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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08. 2021

서울에서 지난 부산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대비할 즈음에 비평가란 '직함'에 관련해서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공공기관에서 주최하는 모 공모전 3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꽤나 피곤하고 머리 아픈 경험이었다. 인디포럼 2021에서 온라인 GV를 진행했고 폐막작인 <보조바퀴>에 대한 리뷰를 썼다. 제대로 못 해낸 것 같아 맘이 안 좋다. 그리고 청탁받은 글 2개를 쓰고 있었다. 이쪽은 더 맘이 안 좋다. 강릉국제영화제에 얼마나 체류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못 갔다. 만화평론 공모전에 낼 글을 완성해서 송고했다. 결국 떨어졌다. 다른 고민도 있지만 지금 공개할 것은 아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나는 모종의 '일'로서의 평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말하자면, 길을 기어이 만들고 마는 게 평자의 (어쩔 수 없는) 임무이자 (폭력적인) 특권이다. 독자든 관객이든 시청자든, 하여튼 그 정체불명의 불특정 다수 앞/속에서 세상에 널린 작업을 가로지르고 잘라내고 꿰맞추며 그것으로 우리가 속한 영토를 인식할 어떤 길을 만드는 것. 평을 사람들 앞에 내놓을 때 이미 이 임무이자 특권은 시작되며, 그것에 충실할 것 이외에 평자의 존재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길은 말끔한 포장과 명료한 뷰를 가진 직선일 수도 있고 포장되지 않고 나무가 시야를 가리는 뷰에 지그재그로 이뤄져 있을 수도 있다. 둘 사이에는 그 자체로 우위가 없고, 서로 다른 방식하에 구축된 길들일 뿐이다. 설령 같은 점들을 잇는다 해도 그 방식의 차이는 경험의 차이로, 곧 의미의 차이로 이어지지만 말이다. 


하여튼, 올해 26주년을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올 것을 (준비라기보다는) 대비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 임무이자 특권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선 개봉이 예정되어 있거나 특별전을 통해 볼 수 있을 법한 영화들은 최대한 배제했다. 그런 영화들을 미리 보는 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건 (물론 시간과 돈과 관객들의 수가 여유롭다면)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온다. 한정된 시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영화(와 사람들과 광고)가 도처에 스쳐 지나가는 영화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오히려 남들이 덜 찾는 작품을 가능한 보고 말을 얹는 것이고, 그래서 관객들을 자극하고, 영화제 바깥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할 힘을 가진 이들을 자극해 그 경험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올해 그 일에 충실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시작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마침 대체공휴일과 생업의 휴일과 겹쳐서 여유롭게 4박 5일 동안 10편의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영화와 전혀 관계없는 친구들과 함께 숙소를 쓰고 놀았는데,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여유롭게" 쉬지는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이 더더욱 하드코어해졌다...) 하지만 그 중에도 보지 못한 영화들이 있는데, 가령 <소울의 여름 (... 혹은, 혁명이 텔레비전에 나오지 못했을 때)(Summer of Soul (...Or, When the Revolution Could Not Be Televised))>으로 영화제를 신나게 마무리하려던 나의 이상은, 나의 성급함과 부주의함이 늘 그렇듯 시간표를 잘못 알아서(월요일 상영과 화요일 상영을 혼동했다. 이 영화의 상영 일정이 모두 오후 4시대였기 때문이다) 무산되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애플 TV인가 디즈니 TV인가에서 볼 수 있다고는 하는데, 가능하면 여럿이서, 괜찮은 사운드 속에서 보고 또 듣고 싶다. 


보고 싶었지만 위의 이유 때문에, 혹은 시간문제 때문에 포기한 다른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재수 없는 떡방아 혹은 미친 포르노(Babardeală cu bucluc sau porno balamuc)>, <메모리아(Memoria)>, <구멍(Il Buco)>, <베네데타(Benedetta)>,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링귀, 신성한 유대(Lingui, les liens sacrés)>, <프랑스(France)>, <6번 칸(Hytti nro 6)>,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린 무얼 보나요?(Ras vkhedavt, rodesac cas vukurebt?)>, 그리고 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 특히 일정 때문에 <메모리아>와 <구멍>을 놓친 건 아직도 이가 갈린다. 또 <베네데타> 야외상영을 포기한 것도 아쉽긴 하다. 


