굴을 필두로 하여 국내 웹툰에서의 '깊이 없는 얼굴'들의 등장에 주목해, ([사회학적 파상력]의 김홍중처럼?) 헬조선이니 사토리니 하는 청춘 담론들을 배제한 채 그러한 성좌를 탐색하려는 글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서 특이한 동시에 중요한 사례로 류경호의 작품을 꼽아 논하려했는데, 그 글은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도중에 좌절되고 말았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 류경호(의 얼굴)에 대해 쓰려는 욕망을 버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논할 기회가 다시 생기길 바라며,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 위에 언급한 웹툰 작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SNS에서 주로 작업을 발표해 거기서 곧장 단행본 출간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은 거대 웹툰 플랫폼이나 관청 주도의 지원, 혹은 (케장콘처럼) 특정 커뮤니티같은 '제도권' 바깥에서 작업했으며 그 속에서 예외적인 작업으로 예외적인 성과를 얻었다. 여기서 이런 의심이 불쑥 떠오른다. 어쩌면 제도권 바깥에서 활동했기에 이런 예외적인 성과를 볼 수 있던 게 아닐까? 국산 웹툰이 점점 더 중요한 매체로 대두되고 제도권 깊숙이로 들어오는 지금의 양상은 곧 웹툰의 전반적 표준화, 아니 '평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반적인 웹툰들의 스타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들의 스타일 -여기에 ooo을 함께 논할 수 있다- 이 플랫폼의 차이에서(도) 발생하리라는 생각이 너무 나간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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