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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ug 18. 2021

쿠로사와 키요시의 근작에 대한 노트

*이 글은 얼마 전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영화적 장소의 구축에 있어, 홍상수와 쿠로사와 키요시는 서로의 정반대에서 손을 잡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홍상수가 아무데서나 영화를 성립시키는 반면 키요시는 아무것도 아닌 데서 영화를 성립시킨다고 할까? 좀 더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물론 있다. (이때의 장소란 지정학적 맥락에 관한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사' 영화에서 인물들이 배치되는 그 장소를 이른다) 로케이션 촬영을 고집해 어느 도시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작고 평범한 장소를 철저히 평범하게 찍고 기괴하게 누빔으로서 장소를 영화를 위한 곳으로 물들이는, 달리 말해 "그다지 별난 것은 없는 장소이되 여하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유운성)을 찾아 배우들을 떠들게 하거나 장소의 안팎으로 이동하게끔 주문하는 이가 바로 홍상수다. 반면 세트 촬영을 선호해 아무리 봐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론 외계나 미래에도 없을 법한 비경제적이고 뒤틀린 구조의 장소의 구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그 상태를 보편으로 주장하는 뻔뻔함으로 영화를 이런 구조에 조응하는 것으로 물들이는, 달리 말해 "이런 구조의 면회실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 것인가 하는 어리둥절함을"(하스미 시게히코) 뻔뻔하게 긍정하며 "액션"을 외치고야 마는 이가 바로 키요시다. 하지만 (마니 파버라면 질색을 했을) 인물의 심리 반영하는 감성적 지표가 아닌, 독립된 존재감으로 인물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행사하는 미장센으로 장소를 찍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소의 ('사람이 살 만한' 투시도법이 불가능한) 미시적인 불균형을 밀고 나가 주어진 현실이 언제나 이미 왜곡된 비현실임을 과감히 증명한다는 점에서 두 감독은 끝끝내 손을 잡게 된다. 요컨대 이들은 영화적 장소의 구축 방법에 있어 현재 가장 양극에 있는 급진적인 감독들이라 할 수 있는 게다. (한편 이 양극 사이에서 변화를 겪는 페드로 코스타, 크리스티앙 펫졸트, 피에트로 마르첼로, 그리고 '아마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전략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쿠로사와 키요시의 2019년작 <여행의  세계의 시작>(아직도 잘 외워지지 않는다...)의 장소를 보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의 주인공 요코가 마주한 우즈베키스탄의 풍경은, 물론 키요시답게 요코와 지속해서 불화하긴 하나, 종종 요코의 내면으로 접혀 들어가는 감성적 지표로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 로케이션으로 찍힌 우즈베키스탄은 (3·11 이후의) 일본을 다시 (당혹스럽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한 공간이거나 (시혜적 태도라는 혐의를 지우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를 동원하고 있음에도) 요코의 연민을 자아내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더군다나 더더욱 당황하게 되는 건 염소를 구했다는 '생각' 이후 키요시에겐 극히 이례적으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뜬금없이 디제시스 바깥으로 빠져나와 저 유명한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세상과 화합하려는 요코의 모습에서 영화가 끝날 때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올려보면, 마지막에서 2번째 씬에서 키요시는 주로 차안과 피안의 경계로 묘사되는 바다 앞에 앉은 부부를 포착하기 위하여 바다를 완전히 등진 채 수평 트래킹을 동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다의 굳어진 상징성을 주의깊게 해체하려 드는 단호한 연출. 그에 비하면 <여행의 끝...>의 산골 풍경은 적잖이 매끄럽고 순진하게 요코에게로 내삽되어 제시된다는 느낌이 분명 있는 것이다. 나는 결국 <여행의 끝...>은 그의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렇지만 여기에 "유의미한"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은데, 이를 위해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경유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여기서? 갑자기? 어째서?