... 그리고 이가 갈리는 데서 스트레스는 끝나지 않았다. 일단 <루치오를 위하여(Per Lucio)>를 놓친 건 이번 부국제 최대의 한이다. 비행기가 20분 연착이 안 됐다면 제시간에 극장에 도착했을 터인데... 다른 사람들의 평을 찾아보니 아주 굉장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번 상영에 쓰인 자막이 별로였다는 소문도 있긴 하지만. 공개된 이런저런 클립을 보면 매드무비의 형식을 교묘히 역사로 확장한 것 같다는 인상도 드는데, 본편은 어떨런지. <마틴 에덴>의 (소소한) 인기에 힘입어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전작을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늦은 점심을 먹고 본 이날의 유일한 영화인 <쓰촨의 신-신 극단(椒麻堂會)>은, 전반부 1시간은 거의 자고 나머지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보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영 불만족스러웠다. 예고편과 줄거리를 보고선 '근현대 중국을 달리 이해해보려 하는 영화겠구나!' 해 나름 기대를 갖고 선택한 영화였으나, 안타깝게도 내게 이 영화가 취하는 과시적인 '연극성'은 근현대 중국사를 달리 가늠해보기 위한 방법이 되지 못하고, 또 영화와 연극의 관계를 면밀하게 따져보는 방법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양자의 '상식'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선 조너선 스펜스의 책들을 읽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주인공인 치우푸의 개인사를 포괄하는 근현대 중국의 수난을 '우스꽝스러우면서 끔찍한' 것으로 묘사하고자 한 건 잘 알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가령 연극의 미시적인 행위 자체가 역사와 대면하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는 너무 안전하다. 대체 누가 이런 영화를 두고 중국판 웨스 앤더슨이라고 한 건지. 


그 다음 날 홀로 잠들고 일어나 본 <견습공의 일주일(Sis dies corrents)>은 별다른 감흥이 안 생기는 평탄하고 소소한 코미디였다. 흔하디흔한 '이민자 영화'들처럼 쓸데없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 외에 더 생각할 지점을 제공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아, 드문드문 숏의 나눔을 통해 공간을 분리시키고 잇는 순간들은 근사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썩 괜찮았다. 가령 촬영 스튜디오 에피소드처럼. 


