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개인의 차원에서든 일의 차원에서든 국내외 정세의 차원에서든 정말이지 길고 힘들고 ㄹㅇ 칵 길거리 한복판에서 할복자살하고 싶던 2025년이 이제사 일단은 지나갔다. 하고 싶은 말은 지나치게 많지만 당신도 나도 그러기엔 너무 지치고 귀찮으니 넘어가고... 짧은 글 발표, 강연, 기획 등 비평가로서 활동한 내역을 여기에 정리해 적어본다. 스압 심하니까 각오하시길. (늘 그랬듯 '의무방어전' 느낌으로 북토크나 영화제에 참여한 것, 그리고 비공개적 업무 등은 셈하지 않았다)
몇몇 동료들과 함께 작업실 겸 상영공간 키니마를 열었다. 오랜 친구인 한상희 씨의 제안으로 참여하게 됐다. 나로서는 작업실이 생긴 것도, '동종업자'들과 하나의 단체로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올해는 거의 키니마 일에 스스로를 꼴아 박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전력을 다 했다. 스크리닝 프로그래머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자질구레한 업무에 있어서도 말이다. 물론 전력을 다 했다고 해서 늘 만족스러운 결실만 맺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몇몇 멤버들이 변경되기도 했고, 이사와 같이 황당하고 갑작스러운 문제들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돌아보자면,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더 유연하고도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새로 만날 수 있었고 또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적당히 대하는 법을 익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렇게 착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서 이러고 있는 걸지도... 그렇지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키니마 업무에 열심히 임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여튼 아래는 키니마의 소개문이다. 말투만 봐도 알겠지만, 내가 썼다.
"'움직임', '사회 운동', '쿠데타', '예술 사조' 그리고 '영화' 등을 의미하는 현대 그리스어 낱말(κίνημα)에서 이름을 따온 키니마는, 초기~고전기 영화와 동시대 무빙이미지 작업 사이의 링크를 탐색·생산·공유하고자 하는 공동의 의지로 설립되었습니다.
키니마의 목표는 그저 좋은 영화를 함께 잔뜩 보는 것도, 영화 관람 및 독해의 특정한 방식을 오늘날에 연명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최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영화와 (영상미술과 스마트폰 속 이미지를 포함한 광의의) 무빙이미지를 공통의 지평에서 사유하려는 시도는 분명 많지만, 정작 양자를 어째서/어떻게 공통의 지평에서 사유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충분히 제시한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합니다.
하여 키니마는 정기적인 상영회와 학술적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초기~고전기 영화와 동시대 무빙이미지 작업 각각의 역사성과 유효성, 그리고 관계성을 함께 탐구 및 유포하고자 합니다. 링크에 링크가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영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확고히 기대해봅니다."
키니마의 첫 일정이자 스크리닝 기획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근작 <2번 배심원> 특별상영을 진행했다. 2020년대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아야 마땅한 수준의 작품을 (한국은 물론이고 사실 미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여러 국가들에서도) 극장 환경에서 볼 수 없다는 게 몹시 불만스럽기도 했고, 이 영화를 (세 차례에 걸쳐 반복)상영하고 이에 대한 멤버 전체의 글을 담은 리뷰 페이퍼를 배포하는 게 키니마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리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첫 일정이었어서 그런지, 접객 및 상영 준비에 많이 익숙해진 지금 돌아보면 많이 부족하고 퍽 부끄러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이 굉장한 영화를 여러 관객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은 상당했다. 아래 링크는 특별상영용 리뷰 페이퍼를 위해 준비한 나의 리뷰 「니콜라스 홀트로부터」이다.
"나는 니콜라스 홀트를 좋아했다. 보다 정확히, 니콜라스 홀트에게 꼴렸다. (내 또래 퀴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청소년 시절에 영국 드라마 <스킨스> 시즌 1~2의 토니로서 처음 만난 그는 당시(만이 아니라 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내가 좋아하던 '뼈말라 미치광이 미소년' 상에 정확히 부합했기에 금방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는 점차 필모그래피를 전부 꿰는 건 물론이요 사진을 잔뜩 프린트해 수집할 정도로 홀트에게 빠졌었다. 하나 얼마 못 가 그에게서 순식간에 멀어졌는데, 이는 그가 <엑스멘> 프리퀄 시리즈나 <웜 바디스> 등의 후속작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너드스럽게(nerdy) 또 괴짜스럽게(geeky)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너드도 취향이긴 하지만, 문제는 다른 차원에 있었다."
"그런데 왜 힘겨운가? 자기 주변의 모든 사건과 정보를 힘겹게 흡수하면서 이에 등가적인 반응은 절대 배출하지 않으려 버티기에 힘겨운 것이다. 달리 말해, 이스트우드와 홀트는 교환으로서의 몽타주를 유예하는 '인간적' 이미지의 한계치를 체화하는 (고대 그리스-)비극적 캐릭터로서 저스틴을 구축했다. 그런 저스틴이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어둠뿐이다. 집에서 3번 정도 불을 끄고 어둠을 불러들이는 앨리슨, 그리고 점점 그 어둠에 순응하며 집 바깥에서도 거기에 파묻히곤 하는 저스틴. 즉 저스틴은 주체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아예 지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 강렬한 어둠이 등장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어둠 속에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려 드는 캐릭터가 등장한 건 처음이 아닌가?)"