생경한 풍경에서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인물, '보이는' 리얼리티와 '찍힌' 리얼리티 사이의 차이가 만드는 기묘한 감각, 그리고 그 분리를 일순 교란하는 몸짓들. 아마 웬만해선 이런 성질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것임에 동의할 테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는 <여행의 끝...>에서 키요시가 방송 촬영이라는 설정을 통해 전면화하고 있는 성질이며, 그래서 그것은 서로 작품 내적으로 공명하는 바가 없는 것 같던 키아로스타미와 키요시 사이의 공명이 (뒤늦게) 가시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디제시스를 과감히 초과하는 사물의 힘,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직면하는 인물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 -물론 나는 지금 <뱀의 길>의 마지막 시퀀스를 떠올리고 있다- 키요시의 면모는 분명 미약하게나마 키아로스타미와 끈질기게 공명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행의 끝...>은 일본과 우즈베키스탄의 수교 기념작이기 이전에 키아로스타미에 대한 헌사 격의 '습작'이라 봐도 무방하다. 자신과 키아로스타미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펼쳐진 이런저런 측정의 시도 끝에 펼쳐진 엔딩은 (키아로스타미가 그러했듯) 여러 겹의 리얼리티가 한순간 교차해 화합하는 순간을 -마지막 숏에서 카메라를 직시하는 마에다 아츠코/요코는 대체 '누구'로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가?- 자기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한, 키요시의 감독으로서의 도박이 아니었을까? 물론 앞서 말한 대로 그 과정이 적잖이 매끄럽고 순진하긴 하지만, 이 독립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씬은 분명 그 도박에 걸맞은 어떤 신기한 감각을, 영화 속 세계와 우리가 함께 있고 나아가 화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발산한다. 우즈베키스탄이란 장소는 오직 이 한 장면을 위해 필요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내 믿음직한 친구인 정 미파의 근사한 평을 빌리자면, 이 영화의 "단점은 구상의 허술함을 인지하고서도 그걸 그대로 밀고 나가는 태만함에 있고 강점은 구상의 허술함을 인지하고서도 그걸 그대로 밀고 나가는 태만함에 있다." 


한편 그다음 작품인 <스파이의 아내>에서 중일 전쟁 와중·태평양 전쟁 직전의 일본은 거의 세트 안에서, 그것도 수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실내극으로 구현된다. 물론 첫 번째 문단에서 얘기했듯 이 실내극은 "아무리 봐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론 외계나 미래에도 없을 법한 비경제적이고 뒤틀린 구조의 장소"의 실내극이다. 바깥에 있을 때와는 달리 건물 안에서 보는 창밖은 언제나 과한 햇빛 때문에 쨍하고, 유사쿠의 사무실과 연결된 창고는 대체 사무실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두 사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 직원 중 그 누구도 놀란 채 창고로 다가오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계란 말인가? 이 영화의 배경은 우리네 세계의 1940년 코베와 '정말로' 겹쳐지는 것인가? 여기서 갑자기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중일/태평양 전쟁이라는 맥락이 절대적이지 않은 게 아닐까? 중일/태평양 전쟁을 다룬 일본 영화의 계열에서 이 영화가 아주 도드라지는 작품임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설마 최후반부에서 사토코마저 조롱해버리는 급진성을 보여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네 역사에서 일어난 일에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접속시키는 독법은 글러먹었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영화잡지 《FILO》에도 번역 게재된 바 있는) 키요시와 하스미 시게히코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좌담에서 하스미가 시종일관 <스파이의 아내>의 반(反) 고증성을 지적한 것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731 부대 도큐멘트 필름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평론을 읽으면 굉장히 의아해진다. 사토코는 이 필름을 보고서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그 사토코가 "국제정치 그런 게 뭐에요, 그런 거 알 바 아니에요"라고 일갈한 사토코와 다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시되지 않은 걸 과장한달까? 작품 안에서 이 필름은 '그 자체로는' 열병에 가까운 강렬할 체험을 야기하기는커녕 극히 애매한 위상을 갖고 있다. 즉 그것은 계기이자 맥거핀에 불과하다. (물론 수전 손택의 사진론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다룰 해석은 아니다) 이쯤에서 키요시가 전쟁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흥미를 가진 것이, 전쟁윤리적 문제보다는 전쟁이 만드는 내외부의 철저한 구분, 그리고 그러면서 생기는 내부의 긴장아닐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내부의 긴장"? 영화의 제목대로 "스파이의 아내"라는 기표가 갖는 긴장, 곧 부부간의 관계성에 기인하는 외상.


