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2025)

by 그냥저냥 ㅏ랑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세계의 주인> 특집을 위해 작성한 리뷰이다. 페크리틱의 다른 멤버인 조일남 평론가의 리뷰 함께 읽어주시기를 권한다.)






관계에 있어 친구가 될 수는 있어도 동지는 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동지가 될 수는 있어도 친구는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후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어요. 그러니까 어떤 이념적인 운동을 함께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대화를 잘 주고받기는 껄끄러운 사람과 마주하는 기분이랄까요. 물론 동지가 꼭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순진하고 어리숙한 얘기를 하려는 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이 '친구는 될 수 없다'란 느낌은 서로의 세계관이 그 근간부터 불화하는 느낌이라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런 충돌의 느낌은 곧 당대 한국 인문학 전반에 대한 저 자신의 불만(중 하나)에서 뻗친 가지이기도 해요. 해서 오늘은 이 느낌들에 대해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최근 한국(만이 아니라 실은 세계 곳곳의) 예술판에서는 '미친년 이야기'가 하나의 큰 경향이라 할 만큼 많이 나오고 있죠. (문학사의 오랜 전통처럼) 미치광이가 주인공인 걸 넘어서, 비일반적이고 비합리적며 비규범적인 마이너리티 인간의 뒤틀린 현실감각을 전면화해 이에 대한 긍정을 수용자에게 요구하는 이야기 말이예요. 오토픽션의 범주에 들어갔던 다수의 소설이라든가, 전하영이나 이희주의 소설이라든가, W/O F.나 김재원의 미술 작업이라든가, 류사라의 연극이라든가, 이소호나 최재원의 시라든가, 지영이나 만리포의 만화라든가... 더 나아가면 디씨 카연갤의 '앰생 만화'나 (광의의) '카광 일당'의 유튜브 영상 같이 천박하고 대중적인 사례도 포함되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첨언하자면, 여기서 거론된 작업 모두를 제가 지지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보의 지연과 비합리적 행동 속에서 주인을 '이상하고 어려운 여자'로 구성하려 한 <세계의 주인> 역시 이런 '미친년 이야기'에 속한다는 건 자명해 보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미친년 이야기'를 엄청 좋아합니다. 자연인으로서도 비평가로서도요. 하지만 대다수의 '미친년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실망스러운데, 왜냐하면 (연극 <비평가>에서 나와 완전히 밈화된 대사를 따르자면) '그 여자 미친 여자 아닙니다. 슬픈 여자죠.' 따위의 위로를 하려고 억지로 애를 쓰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큰 실책들을 저지르기 때문이예요. <세계의 주인>의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면서 얘기해 볼까요? 먼저 금방 "정보의 지연"이라고 말한 순간들을 따져 봅시다. 윤가은은 이 '미친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혹은 사려 깊게 ―둘은 전혀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기 위해 심리 스릴러의 성질을 앞세웁니다. 즉 플롯의 차원에서 (곧장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의아한 사건들을 먼저 흩뿌리고 한참 뒤에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 지연의 전략을 통해 형성된 상상의 서스펜스('주인이는 대체 왜 이리 변덕스러울까? 어쩌면 성폭력 피해 당사자거나 성폭력 가해자의 가족인 걸까? 혹시 없어진 아빠가? 사과는 또 왜 싫어하지?')가 이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정함' 운운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심리 스릴러로서 <세계의 주인>이 성공적이었는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어요.


저는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쪽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이 '정말로', 수호와의 합의랑 세차장의 롱테이크에서 드러난 이후에는 그를 가엽거나 안타깝게 여길지언정 순전히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예요. 가까이로 2020년대에 나온 다른 걸출한 심리 스릴러 영화들―파울 페흐루번의 <베네데타>와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같은 걸 떠올려 보면, 이 작품들은 '파국에 연루된 의심스러운 미친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이들에 대한 극 내적인 의심을 거두거나 확신할 만한 사실적/도덕적 판단의 제시를 철저히 유예하고 자제합니다. 대신 이들의 존재에 연루된 서스펜스가 주변 세계에 어떻게 파급되고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 즉 이 괴물 같은 존재가 어떻게 세계를 압박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죠. 이를 통해 그 폭력적인 광기까지 포괄하여 우리가 미친 여자 캐릭터를 긍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에 비하면 <세계의 주인>은, 결국 주인을 적당히 연민(하고 적당한 회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로 구축한다는 점에서 과감함과 세밀함이 한참 부족합니다.


