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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Jun 10. 2021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뒤적거려보는데


영상비평지《마테리알 5호에 '시리즈의 감각'이라는 특집 기획의 한 꼭지를 맡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이란 제목의 짧은 글을 썼다. 《마테리알 측의 표현에 따르면 이 특집 기획은 OTT 서비스의 성장에 따라 "갈수록 독특하고도 고유한 감각을 갖춰가는 듯"한 '시리즈'란 개념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마련되었다. 헌데 내 글은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를 주요 텍스트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본 기획의 의도에서 조금 벗어난 글이기도 한 것 같은데, ―다행히도, 내가 방기한 지점을 다른 필자들이 열심히 논해주었다― 나는 이런 '시리즈'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TV 드라마에 대해 상세히 건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드라마의 '고품질'화(라는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TV-)드라마가 20세기의 이미지 생태계에서 역사적으로 맡은 역할과 그로 인해 영화와 맺게 된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원동력이 된 정동(!)에 대해 논하게 된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영화의 운명'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하면서 항상 좁은 의미에서의 '영화'의 관점에만 서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오랜 불만이 이 글을 '이렇게' 만들었다. 아래는 글의 링크다. 






"ARRI Alexa LF라는 카메라가 있다. LF라는 이름대로 35mm 풀프레임보다 조금 더 큰 라지 포맷 센서를 탑재하고 있어 얕은 심도, 넓은 화각의 화면을 구현하는데 아주 용이하고, 화면이 빛의 양에 따라 뭉개지는 것을 방지하는 명확한 HDR과 WCG도 갖추고 있으며, 또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 '공식' 아이맥스 카메라가 아님에도 아이맥스 인증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재 상용화된 촬영용 디지털 카메라 중 꽤 고급에 속하는 기종인 것이다. 현재 공개된 작품 중에선 <만달로리안>, <포드 v. 페라리>, <백두산>이, 공개 예정인 작품 중에선 <기묘한 이야기> 시즌 4, <듄>, <이터널스>가 이 기종으로 촬영되었다. 왜 카메라 소개로 글을 시작하고 있느냐, 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스위트홈>이 Alexa LF(와 ARRI의 시그니처 프라임 렌즈)를 사용한 국내 첫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드라마가 영화를 닮고 싶어한다는 말은 더 큰 상황을 지시할 수 있지 않을까. <스위트홈>은 어쩌면 그 (기점은 아니나) 주요 사례 중 하나로 우리네 역사에 등장한 게 아닐까. 물론 제작 환경의 하이-테크화에 따라 <스위트홈>에서 '영화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마치 흔해빠진 게으른 기자들처럼 말할 생각은 아니다. (여기서는 빈곤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경우, 나아가 '영화적'인 것의 궁극적인 정체에 대한 규명은 일단 차치하자) 그러나 <스위트홈>에서 그것이 '영화적'인 것이 된다고는 생각한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예컨대 1950년대 미국에서 그러했듯) TV의 대중화에 물량 공세로 대응한 (극장-)영화의 시도에 의해 외려 명확해졌던 것이지만, TV의 역할이란 일차적으로는 영화가 바야흐로 (아주 부르주아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위상을 얻으면서 내친 '적당히 덜 예술적'인 장르들(뉴스, 스포츠 이벤트, 오락, 광고, 교육적 목적의 영상 등)을 위한 창구가 되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극장, 필름, 시차 등 시네마토그라프 모델의 '장치', 혹은 '영화적'이라 할 만한 미장센/몽타주가 느슨해지거나 거의 소진된 상태에서도 영화(적 이미지)가 충분히 성립 및 유통 가능함을 극히 범용한 방식으로 폭로하고 표준화(...)하는 것이었다."












