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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03. 2018

환상이 머무는 곳 - <자장 자장 예쁜 샬롯>

"우리들이 몽상을 살았던 장소들은 새로운 몽상 가운데 스스로 복원된다.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로워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미리엄이 음악실의 불을 켜려 하자 흐느끼던 샬롯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미리엄을 제지한다. "불 켜지 마. 밝으면 진짜가 아니야. 어두울 때에만 진짜야. 어둡고 고요할 때에만..." 여기서 생략된 주어, 빛의 조건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장면의 앞과 뒤에 각각 '이따금 존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샬롯의 말과,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발견되는 존의 잘려진 손이 배치되어있음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살해당한 존의 유령인 듯 싶다. 하지만 정말 그것 뿐인가. 샬롯의 말이 불을 켤 수 있는 곳, 즉 한밤 중의 저택을 전제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 저택이 그의 아버지인 빅 샘의 장소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우리는 샬롯이 자신의 "부도덕한" 연인인 존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 빅 샘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기나긴 세월을 이 저택에서 보냈음을 (나중에) 안다. 말하자면 샬롯은 존과 빅 샘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유령들의 흔적(빅 샘의 저택과 존의 오르골)을 향유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유령들은 단순히 흔적만으로서 영화를 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영화 중반부부터 미리엄과 드루가 샬롯을 저택에서 쫓아내고 그녀의 모든 재산을 가로채려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들은 샬롯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 위해 유령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마냥 일종의 연극을 꾸미기까지 한다. 그래서 시체 모형을 주문하고, 밤 중에 노래를 부르고, 드루가 죽은 것처럼 샬롯을 속인다. 이 위선자hypocrite들은 자신들을 부르는 말의 유래가 "배우, 즉 가면 아래 숨어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후포크리테스hupokrites"1임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영화사에는 그 이전까지 전형(이라 간주된 것)을 환상으로 간주, 그것을 이루는 디스포지티프들을 비틀거나 폭로하는 방식으로 탈신비화(의 매력)를 수행하려는 영화들의 계보가 있어, 이 계보의 걸작들은 특히 고전기 할리우드가 붕괴한 시기로 간주되는 5~6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멀리 갈 필요 없이 '그 유명한' <선셋 대로>와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고 로버트 알드리치의 전작인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떠올려보자- ,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사악한 연극이 제작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표상하는 <자장 자장 예쁜 샬롯> 역시 일견 이 계보에 포함되(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미리엄의 제스쳐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놀란 샬롯을 방으로 보낸 다음 다시 내려와 놀란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는 미리엄과 화장실에 들어가 메아리를 통해 샬롯을 부르는 미리엄 사이에 동일성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 제스쳐 사이의 간극을 대체 어떻게 심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전자를 '미리엄이 드루가 제대로 뒷정리를 했는지 확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미리엄이 아직 잠자리에 들고 있을 때 샬롯을 홀린 유령적인 메아리는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영화 속 세계 그 어디에도 이 첫번째 메아리의 출처가 제대로 암시된 적은 없다. 말 그대로 "유령적인 메아리". 그렇게 표정과 제스쳐가 암시하는 미리엄의 감정은 자꾸만 그 이전 혹은 그 이후에 대하여 어긋난다. 혹은, 거울들이 깨지고 샬롯이 다친 날 밤에 뮤직룸에선 무슨 일이 있었으며 강물에 버려졌던 드루는 어떻게 자동차보다 빨리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나? 추후에 추가되어 이전의 장면들을 보충 및 반박해야하는 장면들이 제시하는 사실과 경험은 이전의 것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 그 잘려나간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그 비약이 가능하긴 한 걸까? 이렇게 빈틈이 많은 영화를 당신은 얼마나 본 적이 있는가. 아무래도 <자장 자장 예쁜 샬롯>에서 로버트 알드리치는 저들이 위선자-배우라는 사실을 까발리는 탈신비화 이상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 같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프레임 속의 이미지는 그 순간에 있어 하나의 사실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로서의 명제'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이미지는 전체 중 당장 스스로가 주장하려는 것의 외양만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너무 속절없이, 또 그럴듯하게 변이하고 스쳐지나가기에, 종종 그것이 명제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일단 사실로 받아들여질 뿐이다.2 그러한 이미지들이 서로를 보충하고 수정해 -물론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과된 시간 속에서 축적된 이미지들을 관통하는 '진짜' 사실을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관객의 인식 속에 '논리적'으로 쌓이는 위상학적 구조물. 그것이 기억장치로서의 영화이다. 그런데 <자장 자장 예쁜 샬롯>에서 처럼 서로 상충되는 사실의 이미지가 보충과 수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쌓인다면, 그래서 인식의 빈틈이 메워지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나버린다면 어떻게될까? 아무튼간에 우리는 나중에 제시된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믿음에 달린 문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불안정한 빈틈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이미지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올바른 이야기를 이루리라'는 관객의 믿음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이 때 믿음은 욕망과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에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그리고 가장 강력한) 방법은 충격을 주는 것이다. 샬롯이 맞딱뜨리는 충격적인 이미지들(존의 잘려진 손과 칼, 존의 목, 우리는 보지 못한 빅 샘의 유령, 드루의 죽음과 유령)들을 떠올려보자. 그런 이미지들의 범람은 스스로가 품은 충격의 강도에 의해 영화를 (재)구성하는 관객의 주체적인 응시/사유의 역량을 무력화하여 그 충격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는 물론 미리엄과 드루의 연극의 전략이지만 나아가 <자장 자장 예쁜 샬롯>이라는 영화를 만들며 알드리치가 관심을 둔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예술은 충격을 제시하는 데에 가장 탁월한 '눈요깃거리'이기 때문이다. 알드리치가 저 충격적인 이미지들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면서 끌어들일 때, 영화에 새겨진 (빈틈과 충격의) 교란적인 비약의 배치는 '대문자 영화'의 상태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하나의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논리가 된다. 프레임 속의 이미지란 논증 없이 그 자체로 다른 단독적인 이미지를 반박하고 변형하는데 무력하며("그것은 전적으로 믿음에 달린 문제"이다), 그 무력함을 손쉽게 대체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미지의 남발에 의해 타락할 만큼 타락한 이미지 신앙이다. 그것이 바로 알드리치가 '진단'한 영화의 오작동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인물이 (생략을 통해) 신출귀몰한 교란의 존재가 아닌, 존재 자체가 (상충을 통해) 비논리적, 비현실적으로 교란된 형체가 될 때, 미리엄과 드루라는 위선자들은 보이지 않는 (오작동의) 힘에 억지로 이끌려 환상을 창출 및 상연하는 배우들처럼 보인다. 