키니마에서 영화감독이자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권희수의 작업 중 '영화의 계열에 맞닿은' 8편을 묶어 선보인 특별전 <무한한 경계>를 개최했으며, 나는 이 기획의 프로그래머를 맡았다. 가능하면 권희수의 작업을 한데 모아서 쭉 보고 듣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과, 권희수의 작업이 요청하는 환경을 직접 꾸려보고 싶다는 비평가로서 욕심을 함께 밀고 나간 결과였다. 그런 환경을 꾸리기 위해 나와 권희수 그리고 키니마의 멤버들이 함께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고 고생했다. 완전한 암전을 구현하기 위해 매일매일 강박적으로 미세한 광원까지 찾아 마스킹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고, 강력한 소리가 민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다른 입주자들에게 몇 차례씩 인사를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벽한 환경이 매번 꾸려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쩌다보니 <몬순>을 '상영'할 때엔 퍼포먼스도 맡았다(뭔 퍼포먼스인지는 직접 관람했던 분들한테 물어보시라). 하필 3월에 혼란한 정국은 물론이요 만화비평모임 <타카노의 뒷모습>과 <〈사랑은 비를 타고〉 거듭 새로 보기> 강의 그리고 <무한한 경계>의 준비 및 진행 일정까지 심하게 겹쳐서, 결국 이 한 달 동안은 정말로 수액과 폭식에 기대며 겨우겨우 살아냈다.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고 고생했다.
그렇지만 이 고생 만큼 많은 걸 새로 배우고 익힐 수 있었기에 정말 기쁘기도 했다. 가령 대다수의 큐레이터들은 이 정도 고생도 안 하고 매번 징징거린다는 걸 알게 된 거라든가, 키니마의 개성은 유동성과 산만함을 내세우는 데에서 나올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은 거라든가... 또한 내가 운영 주체로 있는 공간에서 이 근사한 작업들을 상영한다는, 그리고 이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온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과 만족감도 상당했다. 어쩌면 최근 ‘마이크로시네마’(나는 이 말이 정말 싫다)의 유행은, 이런 감정을 느끼려는 목적과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뒤섞인 결과물은 아닐까. 하여튼 고생과 보람이 함께 가득한 3월이었다. 아래는 차례대로 <무한한 경계>의 프로그램 노트, 리뷰, 그리고 3월 23일에 이루어진 권희수와의 대담 녹취록이다.
"유시형의 영화가 흔들리는 빛의 향수 어린 연무를 보여준다면, 권희수의 영화는 끝없이 변모하는 빛들의 공격적인 난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난투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다. 영화(의 매체)는 재현의 수단이 아니라 재현의 대상이 되며, 빛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 무언가가 되고, 이미지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는 관능적으로도 느껴지고 공포스럽게도 느껴지는데, 그 속에서 권희수는 이미지의 가장 근원적인 잠재태를 보고 또 듣고자 한다. 무한한 감각, 무한한 접속, 무한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이미지. 거꾸로 말하자면, 권희수의 영화를 보고 또 듣는 것은 그러한 이미지에 감각을 과감히 개방하는 일인 것이다."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드는 것에 비례하여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영화는 각 요소들의 미세한 조정에 의해서도 심하게 변화하거나 기형이 된 이미지를 산출할 수 있다. 줄무늬 패턴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할 때 이미지가 깨지는 무아레 현상이나, 상영 중 영사기 앞을 지나가면 스크린이 아예 깜깜해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이때 일반적인 영화가 이러저러한 조건과 과정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권희수는 거꾸로 뒤집어 받아들인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과정의 결합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변화하거나 기형이 된 이미지를 조건 삼아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그는 줄기차게 영화의 요소들을 영화의 매개변수로 치환해 본다. 달리 말해 영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에 매번 달리 조정을 가하면서 그럼에도 영화가 성립될 수 있는지, 혹은 영화가 어느 수준까지 변형 및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의 매체)는 재현의 수단이 아니라 재현의 대상이 되며, 빛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 무언가가 되고, 이미지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렇게 권희수는 영화의 발생론적 차원을 건드리며 이를 다시 영화로써 충실히 소화해 본다. 변화하거나 기형이 된 이미지로 영화를 만들 방법을 궁리하는 걸 넘어, 그런 이미지들(에 내포된 경험)에 적합한 영화(적 체계)를 구축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
윤석열 탄핵 심판 선고 기일이었다. 동네친구이자 동료인 권구윤 씨와 함께 헌법재판소 앞 광장에 나갔다. 오전 8시 즈음에 도착해서 그런지 퍽 한산했다. 밤을 지새우고 나왔지만 피로는 긴장감에 압도되었다. 초조함과 함께 근처를 거닐며 구윤 씨와 무거운 수다를 떨었다. 배가 고파 근처 노점상에서 어묵을 사먹으려 했는데, 사장님이 그냥 나눠주고 있는 거라며 어묵 두 꼬치를 건네주셨다. 사람들이 조금씩 차기 시작해 괜찮은 자리를 잡으려다 보니 얼떨결에 폴리스라인 바로 앞 쪽에 앉게 되었다. 햇볕에 눈이 부시고 온 몸이 달궈졌다. 나눠 받은 피켓을 부채와 햇빛 가림막으로 썼다. 같은 시간 키니마의 동료 일부는 상영 공간에서 선고 생중계를 보았다. 내가 제안한 건데 내가 빠져서 아주 조금 미안했다. 당연하게도 여러 친구들이 광장 곳곳에 있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당장은 만나기 어려웠다. 오전 11시부터는 들려오는 말 속에서 연신 경탄을 내질렀다. 오전 11시 23분 즈음에는 구윤 씨를 포함한 주위의 (잠깐의) 동지들과 더불어 손을 맞잡고, 얼싸안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광장을 빠져 나오며 곳곳에 있던 친구들 몇몇과 잠시 격한 포옹과 인사 그리고 이후의 투쟁에 대한 걱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우정의 순간은 따로 있다. 광화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혼자서 골목길에 있었는데, 문득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았다. 머리에 무지개 밴드를 하고 윤석열 퇴진 피켓을 손에 든 (함부로 패싱하자면) 중년 여성.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던 그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곧장 굳은 표정으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주먹을 부딪히는 것으로 화답했고, 그는 환한 미소로 다시 화답했다. 곧이어 우리는 서로의 일행과 함께 흩어졌다. 분명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면 다시 만났을 때엔 서로를 적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우정의 순간은 내게 평생 음미하고픈 대상이 되었다.
