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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l 05. 2021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은 다니자키 준이치로 얘기인데


민음사의 총서인 쏜살문고 출간 5주년 기념 매거진 《쏜살같이》에 「수상쩍은 발명품의 매력」이라는 제목의 글로 참여했다. 이 글은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에 대한 리뷰인데, 원래는 다니자키의 작품 중 영화화된 것을 꼽아 글을 써달라는 취지로 청탁이 왔으나 평소 타니자키 준이치로를 매우 흠모하던 나는 지 혼자 신나 욕심을 부려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가론, 보다 정확히는 다니자키와 영화 사이의 내재적인 공명의 관계에 대해 쓰기에 이르렀다. 나는 다니자키의 작품이 항상 '탐미주의'라는 실상 유명무실하게 사용되는 개념을 통해서만 호명되는 게 참으로 아니꼬왔고, 가능하면 그런 진부한 태도에 엿을 먹이면서 그가 그 당대의 '동시대인'(아감벤)임을 은연중에 역설하는 작가론을 쓰고 싶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한국어로 쓰인 것 중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해 재밌는 비평적/이론적 접근을 보여준 텍스트 자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주로 내 자아 안에서 일어난) 부침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작년에 쓴 글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이다. 물론 나는 내 글에 대해 충분히 객관적이기 힘들다만. 






""활동사진이 진정한 예술로서, 예컨대 연극, 회화 등과 동등한 예술로서 향후 발달할 전망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연극이나 회화가 영구히 사라지지 않듯이 활동사진 또한 불멸하리라고 믿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오늘날 도쿄 어느 극장의 연극보다도 활동사진을 훨씬 사랑하며, 그중 어느 부분에서는 가부키극이나 신파극과 견줄 수 없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다소 극단적일지도 모르나, 서영 영화라면 아무리 짧고 시시하더라도 현재 일본 연극보다 훨씬 재미있다."


감히 이리 단언하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하고 살펴보면 1917년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러니까 아직 "대다니자키(大谷崎)" 타이틀을 획득하기 이전의 젊은 모더니스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저 문장들이 포함된 「활동사진의 현재와 장래」를 포함해 「영화 잡감」, 「영화 감상 : 『슌킨 이야기』 영화화 무렵에」 등 작년 초 쏜살문고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마지막 책으로 발간된 에세이집 『음예 예찬』에 수록된 세 편의 영화 에세이에서, 우리는 저 도발적인 단언에 걸맞게 영화의 당대적인 위상을 짚(고 꼬집)으며 초기 영화의 성숙기이자 영화 이론의 첫 개화기에 ―1917년은 루이 델뤽이 본격적인 영화 비평을 시작한 해이며, D.W. 그리피스의 '말 그대로' 기념비적인 대서사시 〈불관용(Intolerance)〉의 일본 개봉은 아직 2년 후의 일이라는 걸 유념해주시길 바란다― 일찍이, 그것도 동아시아에서 영화의 미적 가치를 간파하고 거기에 투신한 예술가로서의 다니자키를 만난다."


"거리도 시간도 (그리고 이 이후에 알 수 있듯) 이성도 초과하는 불가능한 시선, 과잉을 넘어 초인간 내지는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주관적 시선 묘사. '소설의 시각적 전환'이라는 좁고 뻔한 역사적 분석 틀은 이 앞에서 무력하다. 이 광경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건 이 시선이 세이키치로부터 잠시 찢어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발을 포착하려는 의지로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율적인 힘을 얻은 세이키치의 시선은 그럼으로서 발을 고도로 세세히 포착할 뿐만 아니라 이 대상에 대한 세이키치의 심리를 '사로잡힘'으로 강제해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악마적인, 아니 아예 악마화된 응시."


"그렇다면 다니자키가 영화에 일찍이 매혹된 건 다름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에 이러한 영화의 성질이 강렬히 동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문신」의 세이키치를 비롯한 다니자키의 매저키스트들이란 모두 자기를 넘어선 응시로 인해 마주친, 생경함을 간직한 (지극히 비-유기적인 몸의) 이미지에 완전히 사로잡힌 이들이자 바로 그로 인해 피학 성향을 지닌 자신을 마침내 발견하고 발현하는 이들이다. 다시 다니자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평생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인간의 용모나 육체의 각 부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채 새삼스럽게 다가옴을” 너무 강렬히 느껴 도착의 수준에 이른 이들."


"그 점에서 다니자키는 흔히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윤리학적인 소설가라 해야한다. 다만 교훈적이지 않을 뿐."










~이 아래부터는 글을 읽은 분들을 위한 파편적인 후기~








(공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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