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부정으로 시작하자. 스티븐 스필버그의 근작 <더 포스트>는 세간에서 말하는 여성 임파워링 영화도, 고전적으로 '품격있는' 내러티브의 영화도 아니다. 적어도 그것을 핵심적 목표로 두어 스스로를 거기에 위치시키려 하고 있지 않다. 만약 당신이 이 두 가지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다면 당신은 실망할 터이며, 혹여라도 그 기대가 충족되었다면 당신은 <더 포스트>를 오독한 것이다. 물론 이런 류의 감상으로 당신을 유혹할 만한 숏이나 씬이 여럿 있긴 하나, "이런 류의 감상"은 영화의 요소들을 (극의 맥락 안에 위치시켜 바라보는 단계를 지나치고) 성급하게 전체로 등치시켜버리는 경박한 반영론적 태도에 불과하다. 애초에 백인 부르주아 여성의 반'체제' -그것이 정부든 남성중심의 업계든- 적 성취만이 있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자극적이지 않은 극적 상황만이 있다면 대체 그 영화를 무엇으로 긍정하고 지지할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임파워링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경우 영화는 리버럴적인 논리를 답습하는, 지독하게 반동적인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우리 앞에는 재능에의 인정 욕구로 귀결되는 <히든 피겨스>의 나이브함이나, 젠더 역전의 도식 만으로 진보를 이루었다 자만하는 <미스 슬로운>의 냉소주의가 있지 않은가. 자본이 소수자의 저항마저 '개성적인' 재생산의 기제로 끌어들이며 약동하고 있는 것에 우리는 보다 민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더 포스트>가 "여성 임파워링 영화도, 고전적으로 '품격있는' 내러티브의 영화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더 포스트>는 무엇을 하려는 영화인가?
남성 이사들의 얼굴과 말로 가득 찬 이사회에서 자신에 초점을 온전히 맞추지 못하고 (카메라의 초점은 자꾸만 케이의 얼굴을 빗겨나간다) 준비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로 (말을 꺼내는 데 실패하자 그녀는 안경을 벗어버리며 읽기 자체를 포기한다) 잔뜩 "깨진" 케이는, 회의가 끝난 후 자신의 집무실을 향할 때에도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의 한 발짝 뒤에서, 마치 그들을 따라가듯 걸으며, 심지어 홀로 집무실에 들어가서조차, 경영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사 아서의 날 선 말소리가 그녀 개인의 숏에 간섭하는 것에 완전히 속수무책이다. 요컨대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경영자로서의 케이란, 명색이 자신이 우두머리인 세계에서조차 온전한 주인으로서 작동하고 있지 못하는 인물이다.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역력한 케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무언가에 고정해, 카메라가 그 시선을 따라가면 거기엔 그녀의 남편 필 그레이엄의 초상 사진이 있어 케이는 사진을 향해 은근한 미소를 띄우는 것으로 좀 전의 안절부절함을 억제하고 필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 그 미소에 따라 화면 위에 애상적인 공기가 떠오르려는 찰나, 여전히 그녀의 숏에 간섭중이었던 아서의 말이 갑작스레 이를 가로막는다. 필의 "사고사"(라곤 하나 실은 자살)로 인해 그녀가 이 자리에 올라버렸으며 케이는 "사랑스러운 여자"지만 경영인으로서는 자격 미달이라는 그의 말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러나 아서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케이가 필의 사진을 보며 그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려는 찰나 같은 숏/공간에 있지도 않던 아서가 기다렸다는 듯 필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영화적 허용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적확한 순서. 사진에 박제되어있던 죽음의 표상이 케이의 시선을 타고 아서의 말을 입은 채 그 평면에서 벗어나 씬 전체로 환기될 때, 그 서늘함은 마치 유령이 불현듯 이 자리에 현현한 듯 하다. 스필버그가 자신의 유령론을 화면 위에 표상시키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돌이켜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상한 의미에서의 유령 영화를 만들어왔다. 물론 그의 영화에 유령 혹은 유령적 존재가 명시적으로 등장한 경우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나 1989년 작 <언제나Always> 뿐임을 분명 알고 있으나, 앞서 "이상한 의미에서의"란 조건을 달아놓은 것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것은 영화 상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고, 직접 말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종종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게 비치기도 하나,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인식을 사로잡아 인물들을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끌고 또 그들의 향방을 결정하기도 한다. 초월론적 가상으로서의 욕망의 대상(<A.I.>의 파란 요정, <우주 전쟁>의 보스턴)으로 현현하기도 하고, 트라우마로서 결여된 타자(<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앤 라이블리와 션, <링컨>의 윌리)로 현현하기도 하며, 불현듯 현재의 인물과 겹쳐지는 비형상(<첩자들의 다리>의 'Standing Man', <BFG>의 소년)으로 현현하기도 하며 아른거리는 이러한 유령들은,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순수한 육체도 순수한 정신도 없이", 언제나 알게 모르게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나 전적으로 단절된 시간에 속해있어, 인물들의 말과 말 사이, 혹은 흔적 사이의 향유에서만 그 존재가 간접적으로 드러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의미에서의"라는 앞의 조건은 정정해야겠다. 그 어느 유령보다도 실제적인 형태의 유령-즉 전-주체적인 기호로서의 '이름'. 이것이 바로 스필버그의 유령(론)이다(이러한 유령론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후대의 감독은 아마 쿠로사와 키요시일 것이다).