명확한 사실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를 꼬투리잡는 게 아닙니다. 주인이 주변 세계를 압박할 만큼 '불편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는 데에 불만이 있는 거죠. 예컨대 주인이 상황 모면을 위해 갈수록 더 큰 거짓말과 회피를 하거나, BDSM 행위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듯한 뉘앙스를 삽입하거나, 가해자를 아빠로 만들어 그에 대한 증오와 연민을 함께 갖도록 했다면, 그래서 주인의 피해자성을 관객도 쭉 낯설게 느끼도록 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아쉬움이 계속 생깁니다. 물론 저도 이게 엄청 위험하고 난감한 얘기란 걸 잘 알고 있어요. (아마 어떤 분들은 제가 성폭력 피해자 캐릭터를 두고 이딴 얘기를 했다고 화를 내시겠죠? 그렇지만 비상식적인 것을 외면하려 해도 이런 인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여러분은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말해야만 합니다) 윤가은 본인도 이를 알고 있기에 후반부에서는 심리 스릴러의 성질을 옅게 만들고 대신 (익명의 쪽지와 해인의 실패하는 마술로 대표되는) 캐릭터들 사이의 불균형한 소통과 고독을 앞세운 건 아닐까요. 이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건 무리지만, 여기서 모종의 회피가 일어났다는 의심은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세차장 롱테이크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주인의 숨겨왔던 진심이 일시적으로 폐쇄된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오는 드문 장면이죠. 그 진심의 강력한 발화와 이를 차 뒷좌석에서 고정 시점의 원 씬 원 숏으로 담아내는 연출 때문에, 많은 분들이 여기서 어떤 예의와 윤리의 감각을 느끼신 모양입니다. 두 캐릭터의 고통스러울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 대신 그들의 답답한 심경에 딱 걸맞은 구도를 취했단 점에서 말이죠. 그런데 이 간극과 지속의 장면은 굉장히 장식적이예요. 왜냐하면 캐릭터들의 (뒷)모습과 시공간적 지속을 포함한 전체 미장센의 (<세계의 주인>의 다른 장면들에 대해서든, 다른 익숙한 영화들에 대해서든) 의외성에 관객이 깊이 집중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만 윤리의 반대편에 장식이 있다거나, 장식성이 전면화된 장식은 죄악이라고 함부로 말하려는 게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의 장식성이 문제인 건, 주인과 엄마의 스펙터클할 얼굴에 다가가지 않고 그걸 컷으로 나누지도 않겠다는 결단 자체가 순수형식으로 지나치게 앞선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진심이 (고정 시점인데도 잘 보일 만큼) 온몸으로 터져 나오는데 그 광경을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간극이 곧 예의가 되나요? 전혀 아니죠. 금방 말한 것처럼 관객은 의외적인 전체 미장센에 집중할 것을 요구받는데 말입니다. 삐딱하게 말해서, 존댓말로 할 말 못할 말 다 한 뒤에 '그래도 예의는 지켜드렸어요.'라고 둘러대는 느낌이랄까요. (여기서 저는 V.F. 퍼킨스가 『영화로서의 영화』에서 <콰이강의 다리>를 신랄하게 논한 대목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간극을 예의로 만들려면 (존 포드의 정신적 후예들처럼) 외설적인 광경의 파토스까지 냉정하리만큼 무화하거나 이질화할 수 있어야죠. 이와 달리 윤가은은 장식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치환하려다가 양자 모두를 흐트러트렸습니다. 장식성은 결단의 내재적인 형식이 아니라 담보물 정도로 동원됐고, 결단은 충분히 '예의 있고 윤리적인' 결과를 못 내놨으니 말이죠. 결단이 그 자체로 연출의 세부와 연결되진 않는다는 걸 여기서 새삼스레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롱테이크는 장식과 윤리 모두에 대한 큰 오해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몹시 큰 실책의 장면인 것입니다.