쪽프레스에서 『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 - 1943~1983 인터뷰집』 번역 출간을 준비했고, 연계행사로 출간 기념 북토크를 하자고 내게 제의해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책 출간 이전에 『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의 적당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강연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로베르 브레송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엄청나게 많고, 쪽프레스 측에서 먼저 공유해주신 책의 가편집본을 읽으며 감명을 받기도 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여 "사업가 로베르 브레송"이란 제목의 강연을 준비했다. (원래는 "장사꾼 로베르 브레송"으로 가려고 했는데 반대에 부딪혀서 바꿨다...) 책 안에서도 적잖이 드러나는, "영화 장사에 있어서도 아주 흥미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으로서 브레송을 조명하며 그를 당대와 동시대 영화계의 경제 상황에 리맵핑하려는 시도였다.
꽤나 열심히 준비했고 모객도 잘 됐는데, 책의 출간에 문제가 생겼다. 책 제작 준비를 마쳤는데 로베르 브레송의 과부이자 책의 저작권자인 밀렌 브레송으로부터 피드백과 컨펌이 하염없이 지연된 것이다. (혹시나 싶지만 오해 ㄴㄴ 쪽프레스 측에서 사유를 공개했음) 계획된 일정이 임박했는데도 확답이 오지 않아 결국 출간과 북토크 모두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밀렌 브레송은 책에 도판을 대거 추가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영화 장면들을 고르고 또 골랐었다고 한다) 책은 시간이 좀 지나 6월에 출간되었지만, 이 즈음에는 내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북토크 날짜를 곧바로 다시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 이 시점에선 어영부영 백지 계획이 되어버렸다... 상당히 아쉽고 아쉽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이때 준비한 얘기들을 써먹을 수 있겠지.
"초월적인 영화 혹은 완벽주의적 예술관같이 알려진 말 만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브레송의 사업가적 면모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브레송은 뛰어난 시네아스트이자 뛰어난 영화이론가인 동시에 영화 장사에 있어서도 아주 흥미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예산과 필름을 확보하는 방법, 소규모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방법, 영화를 홍보하는 방법 같은 지점을 다룸으로서 이 시대 소규모 생산자-창작자인 우리들의 현실적인 생활에도 책의 도움을 받아보고자 합니다."
KMDb의 (당시로선) 새 연재 코너 'More Than 라이브 액션'에 「애니메이션과 멀티버스」란 글을 실었다. 여기서 나는 "어쩌면 멀티버스란 컨셉트는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스파이더버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릭 앤 모티>, <톰과 제리>, <내 주머니 속의 돌들>, 그리고 <팝 팀 에픽>을 숨가쁘게 건드리며 멀티버스의 성질에 대한 애니메이션 자체의 묘한 친연성을 논해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큰' 이야기를 서둘러 스케치만 하고 넘어간 듯해서 좀 아쉬운 글이다. 마치 어떤 책의 간단한 리뷰를 쓴 것처럼 느껴진달까. 하지만 중요한 인상을 적당히 정리했다는 점에서 퍽 재밌긴 한 것 같다.
"당연하게도 이런 픽션적 허용은 〈톰과 제리〉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팬덤에서 '사자에상 시공'이란 용어가 뿌리 깊게 박혀있듯, 시간에 흐름에 따라 계절이나 통신 기기의 변화는 묘사하되 캐릭터의 나이처럼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묘사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우직하게 지속하는 경향을 우리는 여러 초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번번이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게게의 키타로〉(1968~), 〈심슨 가족〉(1989~), 〈크레용 신짱〉(1992~), 〈명탐정 코난〉(1996~), 〈네모바지 스폰지밥〉(1999~)... (이에 더해 본편에 대한 평행우주로 ‘일단’ 취급되곤 하는 극장판까지 셈해보자) 계속해서 '갈아 치워지는' 타겟 시청자층과, (성우의 노화, 그림체의 변화, 해상도 포맷의 변화 등을 제외한다면) 영구적으로 같은 외양의 극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는 표현성 등 애니메이션 특유의 문제계가 여기에 큰 몫을 한다. 이런 경향은 누적된 에피소드들 사이에 중대한 모순을 야기하면서 절대 해소하지는 않기 때문에 종종 몹시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때 국내에서 유행했던 '짱구 자폐증 괴담'은 이런 기묘함을 음모론으로 확장한 결과였을 게다― 이 느낌은 멀티버스를 직면할 때의 (가정된) 당혹감과 어느 정도 유사할 것이다."