케이에게 있어 스필버그의 유령론은 두 남자, 워싱턴 포스트의 선대 발행인인 그의 아버지와 남편의 영향력으로 육화된다. 이미 세상을 뜬 두 남자. 케이가 자랑스러워 하는, 그러나 동시에 여전한 그들의 그림자에 내심 전전긍긍하는. 아서가 주식 상장 기념 파티에서 기둥에 걸린 필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리듯(혹은 유령을 다시 이 자리에 불러내고자 하는듯), 여전히 사람들에게, 심지어 케이 자신에게도 워싱턴 포스트는 선대 발행인들의 회사로 인식되고 있을 테며, 그들의 영향력이 케이로 하여금 예정에 없던 파국을 상상하게 하는 등 외려 스스로에 대한 불안으로 그녀를 몰아가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들 개인이 살아생전에 도덕적으로 얼마나 훌륭했느냐는 큰 상관없이, 당장 케이의 인식에 있어 그들의 '흔적'이 어떠한 의미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워싱턴 포스트의 '주인'과 '대리인'이라는 상상적 관계. 그리고 이 의미는 곧 구조적 정당화로 나아간다. 그런데 무엇이 정당화된다는 건가? 벤과 케이의 (서로 다른 씬에서 발화된) 말에 따르면 그것은 '그게 옳았던 시대'다. 예컨대 여성이 굳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던 시대, 가족승계의 기업에서 여성 직계 후손 대신 그 후손의 남편이 발행인직을 이어받는게 당연한 시대, "여자의 설교는 개가 뒷다리로 걷는 것과 같다"(사무엘 존슨)고 모두가 당연히 생각한 시대. 캐서린에게 드리운 유령론은 어느 새 가부장제의 신화로 접속 및 확장된다. 잠깐, 그런데 <더 포스트>의 유령은 비단 이들 뿐이던가? 벤이 타임스에 의한 펜타곤 페이퍼 첫 폭로 이후 차를 타고 출근하던 도중 시위대를 맞딱뜨릴 때, 라디오에서 베트남 전쟁 은폐에 연관된 전 대통령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도중 케네디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케네디 얼굴에 "거짓말쟁이(LIAR)"라는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향해 (벤의 시점으로 육화한) 카메라가 줌-인하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바로 이전 씬에서 케이가 맥나마라에게서 정보를 캐내달라는 벤의 요구를 사절하며 벤과 케네디 사이의 친분을 거론했던 것을 상기한다. 벤 스스로는 부정했으나 실은 벤 역시 ('대통령'인 동시에 '친구'였던) 케네디라는 유령에 전전긍긍하던 것이다. 허나 케네디가 케이를 사로잡은 유령들과 같이 가부장제의 신화를 표상하는 유령이라 할 수는 없다. 케네디는 그보단 정치인과 언론인이 (정치에 상관 없이) 아무렇지 않게 친분을 쌓고 살 수 있던, 또 다른 '그게 옳았던 (혹은 가능했던) 시대'를 표상하는 유령에 가까우며, 이러한 유령에 있어 사실 케이 역시 (딸 롤리와 벤과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더 포스트>의 화면 위에 떠도는 유령은 가부장제의 신화 하나가 아닌, 다양한 복수의 시대착오의 유령들이지 않을까?