~이 아래부터는 글을 읽은 분들을 위한 파편적인 후기~










아마도 글의 후반부가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당신께서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느낌은 아주 타당한데, 왜냐하면 정말 그렇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마테리알 측에서 제안한 분량을 넘지 않으려 최대한 필요한 얘기들만 욱여넣으려 하다가 후반부에서 조절을 잘 못한 내 잘못이다. 가령 도상적 층위에선 연속선상에 배치되곤 하나 기술적 성립 과정에 있어 TV는 영화와 달리 라디오, 진공관, 레이더 기술 등 온갖 전자공학의 연합에 의해 탄생하고 발전했다는, 즉 두 이미지는 다른 계열에서 출발해 지금처럼 마주쳤다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지적을 주의깊게 거론하며 (예전의 나를 베끼자면) "'기존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하나로 뭉뚱그려지긴 하지만 미적 전략과 영향 관계에 있어 겹쳐지지 않는 영토들'과 '미적 전략과 영향 관계에 있어 겹쳐지지 않지만 기존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영토들'은 동등한 문제"라는 걸, 또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에선 '남한에서 TV 드라마의 위상'과 '드라마에 대한 영화의 르상티망'을 함께 논해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고다르 식으로 (약간 고약하게) 말하자면, 이미지 생태계에 있어 코로나 19는 그런 열망을 확실히 승인하기 위해 도래한 파국은 아닐까? 당연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 비관도 낙관도 없이 말하는 중이다." 역시 맥락에의 부연이 없어서 너무 뜬금없다. 이런 지점들은 많이 아쉽다. 이 글이 단행본의 프롤로그처럼 보인다는 한 지인의 말도 실은 그런 맥락의 지적일 테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은 굉장히 힘겹게 쓴 글인데, 글의 문제 설정이 난해하거나 독특해서가 아니라 내가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대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 원래 이 글의 첫번째 버전은 '영화에 대한 드라마의 르상티망의 흔적으로서의 '영화적'이란 수사'를 큰 주제를 갖고 드라마가 영화를 무어라 여기고 있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는데, 글이 진행될 수록 나의 논점은 이 방향에서 벗어나 "TV가 20세기의 이미지 생태계에서 역사적으로 맡은 역할의 변화"를 중요하게 다루는 쪽으로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첫번째 마감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서야 이런 변화를 알아차렸다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글의 첫번째 버전을 완전히 폐기한 다음 새 주제를 갖고 부랴부랴 처음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번째 버전의 1고가 아주 뒤늦게 나왔고, 그걸 정리하고 또 이런저런 표현을 바꾸면서 현재의 글이 완성됐다. 당시에 봐도, 지금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드라마/예능 같은 대상을 흔한 영화 평론가들에게도, 이른바 (대중-)문화 평론가들에게도, 서구의 TV 평론가들에게도 마냥 맡겨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TV 장치에 근간을 둔 텍스트들을 생각할 때, 뛰어난 대상들 혹은 허접한 대상들을 선별해 -사실 둘은 같은 행위이다- 그것들 위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통속적인 사회적 프레임이나 지젝 등의 거물이 세운 도식에 거의 눕다시피 의존해 이를 반영하(기만 하)는 매개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다른 양식들과 완전히 차별화된 것으로 세우려는 욕심을 부(리면서 실은 이미 확립된 고전적 가치체계에 기대)려서도 안 될 것이다. 아주 순진하게 접근해보자. (캐롤라인 레빈을 따라) 드라마/예능의 시스템도 모종의 미적 형식이다. 이 말은 제도비판의 방식으로 발음되어선 안 될 테다. 



"TV의 대중화"라는 표현을 쓰면서 문득 이 표현에 대한 (알튀세르에 기대는) 긴 각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중화"란 단지 '널리 퍼졌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축소적인 기능, 즉 범용성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단적인 예로, TV에서 이른바 성인물이 '전파를 탈' 수 있게 된 건 여러 국가에서 법적으로 케이블 채널 설립의 문턱을 낮춘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그 이전까진 TV로 볼 수 있는 채널의 갯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 문화권이 절대 다수였으며, 심지어 북/동유럽권의 국가들은 컬러 TV가 아동의 모방심리에 큰 영향을 행사하리라 판단해 80년대 초입까지 컬러 TV의 표준화를 억압하기도 했다. 기존의 문화에 대한 심의와 검열은 사라진 게 아니라 제 자리를 조금씩 옮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더 많은 '사건'들이 공공연한 이미지로서 유통될 수 있게 된 때에 TV는 그 이데올로기적인 반작용으로서 유통의 구획을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데리다가 TV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철저한 사전 준비로 인한 '인공적 현재성'으로 규정한 것이 문득 떠오른다) TV의 역설적인 위치에 대해, 나아가 역사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진실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마테리알 5호가 발간된 직후 이 글을 다시 찬찬히 읽다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몇 달간 쓴 글이라 드는 기시감이 아니라, 다른 어디선가 본 것과 유사한 화법이나 논리를 발견하는 기시감. 나는 조영일 평론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존재방식으로서의 르상티망' -물론 그는 르상티망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거의 없지만- 을 논한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여튼 나는 그런 사고를 우리에게 일러준 이들 중 가장 가까운 이인 조영일 평론가를 계속 떠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문득 다른 생각으로 또 가지를 뻗쳤는데, '왜 문학장 바깥에서 조영일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전보다 늘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건 유운성 평론가가 좁은 영화비평장 안에서 덜 언급되고 호명되는 이유와 얼마나,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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