쪽프레스와 함께 하는 만화비평모임의 여덟번째 프로그램 <모로호시의 뒷모습>을 기획 및 진행했다. 한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일본의 호러만화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적어도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덜 읽힌 작품들을 함께 읽고 논하는 작가 스터디 겸 비평 워크숍으로, 올해의 무시무시한 한여름을 관통하며 이루어졌다. 서브컬쳐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손지상 씨를 오프닝 렉쳐 강사로 초청했는데, 역시나 그답게 참으로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관점을 잔뜩 펼쳐주셔서 참 보람찼다. (가령 '기'와 '괴'라는 키워드로 모로호시의 방법론을 정리한 것이라든가) 중간중간 함께 만담을 한 것도 재밌었고 말이다. 이번에는 참여를 강하게 희망하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결국 역대 최다 인원인 25명과 함께 모임을 진행했는데, 이 때문인지 진행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진 못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는, 진행에만 급급해서 멤버들의 의견을 잘 정리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드리는 일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물론 이번에도 흥미진진한 의견들을 열성적으로 개진하고 나누어주신 멤버들 덕분에 보람차고 즐겁긴 했지만, 이런 아쉬움은 못내 남는다. 하여튼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눠주시거나 귀한 자료를 공유해주신 멤버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모로호시의 뒷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예정이다...
친구들과 함께 이쁘게 치장하고 서울 퀴어 문화축제에 갔다. 이건 그냥 예쁘게 사진 찍힌 거 자랑하고 싶어서 올린 거다. 개인적으론 2014년 신촌에서 열린 서울 퀴퍼 이후 가장 (즐겁게라기 보다는) 열심히 놀았다. 참고로 14년 퀴퍼는 혐오세력의 방해가 극에 달해 모든 행사가 밤까지 지연됐던 '역사적인' 퀴퍼였다 ㅋㅋㅋ 솔직히 올해 내내 울화가 터질 듯한 일이 많았고, 그만큼 이 시기에도 존나 힘들고 지치고 슬프고 우울해서 그냥 퀴퍼도 안 가고 모두에게서 잠적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리고 그러지 못해서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래도 가서 좀 놀고 오니 약간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물론 개우라질씨발느자구없는2025년답게 바로 며칠 뒤에 대형사고가 터지긴 했지만 ㅎㅎㅎ ㅎㅎㅎㅎ ㅎㅎㅎㅎㅎ ㅎㅎㅎㅎ
자주영화상영회에서 일본의 영화 제작 및 배급사인 우즈마사와 공동주최로 인디스페이스에서 히지카타 테무진의 1975년작 <실록 달걀 운반인 경시청 습격>과 아다치 마사오의 2025년작 <도주>(2025년)를 이틀에 걸쳐 동시상영하는 기획을 꾸렸다. "1970년대를 살았던 한 젊은이를 다룬다는 공통점"에 따라 두 영화를 함께 묶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기획을 위해 <도주>를 구심점 삼은 아다치 마사오 작가론을 요청 받아 「아다치의 대면」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썼다. 여기서 나는 아다치의 영화에서 '대면'의 제스쳐가 기이하고 강렬한 모티프로 활용되어왔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도주>를 비롯한 (아다치의 일본 송환 이후 제작된) 21세기의 영화들에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간단히 논해보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아직 글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는데, 아마 차후에 자주영화상영회의 사이트에 공개될 것 같다.
"생각해 보자. '투쟁'과 '풍경론' 같은 키워드에 거리를 두면서도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삶의 큰 부분을 PFLP(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일원으로 지내며 직접 아랍권의 무력투쟁을 지원했던, 혹은 (극단적 동질화를 수반한) 권력 효과로서 풍경 이미지를 논한 풍경론의 주요 제안자 중 하나인 그의 궤적을 알면서도? 물론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할 터인데, 아다치 자신이 말했듯 "정치와 매체를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 취급하며 괄목할 만한 성취를 내놓은 예술가에 있어 이런 시도에는 ‘굳이?’란 말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굳이 '투쟁'과 '풍경론'에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은, 그의 신작 <도주>(2025)를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다치의 영화에서 대면이란, '개인'과 '타자'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지워지는 것보다는) 흐릿해지거나 유동화되는 순간과 그에 따른 소외의 감각을 묘사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이 양극에 각각 자아’들’의 분산과 싸움을 (일본식) 환상문학적으로 소화한 <은하계>와, ‘타자’들을 동질화하는 풍경의 가시성을 기민하게 폭로한 <약칭 연쇄살인마>(1969)가 있다고 해야 하리라. 어쩌면 '풍경론'과 같은 그의 ‘미학적 정치’의 입장은 사실 여기서 출발하며 또 성립되는 것은 아닐까?"