큰 두 개의 장르적 축이 쿠로사와 키요시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고 지탱한다. 하나는 공포영화의 축, 다른 하나는 멜로영화의 축. 이 중 후자는 (일전의 표현을 쓰자면) "사랑이 근본적으로 폭력이라는 전제"로 발현되고 작동한다. 키요시의 영화에서 어떤 성공적인 로맨스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않던가. 2010년대 들어 <해안가로의 여행>이나 <산책하는 침략자>같은 작품들은 예외가 아닌가, 하고 당신께서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전자에선 애도의 여정의 완수와 사랑이 함께 간다는 , 후자에선 날카로운 단독 숏의 엔딩이 사랑의 탄생이야말로 침략의 시작이자 끝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또한 <여행의 끝...>에서도 요코는 연인과 끝까지 제대로 소통하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하여튼 사랑의 불가능성, 그것이 키요시의 작품에 내재된 근본문제 중 하나이다. 이전까지 그것은 키요시의 또 다른, 그리고 가장 전면화된 근본문제인 주체의 불가능성과 엮인 채 작동해왔다. 즉 '인물들이 배치된 세계가 어떻게 제 (압력에 가까운) 카오틱한 리듬으로써 인물들이 설정하고 추구하는 '그럴듯한' 리듬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바꿔버리며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던 인물을 최소한의 존재로 '복귀'시키는지(전염, 반복, 전도, 횡와)'가 지금까지의 키요시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모티프인 것이다. 그런데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사랑의 불가능성이 주체의 불가능성의 담보적 모티프(초현실적/범죄적 상황)를 경유하지 않고 느 때보다 그 자체로 전면화되어 있다. 요컨대 <스파이의 아내>에서 사토코가 추구하는 리듬, 기꺼이 유사쿠라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 리듬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도, 타이지도, 도큐먼트 필름도 아닌, 유사쿠와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서로의 감정들인 것이다. (이에 대해선 정성일 평론가가 《미스테리아》에 기고한 <스파이의 아내> 평론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안 읽었다) 우리는 불안을 증언하는 사토코의 꿈 씬을 쉽사리 잊어선 안 되며, 그리고 이를 직시해야 "걸작이야!(お見事でう)"의 그 장면, 아마추어 스파이 영화와 흰 스크린이 사토코를 말 그대로 '강타하는' 장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진정으로 브레히트적인 기예, 사토코의 전부를 (그 자신의 감정을 통해) 스파이 영화의 일부로 전도해버리는 충격적인 기예. (혹은 셰페르적 교훈?) 여기서 삶과 영화 사이의 구분은 폭력적으로 풀어져 버린다. 혹은 스파이 영화는 이제 참혹한 도큐멘트 필름처럼 보이게 된다. 사토코가 진정으로 미쳤다면, 사토코를 관계의 주인공으로 만들던 암흑이 완전히 걷히고 사랑의 불가능성이 전면화된 직후에도 "스파이의 아내"로서 '남들과 달리' 세상이 기여한다는 '황당무계한' 영화 속에 그가 여전히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일 게다. (여담이지만, 8K TV 드라마를 극장용으로 재편집/보정/압축하고 그걸 또 국내 표준 DCP로 상영하면서 종종 화면의 어두운 부분에 스크래치가 심하게 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재밌게도 이런 스크래치는 마치 사토코를 감싸주는 듯하던 암흑이 항상 사토코의 심리에 의해 왜곡됐던 것임을 암시한다는 '잘못된' 느낌을 준다)


자, 이제 어째서 이 두 편을 묶어 글을 썼는지 확실해졌다. 일견 현대와 근대, 로드 무비와 실내극이라는 서로 정반대 방향의 형식화를 향한 것처럼 보인 <여행의 끝...>과 <스파이의 아내>는,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지점에서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중첩되는 광경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연관을 갖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끝...>의 도박이 곧장 <스파이의 아내>의 결말로 향했다고 할 생각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후자의 각본을 쓴 건 하마구치 류스케와 노하라 타다시이다) 그렇지만 이 연관의 연장선에서 키요시의 이후의 영화가 또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 그것이 잔인하고 고약한 것일지 아니면 감동적이고 희망찬 것일지, 기대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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