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사와 키요시, 스와 노부히로, 만다 쿠니토시. 이들은 '일본 영화적'이길 거부함으로서 현대 일본 영화에의 탁월한 예외가 된 중견 감독들이란 점에서도 함께 거론될 만 하지만, 끈질기게 사랑이라는 '문제'를 진정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함께 논하고 비교할 수 있다. 사랑을 세계 안에서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거칠게) 정의할 때, 이들은 그 운동의 본질적인 불가능성, 즉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하여 각기 다른 관점으로 꾸준히 골몰하는 것이다.
쿠로사와 키요시와 만다 쿠니토시는 사랑이 근본적으로 폭력이라는 전제에서 함께 출발한다. 사랑이 폭력이라니? 사랑은 거래가 아닌 거래, 위계가 없는 (척 하는) 위계, 하나가 아닌-될 수 없는 하나라는 점에서 나름의, 혹은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다. 이 두 작가는 관계 구도의 영역에서 이 폭력성을 보다 과시적으로 만들어 '(사랑이란 이런 건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전개하는 것이다. 키요시의 부부들이 언제나 한 쪽의 '비정상성'에 의해 고통받고 만다의 연인들이 항상 하나가 되려다 파국을 맞는 건 -만다는 매 작품마다 파국의 도식의 구체적인 항들을 바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는 사고실험 사례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 전제에 따른 흐름이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출발하는 두 작가는 마주칠 듯 하면서도 결정적으로는 크게 갈라서는데, 왜냐하면 키요시가 그러니까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음울하게) 결론을 내리는 반면 만다는 그게 사랑이라고 (냉혹하게)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짝패라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면에 가까운. 한 편 스와 노부히로는 사랑이 있다면 그건 '너'와 '나' 사이의 '와', 즉 둘을 (매듭짓는 게 아니라) 매개하는 모종의 간격 안에서만 겨우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 간격을 '영화 만들기'에 관여된 수 많은 간격들(카메라/붐마이크와 대상, 숏과 숏 그리고 외화면 등)에 연결해 자신의 창작의 중핵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 숏은 인물=프레임이 서로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론적 장소가 된다.
당신께선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자나 깨나>에 대해 쓴다면서 왜 다른 감독들에 대해 주저리주저리하고 있나?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마구치는 (그 말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이들 이후의 사랑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의 기준은 두말할 것 없이 3.11 대지진이다. 나는 작년에 하마구치의 전작 <해피 아워>에 대해 쓴 글(여러 세부 묘사가 틀린데다, 지금은 생각이 바뀐 지점도 있다)의 말미에 그가 "직접 토호쿠로 건너가 3.11 이후를 버티는 개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우리 눈 앞의 모든 것이 붕괴 전야에 처해있음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위해 "파국의 반동을 긍정해 본래의 개별성을 지킨 상태로 관계에 임하는 것"으로서의 새로운 "연대의 양식"을 고심한다고 쓴 바 있다. <자나 깨나>를 보고 나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여기서의 "연대의 양식"을 '사랑의 양식'으로 바꿔 말하고 싶어진다. 요컨대 하마구치는 파국 없인 사랑도 없다고 믿는다. 당연하지만 이는 '세상살이 풍파를 겪어야 아는 거지...' 따위의 식상한 성장론이 아니며, 지진 직후 료헤이를 향한 아사코의 걸음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여기서의 파국이란 가능한 모든 전제와 규칙 -사회적인 것은 물론 시선과 '지속'같은 영화의 그것들까지- 들을 뒤흔들면서 그것들이 완전히 정합적이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실은 불합리하며 나아가 폭력적임을 폭로하는, 그럼으로서 전제와 규칙의 조각들 위에 삶을 재건할 욕망을 야기하는 (레너드 코헨이 Anthem의 코러스에서 우아하게 읊조린) '빛이 들어오는 틈새'인 게다(물론 아즈마 히로키같은 이는 정반대로 반동적이기 짝이 없는 [일반의지 2.0]을 구상하기도 했다만...). 