키니마에서 7월 납량특집 프로그램 <언캐니 키니마>를 개최했다. 두 개의 행사로 나눠 19일에는 블라인드 상영회를, 26일에는 강연을 준비했는데, 나는 이중 후자를 맡아 대중음악평론가 나원영의 「썩은 인터넷 가설」 강연을 기획 및 진행했다. 나원영 씨가 2022년에 첫 책으로 2010년대 온라인 호러에 대한 비평서 『대체 현실 유령』을 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고작 3년(혹은 5년) 사이에 너무 많은 게 변해버렸다. 온라인 호러 자체에 있어서도, 이를 둘러싼 환경에 있어서도 말이다. 나는 이른바 '뇌썩음(Brain Rot)'의 시기 ―물론 요즘답게 이 말도 벌써 시들해진 감이 있다― 에 『대체 현실 유령』의 논의들이 어떻게 유효(하거나 수정되어야)할런 지 궁금했고, 하여 그에게 이런 고찰을 담은 강연을 요청했다. 마침 나원영 씨 역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상당히 갖고 있었고, 또 《마테리알》에서 비슷한 주제로 연재 청탁을 받기도 하셨기에, 연재의 사전 발표 자리로 강연을 꾸리는데 합의하여 준비에 순조로이 임할 수 있었다.
당신도 아시듯 올 여름은 진짜 칼부림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개덥고찌고씨발힘들었는데, 강연 당일에는 더 심했다. 그래서 원래 만석이었는데 예약한 청중 중 4분 정도가 너무 덥다는 이유로 불참하셨다. 솔직히 진행자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그랬을 거다... 하 씨발 하여튼 강연은 역시나 흥미진진하고 유익했으며, 나원영이 현재 그리고 있는 비평적 좌표를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청중들의 반응과 질문도 좋았다. 그날 뒤풀이에서 나원영 씨와 함께 아주 고양됐던 기억이 난다. 앞서 말했듯 본 강연의 원고는 후일 《마테리알》 온라인 홈페이지에 연재되었으니 읽어보시기를 강하게 권한다. 그리고 나원영 씨의 강연 후일담은 그의 블로그 일지를 참조하시라.
"『대체 현실 유령』의 연재 및 출간 이후 3년. 2020년대의 첫 절반이 헐레벌떡 끝나버렸고, 한때 웹에서 느꼈던 ‘시계열의 혼란’은 어느새 다른 감정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무력감과 낭패감, 아니면 권태와 분노, 무엇보다도 미칠 듯한 답답함. 아아, 2020년대 상반기의 웹은 너무나 피곤하고 지겹기에 그지없습니다.『대체 현실 유령』의 강연인 〈썩은 인터넷 가설〉은 후일담의 시점으로 여러 온라인 호러 영상을 시청하며 근과거와 동시대 웹의 ‘로어화’가 부패하는 과정을 이르게 되돌아봅니다. 9:16짜리 숏폼 모음집과 8시간짜리 트위치 스트리밍, 생성형 인공지능과 부정선거 음모론, 오물(slop)과 뇌썩음(brain rot)으로 범람하는 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썩은 인터넷 가설〉에서는 독자들과 함께 2020년대 웹에 대한 감상과 감정을 나누며 애초에 ‘창 너머’가 있기라도 한 지를 함께 짚어보고자 합니다." (글: 나원영)
올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이었다. 이를 맞아 키니마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진행 당시 제작 및 개봉한 영화들 중 제2차 세계 대전의 국면을 다룬 극영화 16편을 골라 상영하는 기획전 <전시의 영화들>을 개최했으며, 나는 이 기획의 프로그래머를 맡았다. 해외에는 종전 80주년을 맞아 이런저런 기획전을 하는 곳들이 좀 있었는데 한국은 별다른 기획이 이뤄지지 않길래 냅다 밀고 나갔다. 프로그램 준비에 상당히 야심차게 임했는데, 영화도 다양하게 고르고 기간도 그만큼 길게 잡고 세 편의 영화 자막을 제작하고 시네토크도 2개(하나 맡아준 정산하 씨께 thx) 준비했다. 이 시기에도 참 안 좋은 일들이 겹치고 날도 여전히 더워서 기분이 쭉 존나 안 좋았는데, 다행히 많은 관객분들이 찾아주시고 또 호응도 해주셔서 종종 기뻤다. 그냥 8월은 일 하는 거 빼고는 삶에 거의 재미가 없는 기간이었다... 아래는 차례대로 <전시의 영화들>의 프로그램 노트, 리뷰, 그리고 8월 30일에 이루어진 시네토크 "우리가 보지 못한 전장"의 녹취록이다. 이 기획전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여기에 거의 다 털어놨으니, 흥미가 동한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다사다난한 20세기에서도 가장 다사다난한 시기를 꼽는다면 단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일 것이다. 지구 전체로 확장된 전쟁, 총동원된 인력·기술·문화, 과격하게 재편된 세계 질서. 그리고 20세기 문화의 주역 중 하나인 영화는 이 시기를 제대로 관통하며 (몹시 양가적인 의미에서) 제 역할을 해냈다. 그런데 영화가 ‘어떻게’ 그러했는지에 대해 (최소) 80년 후의 우리는 잘 (아는 걸 넘어) 느끼고 있는가? 이 질문을 나누고 돌파할 기회를 갖기 위해, 키니마는 이 시기에 서로 다른 전선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함께 보고자 한다."
