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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an 02. 2019

2018년을 마치며 : 순정을 순정하기

2018년에 제게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여파를 남긴 건, 아무래도 <카드캡터 체리> -새 더빙판을 봤으니 "사쿠라"라고 말하긴 좀 그렇습니다- 의 마지막화를 마침내 본 경험입니다. 물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마지막화를 보는 걸 거의 20년 가까이, 때로는 실수로 또 때로는 일부러 미뤄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미뤘다 정도로는 안 될 것 같군요. 그로부터 도피해왔다는 게 훨씬 정확할 겁니다. 클램프가 뭔지 알기도 전, TV로만 애니메이션을 접하던 때의 저는 <체리>를 당대의 그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아꼈고, <체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게 문제였지요. 그렇게, 차마 <체리>의 완결을 직시할 수 없었던 저는 아예 마지막화를 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던 겁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체리> 마지막화를 보려고 할 때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이런 의지는 어쩌어찌 유지되었지요.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죠. 순정이라고.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말입니다.


그런 순정을 약 20년만에, 드디어 깨트린 것이니, 이 일이 제게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아셨겠지요. 하여튼 그렇기에 저는 투니버스가 <클리어카드>편 방영 이전에 이벤트로 <카드캡터 체리>를 전부 새로 더빙하겠다고 밝혔을 때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체리>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큼은 못하다 해도, 제 유년기를 짙게 물들인 아니메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제 순정의 대상이기 때문이었죠. 새로 더빙된 <체리>를 거의 새로 나온 아니메를 대하듯 매일같이 챙겨보며, 순정이라는 이름으로 봉인해놓은 시간이 점차 흐르는 것을 매순간 체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체리>의 마지막화를 보는 날이 왔습니다. 늘 그렇듯 애인네 집에서 애인과 함께 봤지요. 마지막화가 어떤 내용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꿰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의 마지막이 다가올 수록 가슴이 더욱 더 두근거렸습니다만, 이게 정말 중요한 사태인데, 정작 <체리>가 끝나고 나선 그 순정에 걸맞는 어떤 감정도 제게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이걸 마주하고 말았다는 데서 야기될 흥분 혹은 공허함이 전혀 없었단 겁니다. 저 스스로도 스스로의 무덤덤함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지요. 20년 가까이 미뤄온 마주침은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그렇게 휘발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리고 한참 뒤에 저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시간이 흐르고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추억에 의존한 채 지금 무언가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거지요. 하지만 그건 저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 경험을 말하며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그 경험을 지금의 자신과 접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달리 말해 추억 뿐인 추억. 물론 순수를 잃어버렸다는 등의 헛소리는 조금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변화가 어떤 경험의 강도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완전히 전환시킬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순정에 대한 순정만큼 그 전환의 가능성에 쉬이 휩쓸리는 것도 없다는 걸 너무 뒤늦게 확인한 거지요. 순정이라는 고집이 그 경험의 강도, 어쩌면 어느 시절의 내가 마주하고 간직할 수 있었을 소중함을 억지로 짓눌러버린 게 아닌가 하는 크나큰 후회를 남기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한 해를 망연함으로 기억한다고 결론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망연함은 제게 다른 길을 열어줬습니다. 추억에 기댈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할까요? 2018년은 제게 이 질문을 붙잡고 뒹군 해였습니다. 당연하지만, 그 뒹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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