여기서 저택은 알드리치의 '진단'을 스크린에 논리적으로 정착시킨 형태, 곧 교란과 충격으로서의 환상의 창출과 상연을 가능케하는 특권적 '장치'이다. 샬롯의 환상 속 무도회 씬 뿐만 아니라, 저 배우들로 하여금 모순적인 행위와 동선을 수반케 하며 들릴 리 없는 메아리를 출몰시키고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거울을 깨 샬롯을 상처입히는, 너무도 실제적인 환상 말이다. <마부제 박사> 시리즈의 마부제 박사, <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애디 로스, <현기증>의 매들린 등이 보여주었던 전지전능한 출몰과 교란의 능력을, 알드리치는 이 저택에 부여한 것이다.3 그러니까 <자장 자장 예쁜 샬롯>의 진정한 악당은 미리엄과 드루가 아니라 빅 샘의 저택이다. 처음에 나는 이 저택을 유령의 흔적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이 말은 환상이 머무는 곳이며 동시에 환상이 기능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유령의 장소"로 정정되어야 하리라. 꼿꼿이 서있는 저택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한 숏의 연쇄 위에 빅 샘의 목소리가 떠다니는 광경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종종 극장이 집으로 비유되곤 했음을 떠올린다면, 실제로 영화 안에서 저택이 무대 장치가 됨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첫 문단에서 인용한 샬롯의 대사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이 집과 샬롯의 관계가 고전적 시네필리아의 은유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것은 타락한 이미지 신앙과 함께 오작동하며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기억에 단단히 얽메여있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중요하다- 샬롯이라는 관객을 무기력의 병증으로 몰아넣는 중이다. 게다가 이 저택은 곧 철거될 운명에 처해있다. (극장-영화가 독점했던 지배적 문화 장치의 권위가 TV로 인해 흔들리게 된 때에 이 영화가 만들어졌음을 상기하라!)