"영화와 전쟁, 이 사이에는 께름칙하고도 흥미진진한 관계가 있다. 물론 전쟁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인류에 있어 전쟁의 영향이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온전히 쏠리지 않는, 몹시 다중적인 양상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유럽의 근대적 제국주의가 문자 그대로 폭발한 시기에 태어나 이런저런 전쟁들과 끊임없이 연관을 맺어온 영화는 그 양상이 특히나 독특하다. (...) 즉 여기에는 기꺼이 전쟁에 임하는 이들도 있고, 어쩌다 보니 전쟁에 휘말린 이들도 있으며, 전쟁 속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의 행보를 통해 대전쟁이라는 매혹적이고도 위험천만한 제재(題材)와 고군분투하며 모종의 표현 양식으로서의 자신을 구하려 한 영화 자체도 있는 것이다. (...) 이렇듯 영화는 늘 위험한 욕망을 새 연료로 삼는다. 요컨대 영화에 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은, 전쟁의 매력과 고통을 함께 영화의 것으로 정련한 역설의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 시네토크 제목은 ‘우리가 보지 못한 전장’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여러분 보통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하면 떠오르는 게 어떤 작품인가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밤과 안개>, <덩케르크>, <전장의 크리스마스> 등 거론됨) 자, 그럼 다른 질문을 드려볼게요.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하면 떠오르는 게 어떤 작품인가요? (<1917>, <영광의 길>,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 거론됨)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둘을 비교하면 1차 대전 영화가 좀 마이너한 편이죠? 이런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해봅시다. 왜 영화에 있어 1차 대전은 2차 대전에 비해 덜 조명되거나 덜 주목받나? 그러니까 무엇이 2차 대전을 더 ‘영화적인’ 사건으로 만드냐는 겁니다. 사실 이건 "영화에 있어"라는 단서를 빼도 말이 되는 의문이긴 합니다만, 하여튼 우리는 영화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니 이 의문에 따라보도록 합시다."
"이번에 저희는 전투의 스펙터클, 전투의 액션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영화들을 거의 틀지 않았습니다. 물론 굉장한 전투 장면들이 있는 영화들이야 있었죠. <마르세유로 가는 길>, <목표는 버마>, <그들은 소모품이었다>... 하지만 <목표는 버마> 정도를 빼면 전투가 주가 아니라 전장의 드라마가 주이고, 그 드라마 속에서 최고의 순간을 맛볼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이건 반전에 대한 의지를 내세운 건 아니고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전시에 만들어진 직접적인 ‘전쟁’ 영화들은 대개 재미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집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예요. (...) 그러니까 직접적인 ‘전쟁’ 영화 중 걸출한 작품들은 대개 전쟁 아주 끝자락 혹은 전후에 나와요. 직접 전장에 나간 이들이 원작 삼을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걸 영화화하는 데에 이만큼 시간이 걸린 거기도 하고요, 어떻게 괜찮은 원작을 빨리 구했다 쳐도 폭약 하나, 배 한 척, 트럭 한 대가 아쉬운 마당에 아무리 미국 정부가 할리우드에 전쟁 협조를 구했다고 해도 전투를 영화 세트에서 잘 구현하긴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죠. 예컨대 미국은 전시에 계속 칠레 같은 남미 중립국들에 배 좀 빌려달라고 계속 러브콜을 보냈었어요. 미국도 군수에 여유가 엄청 있던 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이게 제일 큰 문제일 수 있는데, 시차 없이 당장 펼쳐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자유로운 허구적 창작을, 그것도 영화라는 규모 있는 창작을 한다는 데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영화는 2차 대전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거뒀어요. 영화계가 수익을 거두고 국가권력과 깊은 커넥션도 생겼다 이런 걸 넘어서, 대전쟁이라는 매혹적이고도 위험천만한 제재와 고군분투하며 영화가 모종의 표현 양식으로서 자신을 엄청나게 갱신했다는 말입니다. 영화는 가르강튀아와 같아요. 자신이 제시할 수 없는 전장의 이미지 따위 없는 것 마냥 끊임없이 전장과 후방을 재현하고 또 소화하며 자신의 역할을 과시했습니다. 달리 말해 영화에 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은, 전쟁의 요소들을 영화의 것으로 철저히 정련한 시기이기도 했던 거죠. 그리고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지금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고 있죠. 그런데 오늘날의 전쟁과 영화의 관계는 어떤가요. 좀 애매합니다. 못해도 근 10년 사이에 전장 자체는 '대중' 영화에 있어 관심사가 아니게 된 것 같아요. 그 대신 소형 카메라와 인공지능이 탑재된 드론이나 로봇이 인간 대신 직접 전장을 누비며 파괴와 촬영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혹은 사람들은 영화관이 아닌 스마트폰을 통해 전장을 보고, 거기에 고통을 받거나 무심하며, 그 다음에 스와이프해서 너무 빠르게 다른 정보를 접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장의 이미지가 고도로 즉각화 및 다양화될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서울변방연극제에선 23023년부터 연극제 기간에 맞춰 관객 비평 프로그램 <단편한글>을 운영한다. <단편한글>은 "비평과 축제의 만남이 공연의 순간에만 머무는 것에서 확장해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기를 바라며" 다양한 지역, 연령, 관심사의 필진들을 모집해 스터디를 기획 및 진행해왔다 하며, 내게는 여기서 연속 특강의 한 꼭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올해 <단편한글>의 표제는 “이방, 연방, 변방을 가로지르는 해방된 관객의 공연 쓰기”였는데, 이에 맞춰 나의 "경계를 넘는 쓰기"와 이를 통한 동시대 문화에의 탐구 방법에 대해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연극에 대해선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이 없는지라, 내게 이 요청은 어둠 속에서 코를 잡힌 듯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감사한 제안으로 느껴졌다.