마찬가지로 부국제에 온 친구와 잠깐 인사를 나눈 뒤 본 (<견왕>이 아니라!) <이누오(犬王)>는, 테즈카 오사무의 <도로로>를 자기 맘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에 비해 2017년 이후 유아사 마사아키의 극장용 작업들 중 제일 게으르게, 아니 그걸 넘어 제일 아마추어적으로 보였다. 비슷비슷하게 이어지는 레퍼토리와 인물들의 딱딱한 몸짓. 여기엔 그의 특기라 할 과감한 광각-롱테이크의 액션도, 최근의 <영상연에는 손대지 마!>으로 이어진 편집증적인 '반복'(무언가 말을 내뱉자마자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하려드는 인물들)도 없어서, 충만한 운동감으로 유아사를 규정하고 보던 이들에게 <이누오>는 많이 실망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꽤 오랫동안 유아사를 옹호해왔지만 그의 근작에 대해선 관심을 조금씩 덜어야 하지 않나 고민하고 있다. 약간 심술궂은 가정, <이누오>는 같은 제작사에서 만든 (<케이-온!>의 야마나 나오코가 감독을 맡았지만 그보다는 만화가 타카노 후미코가 생애 처음으로 캐릭터 원안을 맡았다는 점에서 더 흥미가 가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예기치 않은 사이드 프로젝트가 아닐까? 한데 최후반의 어떤 씬, 유아사에게서 기대하지 않던 잠깐의 침묵만큼은 꽤 강렬해서, 마치 이 씬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유아사 마사아키에게 있어 남자들 간의 사랑이 자꾸만 파국으로 향하는 것 역시 지적하고 싶다. 그가 호모포비아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이 날 일정 중 마지막으로 본 <복수처럼 그리움은 반드시 갚아야한다(Seperti Dendam Rindu Harus Dibayar Tuntas)>은, 주인공들의 허무맹랑한 첫 액션씬을 보며 낄낄거리긴 했지만 뒤로 갈수록 별거 없는 영화임이 확실해졌다. 감독인 에드윈은 7~80년대 (동-)아시아 액션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로서의 블랙 코미디로 본작을 설명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시기의 영화들에서 따오기만 한 장면들이 서로를 엮을 논리 없이 계속 이어져서 갈수록 산산히 떨어져 나간다. 발기부전의 테마도 그렇다. 딜도가 되지 못하는 광폭한 남성성을 다루는 데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결국 진부하게도 '회복'을 추구하는 걸 보며 절로 혀를 찼다. 누가 그랬던가, 평론가들은 섹스와 폭력 앞에서 지나치게 투정을 부리거나 지나치게 열광한다고. (출처 불분명) 로카르노 영화제가 이런 영화에 황금표범상을 수여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로카르노의 변화가 이런 것이라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날 첫 영화는 <소녀와 거미(Das Mädchen und die Spinne)>였는데, 뛰어나다기보단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했던 라몬 취르허가 자기 형제 실방 취르허와 함께 만든 영화다. 이사와 이사 기념 파티가 진행되는 이틀이 퍽 기이하게 펼쳐지는데, 이른바 '아트하우스 영화'식의 느끼한 연기톤과 다소 경직된 연출에 기대고 있단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트위터를 보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평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괜찮은 야심을 품고 밀고 나가 맘에 들었다. 어떤 야심? 앙드레 바쟁은 영화의 프레임이 자기 내부뿐만 아니라 자기 바깥도 지시할 수밖에 없는 원심력의 성질을 갖는다 말한 바 있는데, <소녀와 거미>는 바로 그 성질을 뚝심있게 다루려는 야심을 갖는다. 화면을 오가는 소리와 운동, 타이트한 숏 사이즈와 화면 바깥을 향하는 시선, 설정 숏이 없어 지나치게 밀접해 있단 느낌을 주는 공간들은 숏의 연쇄가 인식론적 원심력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가시화하는데, 그 원심력이 다름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철저한 소통 불가능으로 향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즉 여기서 영화의 원심력은 '네가 거기 있다'는 믿음의 주문이 아니라 '너는 어쩌다 거기 있지?'라는 불신의 물음의 결과이자 시작인 것이다. '타자에의 환대'라는 말이 실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말하자면 오즈 야스지로의 교훈?) 앞서 말했듯 아직 꺼림칙한 부분이 있긴 하나, 취르허 형제의 다음 영화는 충분히 기다려볼 만 하다. 