시대착오? 그렇다. 여기서의 시대착오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시대착오, 즉 여전히 강력히 유지되고 있거나 잔재가 남아있는 남아있는, '그게 옳았던 시대'의 어긋난 질서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속한 표상들이 현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현재의 조건 하에서는 더 이상 온전히 통용되기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조 안에서 현재적으로, 공공연히 (오)작동하고있거나 은근한 강제성을 띄거나 귀환을 꾀하는 상황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여기서 환기하고 싶은 건, 이 영화가 펜타곤 페이퍼 폭로 전야와 앞서 언급한 시대착오의 유령들을 다루면서 두 가지 국가장치의 작동 방식을 동시에 가시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펜타곤 페이퍼를 최초로 폭로한 뉴욕 타임스의 누군가나 댄 엘스버그가 아닌 워싱턴 포스트의 케이와 벤을 주인공으로 삼은) <더 포스트>에서 주가 되는 것은 다양한 시대착오의 유령들이 (비로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불안이다. 펜타곤 페이퍼가 제작되는 과정을 쫓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자마자 한밤중에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 마치 오프닝 시퀀스라는 악몽을 꾸고 거기서 찢겨져나간 것 마냥 보이는 케이처럼,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이미 소외의 한 가운데에 떨어져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착오의 유령들과 어떻게 대결할 수 있을까? 애초에 유령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채로) 역사에 들러붙은 유물론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유령들을 부정하고 홀로 탈출하는 것도 부족하다. (스필버그 자신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보여주었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구조를 자유로이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구조를 움직이고 완성시킨다는 역설이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연대 뿐이다. "발행의 자유를 지키는 방법은 오직 발행 뿐"이란 벤의 아포리즘에 "연대"라는 조건이 붙어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극 내에서 방들이 영화적 공간으로 형성되는 방식이다. <더 포스트>의 모든 인물들에게는 그 인물만의 공간이 부여되어 있는데, 문은 그러한 공간들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닫혀진 인물-문들 사이로는 전화선이 연결을 대신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인물들이 취할 수 있는 동선은 어디까지나 한정된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들 중 그 누구도 케이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외부에서 출발해 뉴욕 타임스 본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건 '소식(News)'을 급박하게 전달해야 하는 인턴들 뿐이다(그러나 그런 이들도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일 위협을 받는다). 한 편 불청객들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거나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다면 빨리 물러나야 한다. 편집장실에서 벤과 대화를 하던 백디키언은 벤이 "뭐하고 앉아있는 거야?"라고 묻자 화들짝 놀라면서 방에서 물러나고, 히피 여성에게서 받은 펜타곤 페이퍼의 일부를 보고하러 온 일반 기자가 계속 편집장실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대응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모두에게 무시당한다. 그러나 케이에게는 야외 공간이 허락되지 않음을 염두에 두자. 물론 극 중 인물 중 그 누구도 야외로 나가지 못하고 실내와 실내만을 오가기는 한다(가령 백디키언이 기사 초고를 들고 벤의 집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여는 숏은 곧바로 워싱턴 포스트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숏으로 점핑한다). 그래도 다른 인물들에게 있어선 예정된 좌표에 실상 도착한 상태에서나 어떤 위협이나 난관의 봉착을 대가로 할 때 야외가 미미하게나마 허락되긴 하나, 엄연히 시스템의 지휘자인 케이에게는 길을 통해 좌표 사이를 오가는 동선이 스크린 상에 온전히 비쳐지지 않는다. (물론 나는 뒤에 등장할 한 씬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데 여기까지 열거한 '한정'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임무이다. 이 임무란 상위의 누군가가 주체에게 맡긴 일만을 이르지 않는데, 예컨대 케이가 벤에게 자신이 어떤 기사를 쓰라고 당신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제스쳐를 자꾸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권력에 앞선 임무이기 때문이다. 케이가 맥나마라의 저택에 (굳이) 찾아갔을 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상대를 '자신의 처지를 좀 이해해달라'며 설득을 하지 않고 대신 서로가 짊어진 책임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도, "아마 저라면 발행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의 방점은 "저라면(I wouldn't)"에 찍혀있다- 라는 프리츠의 말에 오히려 케이가 발행을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다시 한 번 케이가 발행을 선언할 때 프리츠가 기분 좋게 웃는 것 -스필버그는 프리츠의 웃는 모습을 단독 숏으로 강조해서 담는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면 발행에 반대하며 기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사내 수석 법률 고문 로저 클라크가 재판에선 당당히 워싱턴 포스트 측 변호를 맡고 있는 것은 또 어떤가. 