한데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경계를 넘는 쓰기"라는 표현에 대한 반발심이 그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가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인으로서 글을 쓴 적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각 장르의 규칙에 따라 매번 태도와 언어를 바꿔야 하는 여행자의 비유가 내 글쓰기엔 더 적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따라 나는 「여행과 비평」이란 제목으로 비평과 여행의 교차를 논하는 특강을 준비하고 발표했다. 여담 하나.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 비슷한 시기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미야케 쇼의 신작 <여행과 나날>과 제목이 겹쳐서 나중에 알고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에 확인해보니 영화는 별로였다. 하여튼 특강은 잘 치뤄져서, 이후 <단편한글>의 필진분들과 변방연극제 운영진분들이 따로 피드백과 추가 제안을 전해주기도 하셨다. 여기서 했던 얘기들을 좀 더 세공해 다른 자리에서도 펼쳐볼까 고민 중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행 엄청 싫어해요.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숙소를 구하고, 교통편을 예약하는 과정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요. 정말 귀찮거든요, 고정된 집이 있는 편리한 일상을 잠시 중단시킨다는 게요. 그래서 저는 출장이 아니면 여행을 잘 안 다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여행가서 산책하다가 전혀 의외의 곳을 배회하는 순간이지, 여행 자체는 전혀 아니에요. (...) 그런데 이런 저의 호오와는 별개로, 저의 비평에 있어서는 여행이란 비유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이건 제가 평소에 듣는 말과도 겹쳐치는데요.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친 채 비평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영화, 만화, 문학, 미술 등등... 이런 저의 활동에 대해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경계를 넘나드는 평론가'라며 과분하게 불러주시기도 합니다. 근데 감사한 것과 별개로, 저는 이게 저한테 적절한 평가가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문화의 각 분야들의 경계를 자유롭고 자신만만하게 넘나든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뛰어난 비평은, 강도 높은 경험의 여행이 깊은 잔영을 남겨 여행자로 하여금 일상을 한동안 어색하게 느끼게끔 하는 것처럼, 작품과 장르 나아가 세계를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느낌을 계속 남깁니다. 좀 달리 말해볼게요. 때때로 여행자는 이탈된 경로, 방황, 그리고 표류까지도 자신의 경로로, 혹은 자신의 여행 경험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숙련된 여행자들은 이런 낯섦을 수용하고 즐기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죠. 그리고 뛰어난 비평가란 바로 이런 여행자에 속할 것입니다. 제도와 상식의 경계선을 오가며 말하는 건 비평가가 응당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에요. (...) 제 친애하는 동료인 문학평론가 진송 씨의 말을 빌리자면, 일단은 제도와 상식 안에 있다고 해도 주기적으로 억지로라도 마실을 나가봐야 비평가로서 ‘총기’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뭐 좀 과한 예를 들자면 아카라이브 유머 채널이나 카광 유튜브 같은 플랫폼들이 제공하는 개쓰레기 컨텐츠들을 잔뜩 접하고 그걸 가치판단 없이 분석하는 연습을 한다거나, 윤어게인 시위나 성노동자 연대 시위를 오가는 '쁘락치' 짓을 하며 상이한 사람들과 부대껴보는 걸 어거지로 한다거나 말입니다."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에서 새로운 프로그램 이벤트를 런칭했다. 이름은 '클럽 시네마'로, 영화제 측의 설명에 따르면 "자생적인 상영회, 워크숍, 토론회 등을 통해 영화 담론의 결을 풍부히 하는 마이크로 시네마, 커뮤니티 시네마 기획자들이 주도하는, 상영과 담론 생산을 결합한 이벤트"라고 한다. 달리 말해, 올해 상영작들을 기획자들의 관점에 따라 리맵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외주 행사였던 게다. 그리고 이 포문을 동아시아 다큐멘터리 상영 교류 포럼(Seeds of East Asian Documentary, SEEAD), 소리그림, 그리고 키니마가 따로 또 같이 열게 되었다. 키니마 멤버들이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동시대 다큐멘터리즘을 대하고 있는 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었고, 이에 맞춰 우리는 (퍽 무리해서...) 두 차례의 라운드테이블을 기획했다. 하나는 한상희 씨가 제안한 「탈각의 몽타주」였고, 다른 하나는 함연선 씨가 제안한 「불안과 불만: <에디 앨리스: 테이크>와 <도라지 불고기>」였다. 김나영, 정산하, 윤아랑, 한상희가 참여한 전자에선 각각 '에세이' 부문과 '익스팬디드' 부문에서 각각 상영된 <안녕, 코키>와 <다리아의 밤 꽃들>을 묶어, "불균질한 형식조차 관습으로 포섭해버린 동시대 다큐멘터리가 추구할 수 있는 (...) 불온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정산하, 박현, 윤아랑, 한상희, 함연선이 참여한 후자에선 (제목에도 적혀있듯) '한국경쟁' 부문과 '크리틱스 초이스' 부문에서 각각 상영된 <에디 앨리스: 테이크>와 <도라지 불고기>를 대질하며 "새롭고자 하는 욕망을 공통의 유산으로 끌어안은 채 서로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 보"이는 "이 둘을 그토록 달라보이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를 따져보았다. 개인적으론 간략한 소주제들만 정하고 거의 즉흥으로 임했는데도 말이 나쁘지 않게 나와서 뿌듯했고, 정산하 씨의 (유운성 평론가의 말투를 표절한) 진행 실력에 놀랐으며, 키니마가 갖고자 하는 전투적인 태도를 여러 관객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서 보람찬 자리였다.