영화의 오작동에 저항해야 한다. 미리엄과 드루, 존과 빅 샘의 유령에, 저 타락한 이미지 신앙의 체계에서, 환상의 존재양태들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영화는 두 번에 걸쳐 해결책을 탐색한다. 한 번은 환상을 창출 및 상연하는 핵심 요소로서의 위선자-배우들을 몰살한다. 그들이 없다면 연극도, 그로인한 충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미리엄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노리고 샬롯에게 접근할 위선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은 얼마든지 배우로서 대체될 수 있다-'유령의 장소'인 빅 샘의 저택이 있는 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해결의 순간은 샬롯이 미리엄과 드루를 살해할 때가 아니라 다른 한 번, 그 이후에 저택을 나설 (혹은 나서야 할) 때가 된다. "집은 인간에게 안정의 근거나 또는 그 환상을 주는 이미지들의 집적체이다"4라는 바슐라르의 말은 "유령들의 흔적을 향유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던 샬롯의 상황을 수식하는데 (부정적으로) 적절하기 그지없다. 살아가기 위해선 삶의 목적과도 같았던 것들을 버려야만 한다는 역설을, 문 앞에서 (영화 안에서 처음으로) 외출복을 입고 존의 오르골을 든 채 선 샬롯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샬롯이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의 오르골을 내려놓자 영화 내내 배경음악으로서 흐르는 듯 했던 Hush...Hush, Sweet Charlotte이 도중에 멈추고, 그것을 듣는 우리는 귀를 맴돌던 음악이 중요한 음향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잠깐 저택을 훑어보며 불안과 주저를 얼굴에 띄우나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서는 그의 위로 다시금 조심스레 흐르는 Hush...Hush, Sweet Charlotte은 이전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샬롯의 향수를 자극하고 노정하며 그녀를 장소에 붙잡던 노래는 이제 향수 없이 살아갈 샬롯을 위한 축가가 되었다. 결국 영화의 흐름은 처음에 언급한 샬롯의 대사("불 켜지 마. 밝으면 진짜가 아니야. 어두울 때에만 진짜야. 어둡고 고요할 때에만...")에 담긴 이 시네필적인 믿음을 적극적으로 배반하고 그로부터 단절됨으로서 외려 진정 희망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를 괴롭히려는 이미지들은 아직 있다. 구경꾼들이 나누는 자극적인 가십의 말들은 그 곳에 남아서 자신들만의 믿음, 자신들만의 논리를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단절을 향하려는 샬롯은 일체의 발화를 거부하며 그것과는 조금도 얽메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잠깐, 당신은 마지막에 샬롯이 탄 차가 어디를 가는지 들었는가? 샬롯이 곧장 정신병원을 향하는지, 경찰서를 향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지 우리는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마침내 집을 나섰다는 것만을 겨우 확인했을 뿐. 물론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경찰서를 먼저 가겠으나, 인물의 좌표가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을 때 그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술궂게도, 알드리치는 마지막까지도 우리가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게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오히려 좌표가 제시되지 않은 불확실함 때문에 앞으로의 샬롯의 동선은 희망찰 것만 같다. 아마도 그가 이 이후 '되찾은 시간'을 품에 안은 채 어느 집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으리라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샬롯은 그 당대에 있어 가장 처연한 저항자, 가장 아름다운 시네필리의 초상으로 보인다.



각주


1. 자크 랑시에르, [영화우화] 中 "무성의 타르튀프"


2. 물론 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명제 중 하나인 "그림은 하나의 사실이다"를 오독해 비튼 것이다.


3. <곡성>은 바로 그 때문에 천박하기 그지 없는 영화다. 나홍진은 <곡성>에서 상충되는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어떤 논리적 근거도 마련치 않은 채, 그저 인물과 관객을 속이기 위해 영화를 교란시키며 자신의 역겨운 '윤리'를 주장한다. 이창동의 <버닝>과 함께, 최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위악의 '끝판왕'이라 하겠다.


4.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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