다시 말해 각자의 입장에 따른 의무의 심급으로서의 임무. 그러니까 스필버그는 여기서 자유주의 하에서 가능할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연대를 상상하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드라마 투르기가 하나의 '거대한 임무'(펜타곤 페이퍼 폭로)를 그 임무에 임하는 각자의 미시적, 세부적 임무에 따라 강력한 종별화로서의 분업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며 '거대한 임무'의 집단성 -이 말은 집단 내의 화합 뿐만 아니라 불화 역시 포함하고 있다- 을 부각시킬 때, 각 임무들에는 결정적인 행위에의 위계가 세워질 수는 있어도(예컨대 케이의 발행 결정) 특권적인 위상이나 선(善)적인 측면이 부여되는 것은 불가능해져 비로소 엄밀한 의미에서의 '집단적' 연대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 비로소 집단은 연대체가 된다. 불통합적인 동일성의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임무를 다하며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는 집합-앙상블로서의 연대. 영화에서 회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제시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때문인 것이다. <더 포스트>에서 어떤 연대가 꾸준히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앙상블적 연대일 뿐이며, 그렇게 <더 포스트> 속 방이란 인물들이 지닌 임무의 은유로서 작동하게 된다. 당신이 누구든 각자의 '방-임무'를 살아가야한다는 것, 그게 <더 포스트>에서 작동하고 있는 규칙이며, 그 규칙이 비로소 이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연대를 유토피아적으로 작동케 한다. 생각해보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히피 여성의 "중요한 분이세요?"라는 물음과 대답에 따른 행동이 오묘한 울림을 어느 새 영화 전체에 퍼트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연대가 어떻게 유령과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르게 말해도 좋을 듯 싶다. 이 유토피아-연대가 어떻게 유토피아의 확장을 위한 역량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케이의 형상이 그 역할을 해낼 것이다. 서로 다른 '방'들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이들을 파악하고 조율하고 결정하여 하나의 계열로 매듭지을 수 있는 건 여성들의 외부를 거쳐 남성들의 내부로 진입하곤 하는, 1971년의 여성 경영인으로서 (유령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인 케이 뿐이다. 저택에서의 마지막 회동에서 케이는 펜타곤 페이퍼 발행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더 이상 선대 발행인들이 아닌 자신이 포스트의 주인임을 선언하며 (아서로 대변되는) 여성을 '그저 타자'로 여기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마초적 이미지들이 설 자리를 여유롭게, 그러나 일순에 탈구축해 가부장적 질서의 위상이 케이와 벤, 그리고 프리츠의 연대로 대표되는 연대체 안에서는 더 이상 온전히 작동할 수 없다고 설파한다. 만약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성취를 거두고 있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여타 시대착오의 유령들에 유의미하게 대적하고 있다면 이는 선망과 숭배의 대상으로서 서로 다른 '방'의 여성들 사이를 상승/하강하며 가로지르는 캐서린의 운동 때문(만)이 아니라 -여기서 그친다면 케이는 엘스버그가 비판했던 리바이어던식 군주-닉슨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 이러한 운동을 포함하며 케이를 필두로 해 "그게 옳았던 시대"가 설 자리를 해체하고 재설정하기 위해 격렬히 운동하는 연대체 때문인 것이다. 잠깐, 앞 문장의 "재설정"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위에서 "'방'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케이의 동선이 "이들을 파악"한다고 했을 때, 여기엔 "더 이상 구두와 드레스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기자나 정부 법무관 소속의 인턴 혹은 대법원 바깥의 인파들 -케이가 야외로 나가는 것은 이 순간 뿐이다- 같은, 역사에서 밀려난 '방' 속에 있던 여성들을 케이가 인식하고 직접 찾아가 이들의 존재를 영화상에 환기한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시대착오적인 유령들의 자리를 자리가 없던 여성들에게 나눈다는 의미에서의 재설정. 즉 과거를 다시 해석하여 그 해석에 상응하는 미래를 약속하기. 1971년의 여성들에 대해 케이는 고고한 선망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스크린 상에 출몰시키기 위하여 기꺼이 방과 방 사이를 분주하게 쏘다니는 고된 연대의 주인기표인 게다. 법정에서의 승리 직후 인쇄소의 기계들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 케이는 더 이상 선대 발행인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들을 인용하면서도 불안에 휩싸이지 않으며, 오히려 지극히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더 포스트>는 인물들이 시대착오의 유령을 정화하고 그 유령들과 사는 법을 익히는 영화이다. 