"<안녕, 코키>와 <다리아의 밤 꽃들>은 이미 세상에 주어진 푸티지들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작품들인데요. 이러한 작업은 형식적 수준에서만 봤을 때, 우리가 유튜브나 디시인사이드 등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합성물'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뭐 가령 우리 모두가 알 만한 예시로, <야인시대>의 심영이라는 캐릭터는 “내가 고자라니”라는 대사 한 마디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잖아요. 디시인사이드를 기반으로 한 심영 합성물의 전성기가 어느 수준까지 갔었냐 하면, 심영의 대사를 전부 백마스킹해서 아예 다른 방식으로 들리게 한다던가, 아예 야인시대 전체의 푸티지를 몽땅 가져다가 심영을 둘러싼 러브 스토리로 바꿔버린다든가 하는 수준이었어요. (...) 상희 님께서 언급하신 그런 불온함, 관습으로 흡수된 불온함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런 합성물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으며 또 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동시대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논함에 있어 켜켜이 쌓인 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건 당연하겠죠. 그런데 이러한 형식을 가장 닮은 것이, 우리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히 당대의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합성물이라는 거예요. (...)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한테 유효하고 필요한 것인가 고민하는 거겠죠."
쪽프레스와 함께 하는 만화비평모임의 아홉번째 프로그램 <우메즈의 뒷모습 - 『나는 신고』편>을 기획 및 진행했다. 우메즈 카즈오 정도의 만화가가 죽었는데도 한국에서 별 움직임이 없던 게 좀 많이 꼴받아서, 딱 그의 사망 1주기되는 날에 맞춰 번역가이자 연구자인 하성호 선생의 오프닝 렉쳐로 모임을 시작했다. 지난 모임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절필한 만화가들은 다룬 적이 있어도) 사망한 만화가의 작품을 다룬 건 처음이라 좀 묘한 기분으로 임했다. 다른 작품들 대신 장편인 『나는 신고』를 갖고서 쭉 진행했는데, 이는 내가 『나는 신고』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메즈 특유의 주제들과 해괴한 감성이 이 작품에 아주 밀도 높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표류교실』과 달리 매 주차에 읽을 분량을 정하는 게 수월한 것도 없지는 않았고... 이번에는 대부분의 멤버가 '고인물'들이라 그런지 진행도 좀 더 수월했으며, 다양하고 재밌는 의견들이 (상대적으로) 정제된 형태로 제시되어 얘기를 나누기에도 좋았다. 모임 현장에서도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나는 『나는 신고』가 ''사랑'이라는 말과 개념을 (과신도 해보고 전유도 해보고 해체도 해보는 식으로) 막 굴려보는 모험적인 괴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걸맞게 『나는 신고』라는 텍스트를 마구 굴려보는 자리가 꾸준히 마련되었던 것 같다. 감히 자평하자면, 대화의 흐름과 진행에 있어 지금까지의 분기 중 가장 모범적으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다. (하지만 "모범적"이라는 말이 꼭 사유의 퀄리티에 대한 판단과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메즈의 뒷모습 - 『나는 신고』편>에 참여해주신 멤버분들께 다시 한 번 큰 감사를 전한다.
여기에 (<세계의 주인> 에피소드의 리뷰 전까지는) 안 쓰긴 했지만, 올해도 당연히 팟캐스트 카페크리틱 활동을 꾸준히 했다. 단지 대본용으로 준비한 리뷰를 여기 게재하진 않았을 뿐. 내 생각에 이는 점점 나를 포함한 카페크리틱 멤버들이 서로의 발화 패턴에 익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뚜렷한 대본 없이도 어떤 얘기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끼고 있달까. 그런 차원에서 올해 녹음은 거의 다 재밌고 유려하게 이루어졌는데, 그중 제일은 아무래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에피소드였다. 영화 자체도 재밌었지만 영화로 나누는 대화도 엄청나게 재밌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녹음에서 나온 얘기들을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역사'와 '발기'라는 키워드로써 거대한 농담을 이루는 이 영화를 농담과 함께 '크리티컬하게' 다뤘다는 점이 퍽 만족스러웠다. 좀 자뻑해서 말하자면, 진행의 유려함에 있어서도 대화의 질과 태도에 있어서도 지금껏 진행된 카페크리틱 에피소드 중 상당한 상위권에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길게 말하진 않을 테니 어서 들어보시라.
KMDb의 연재 코너 'More Than 라이브 액션'에 (지난 5월에 이어 두번째로) 「만화영화란 말에 대하여 - 『여기서』와 <히어>의 경우」란 글을 실었다. 여기서 나는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라는 거친 자문자답으로 시작해, '만화영화'라는 말이 적절한 용어로 여겨지게끔 하는 애니메이션 안과 밖의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을, 그리고 이를 흥미롭게 활용한 사례인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히어>를 논해보았다. 원래는 「애니메이션과 멀티버스」의 보론이라 생각하며 집필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그렇지도 않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부분을 성급하게 마무리지은 게 티가 나서 (또!) 좀 아쉬운 글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성격에 대한 내 입장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람이 분명 있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히어>(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2026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