이 다음엔 트친인 모 님과 한참 떠들다가 <무지의 밤(A Night of Knowing Nothing)>을 보았다. (<네 번>으로 신비한 경험을 안겨줬던)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구멍>을 포기하고 선택한 영화기도 하고, 감독 파얄 카파디아의 이전작들을 괜찮게 본 기억이 있어 여러모로 기대를 했다. 영화는 인도 국립 영화 텔레비전 대학(FTII)의 반정부 투쟁에 대한 기록 영상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 (어딨는지 모를) 연인을 향한 서간체의 내레이션을 배치하고 있는데, 처음엔 투쟁에 남아있는 축제의 성질을 파고들거나 서간체에 내재된 멜랑콜리를 다루려는 에세이 영화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니, 상관이 없다기보단 영화가 그런 방향으로 가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우연히 발견된) 편지의 화자와 그것을 낭독하는 내레이션이 실상 일치할 때, 그리고 그래서 내레이션이 기록 영상의 맥락과 그 속에서 느낀 감정을 절절한 톤으로 고백할 때, 파얄 카파디아는 이 투쟁을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조바심에 서간체에 내재된 행간과 시차를 성급히 접어버리는 것이다. 좀 더 끈기를 갖고 작업에 임할 수는 없었을까. (이 지점에서 최근의 성공 사례인 미겔 고미쉬의 <천일야화 3부> "불타는 숲" 에피소드가 생각이 안 날 수 없었다) 러닝타임 내내 아쉬움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그 다음 날엔 낮 동안 동행들과 피곤할 정도로 놀다가 그날의 유일한 일정을 소화하러 나섰다. 그리고 첫 10분에 이미 결판이 났다. 올해 내가 다녀온 부산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고른다면 주저 없이 <아네트(Anette)>를 고른다. <베네데타> 야외 상영을 포기했지만 <아네트>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레오스 카락스가 저 유명한 동화 <피노키오>를 암묵적인 참조점으로 삼은 채 전개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뮤지컬 영화의 조건들을 성실히 뒤집는 안티 시네마 뮤지컬이다. 뮤지컬 영화 자체의 전통에 기대는 대신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스테이지를 비롯한 다른 문화적 생산물의 전통과 코드들을 끌어들이고, 오프닝 시퀀스에서 엔딩 크레딧까지 끊임없이 (프레임-)공간의 안정성을 부수고 또 부수며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의 환상)을 일그러트리는 오프닝 트랙인 So May We Start?의 가사를 곱씹어보라― 안티 시네마 뮤지컬. 이런 수단들을 통해, 카락스는 <홀리 모터스>에 이어 영화라는 불순한 '것'에 대한 고찰을 요청하는 동시에 당대의 이미지 생태계에 대한 음울한 비전을 밀고 나간다. 아니, 차라리 관객들이 더 이상 믿음을 갖고 스크린을 응시하지 않는다 여기(고서 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게임을 벌이)던 <홀리 모터스>보다 관객들을 둘러싼 이미지가 관객들을 유해한 것으로 만든다고(혹은 그 역) 여기고서 그것의 폭력성에 집중하는 <아네트> 쪽이 훨씬 냉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는 물론 그 자체로 불편한 잉여인 아네트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레오스 카락스는 브루노 뒤몽의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과 <잔 다르크>과 서로의 정반대에서 연대하게 된다. <아네트>에 대해선 기꺼이 더 길게 떠들고 싶다. 


그 다음 날 동행들과 헤어지고서 간만에 홀로 잠들고 일어나 느즈막이 센텀시티 주변을 배회하다 본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마지막 영화 <월팔의 일기(Diários de Otsoga)>는, (하드코어한 일정 때문인지 영화 탓인지 모르겠다만) 절반가량 졸고 나머지 절반은 기대와는 달리 좀 심드렁하게 봤다. 물론 (공동 감독인 미겔 고미쉬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좋은 장면이 없는 건 아니었고, (영화 안에서 직접 언급되듯) 팬데믹을 배경으로 본래의 시간선을 거꾸로 뒤집어 질문이 제거된 채로 사건을 본다는 특이한 감각을 구축한다는 아이디어도 그 자체론 인정할 수 있었지만, 트릭과 씬의 배치가 고미쉬 답지 않게 (어쩌면 공동 감독인 모린 파젠데이로 답게?)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고지식하게 계산된 채 이뤄져서 도저히 즐겁게 볼 수가 없었다. 실상 같은 의미를 발산하는 날짜들이 연이어 배치될 땐 괜히 깨어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부하고 지루한 아카데미적 한담 같달끼? 이런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잘 실천할 수 있는 건 물론 홍상수일 것이다. 내가 본 고미쉬의 작업 중 유일하게 실망스러운 장편영화였다. 




... 그리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있다 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비 없는 부산국제영화제라니 있을 리 없지, 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저녁을 해치운 나는 공항으로 나섰다. 이때만 해도 나는 강릉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으리라 낙관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의도적으로 코로나 19에 대한 얘기를 여기서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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