혹은 신화를 벗겨내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법을 익히는 영화이다. 신문을 출력하고 있는 인쇄소의 풍경 사이에서 두 사람이 화목하게 (지극히 후일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 영화의 메인 플롯-캐서린과 벤의 연대 이야기는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순간은 유토피아적 연대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케이는 설마 그럴리가 있나, 라는 투로 "이런 일 다시 겪고 싶진 않네요"라고 말한다. 여기에 그녀의 기대에 반하는 이상한 추신이 곧장 따르는데, 갑자기 카메라는 인쇄소를 벗어나 백악관 바깥, 집무실에서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닉슨을 향하며, 그 직후 이전과는 다른 급박한 무드의 음악과 함께 워터게이트 빌딩의 한복판으로 진입해버린다. 펜타곤 페이퍼 폭로 이후에 펼쳐진 워터게이트 사건이 암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엔딩 시퀀스 안에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얼굴, 다시 말해 이 이전에 극 안에서 중심점으로 작용했던 얼굴들이나 이 이후에 그러할 얼굴이 전무하다. 극적 동일성이 완전히 부재하는, 지나치게 독립적인 엔딩 시퀀스의 성립. 이렇게 되면 상상적 관계의 선이 모조리 끊어져 영화의 중심점이 아예 지워지지 않는가. 또 이렇게 되면 속편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 엔딩 시퀀스의, 더 나아가 <더 포스트>란 영화의 위치는 위태로워지지 않는가. 마치 영화가 이 이전을 부정하고 새로 시작하려는 듯한, 그러나 그런 기미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해버리는, 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비약. 이 시퀀스는 (역사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나, 동시에 (영화적으로는) 당혹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
이는 문득 본작의 오프닝 시퀀스 역시 이처럼 본편의 타임라인이나 무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파트였음을 상기시키며 영화의 서사 구조가 마치 삼면화같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여기서의 삼면화란 루벤스나 베크만식의 삼면화가 아니라 베이컨식의 삼면화, 즉 유사한 '형태'를 띄는 양쪽의 그림이 가운데 그림의 '속도'를 작동시키는 방법론에 가까우며, 이 경우 각각의 그림은 개별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세 갈래로 나뉘어진, 분배적인 통일성이 된다. 요컨대 이미지들은 상상 속에서조차 정착되거나 완성되거나 고착되거나 완료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가 된다. 엔딩 시퀀스가 영화 전체의 구조에 대한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발작'을 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발작'이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 이제 <더 포스트>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언제인지 다시 떠올려보자. 1971년,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과거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있는 시대. 왜 하필 스필버그는 연대와 유토피아에 대해 논하기 위해 이 시대를 선택한 것일까? 어쩌면 <더 포스트>가 다루는 자유주의에서의 유토피아는 40여 년 전의 과거에나 가능했던 게 아닐까, 라고 자문한 게 아닐까? 이 시기에 대해선 이러한 방식으로 체제에 반하고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다룰 수 없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상징되는) 중심점을 잃어버리고 너무 많은 것이 너무 많이 바뀌어버린 그 이후(의 구조)에도 과연 이러한 방식이 온전히 쓰일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라는 불안한 질문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엔딩 시퀀스는 영화 내내 이어진 자유와 연대의 만족감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장치로서 작동하며, -스필버그의 다른 엔딩들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단과 선회에 의한 초점상실의 혼란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흐뭇함에 뼛속까지 흠뻑 젖는 대신 우리가 처한 구조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스필버그가 이토록 품격있는 언론 드라마를 만든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오히려 케이를 리바이어던식 영웅으로 만드는 '호소' 대신 연대의 네트워크를 가시화하고 더 나아가 (구조의 영역에서) 끝까지 불화를 밀어붙이는, 도박에 가까운 급진성이 놀라운 것이다. 그렇기에 <더 포스트>가, 더 나아가 스필버그의 시대극들이 5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듯 고전적으로 품격있다는 말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의 거래를 중단시키기 위해선 디제시스 내부의 연대는 물론 구조로서의 영화 역시 자신의 단일적 완결성을 포기하고 불화로 기꺼이 내몰려야 한다고 스필버그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스필버그의 도박은 우리에게 교훈 너머의 거대한 숙제를 남겨준다. 과연 스필버그는 우리 시대에 가능할 연대의 방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혹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