재난 이후의 '재건'을 관계 이후의 '재건'에 기입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파국의 반동"을 반복적으로 끌어들이는 하마구치는, 그 집요한 반복 속에서, 파국에 치달은 관계를 이전 상태처럼 회복해 서로를 자신 안으로 끌어당기지도(보다 정확히,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한다), 아예 깨버리고서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고서 이전과는 달리 그 파국을 힘껏 껴안은 상태로서의 사랑, 불확정적이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 거의 미스테리하기까지 한 그 상태로 영화를 향하게 한다. 그것만이 현재에 가능한 사랑의 양식이라는 듯. 이 때 이 사랑은 과연 '연대'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을까? 그러니까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업은 키요시, 만다, 스와가 천착한 사랑의 불가능성을 3.11이라는 어마어마한 재난, 어마어마한 파국 이후의 자리에서 재정위해, 그 불가능성에 걸맞는 사랑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러니 화면에 가득 찬 바다의 능선에 평행하게 걸어가며 프레임 아웃하는 아사코의 '포토제니'에서 결말을 내지 않는 것으로도 <자나 깨나>는 대단하다. '이제 그는 사랑 없이도 살아가리라'가 나쁜 건 아니지만 -오히려 여기서 급진적인 선택을 엿볼 수도 있음을 열어두고 싶다- 동시에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멋지고 간단한' 결론이 되기도 쉽다. 혹자는 이를 가부장제 안으로의 투항이라 말하지만, 만약 이것이 정말로 투항이라면 (료헤이의 말에 따르자면) "신뢰"를 져버린 아사코는 외려 혼자가 되길 선택하지 않았을까? 센다이의 노인이 (쓸데없이!) 첨언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건 저 순간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료헤이가 있는 오사카로 돌아가는 아사코가 아니던가? 저 텅 빈 바다를 마주하고서 출렁거리는 바닷소리가 자신의 숏에 침투하도록 한 후의 아사코의 결단은, 바쿠의 예기치않은 침투에 무방비한 이전의 '봉합'의 실패를 인정하고서 그 이후에도 정말 사랑이 가능할 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 지를 확인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이 윤리적 태도가 다른 누가 아닌, 바쿠와 유사하게 감당할 수 없는 타자가 된 아사코의 몫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이 영화에서 인물의 동선의 완수가 얼마나 중단되고 좌절되기 쉬운 것인지 잘 봐온(한 번도 어딘가에 '도착'한 적 없는 아사코, 전철역을 향하는 사람들에 고성을 지르며 저지하는 남자, 오사카로 향하는 료헤이를 쫓아가다 넘어지는 마야) 나는, 숙명적인 간극에도 불구, 오사카를 향하고 료헤이를 있는 힘껏 쫓으며 동선의 완수를 추구하는 아사코의 몸짓들을 그렇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되돌아간다는 행위의 윤리. 허나 앞서 말했듯, 이 동선의 완수는 용서나 사죄를 통해 이전같은 봉합을 꾀하려는 몸짓이 아니다. 마지막에 마주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이를 웅변한다. 신뢰를 상실하고 불안을 잔뜩 머금은 이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도, 같은 강을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지도 않으며 (파국 이후라는) 숙명적인 간극을 체화한다. 이 관계에 있어 봉합다운 봉합이 없으리란 건 그들도 우리도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아름다워"라는 아사코의 말이 일러주듯, 두 사람은 그 거리감 속에서 계속 사랑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계속할 사랑이란 더 이상 보편적인 사랑엔 붙잡히지 않는 사랑, 하지만 불안으로 출렁거리는 현재에 가능할 급진화된 방식의 사랑이리라. 다시 한 번, "'그럼에도' 되돌아간다는 행위의 윤리." 그래, 우리는 사랑하기에, 이제 불안해도 사랑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