금방 실책이라고 했듯, 이 영화에는 분명 더 과감하거나 세심해질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방기하거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런 실책이 <세계의 주인> 전체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건,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입니다. 곧 주인에게 불안을 안긴 쪽지를 남기던 미지의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쪽지를 남깁니다.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쪽지는 스크린에 무음으로 전면화하는 대신 불특정 다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내레이션을 통해 읽힙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미지의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학교의 여러 풍경을 바라보게 되죠. 이렇게 글의 주인 하나의 입장은 물론 그런 '가능한' 주인들 모두의 성질까지 뒤섞으며 '누가 말하는가'란 의문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고전적인 자유간접화법의 연출이, '이상하고 어려운' 우리의 주인공의 존재 의의를 긍정하려는 윤가은의 결정타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복하건대, 결단이 그 자체로는 연출의 세부를 온전히 정당화할 수 없죠. 저는 이 장면이 앞선 영화 전체에서의 '말하려는 바'를 배반하는, 그리고 그럼으로서 이 실책으로 가득 찬 영화를 적당히 완성시키는 아이러니한 결론이라고 생각해요.


주인은 '이상하고 어려운' 사람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며, 그렇기에 익명의 누군가 혹은 우리 모두에 있어 희망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정말 일어나는 것은, "누군가 혹은 우리 모두"를 아주 단순화 및 추상화하고 그와 반대로 주인의 존재자적 특유성을 아주 강화하는 불균형에 가깝거든요. (어째서 주인이 직접 이 쪽지 내용을 읊는 순간은 아예 없을까요? 어쩌면 일종의 선 긋기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던 건 아닐까요?) 달리 말해 여기서의 자유간접화법은 (유운성 평론가가 『물듦』에서 논한 '상호감염'이 아니라) 이 "세계의 주인"을 긍정하기 위해 주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여기에 뭉뚱그리는 폭압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왜 주인이 '결과적으로' 옳아야 합니까? 또 왜 주인이 옳다는 판단이 영화 밖의 관객에게 맡겨지는 대신 영화 안에서 닫힌 구조로, 그것도 미지의 '우리'로서 제시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이렇게 되면 나머지 캐릭터들만 폭압에 놓이는 게 아니예요. 앞서 말했듯 "주인을 적당히 연민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로 구축"하며 주인을 기존의 도덕 체계 속으로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겁니다. 회복과 사랑을 해야 한다고 온화하게 강요하는 체계 말이죠. 여기서 진정으로 바뀌는 게 있을 리 없어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영화적으로 획일화하고 주인은 메타적으로 표백할 때, 결국 승리하는 것은 가만히 있던 기존의 도덕뿐입니다. 말하자면 '잔인한 낙관'(로렌 벌랜트)이죠.


저는 예술이 옳은 것을 위한 자리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치명적인 갈등은 해소되어야 하고, 피해자는 결국 위로와 보호를 받아야 하며, 사람은 '빻은' 성질이나 취향을 가지면 안 된다는 식의, 우리에게 상식적인 옳음 말이예요. 오히려 틀린 것, 이상한 것, 불편한 것, 모순적인 것이 세계를 실정적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생각이 상식을 넘어 어떤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줄 수 있음을 뻔뻔하게 표현할 수 있는 대안적 영역이 바로 예술이죠. 그래서 제가 '미친년 이야기'를 엄청 좋아하는 거고요. 이런 맥락에서, 처음에 저는 '미친년 이야기'를 마이너리티 인간의 현실감각에 대한 긍정을 수용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죠. 그런데 이 "긍정"은 위로와 연민이 아니라, 제가 예전에 썼던 말을 가져오자면 세계의 난잡함을 직시하면서 "일견 역설로 보이는 것을 요구하[고] (...) 기꺼이 책임지는" 태도거든요. (사실 여기에서는 이걸 일부러 뒤섞으며 "긍정"이란 말을 줄곧 썼는데, 여러분이 애를 좀 쓰시며 양자를 가려내면 좋겠다는 심술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긍정을 취하는 과격한 작품만을 열렬히 지지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주인>에 대한 여러 호의적인 반응들이 '윤리'나 '다정함'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이렇기에 실패의 증상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처음에 말했듯, 이건 비단 <세계의 주인> 하나만이 아니라 요즘 한국 인문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해요. 미친년의 현실감각을 미학의 수준에서 구조화하는 대신 미친년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시공을 미학에서 찾는 것, 그럼으로서 저항하는 척 도덕에 복무하는 것. 아마 여기서 수많은 작품들의 이름이 떠오르셨을 겁니다. 저는 이들의 (가령 정신병과 자살을 막아주는 식의) 사적이고 심리적인 쓸모는 인정하긴 해도, 결국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상당한 거리감과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세계의 주인>의 윤가은과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은, 이런 점에서 차라리 '앰생 만화'나 '카광 일당'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윤가은 감독께선 저따위는 친구로 고려는 커녕 신경도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잘 가시겠죠. 하지만 이런 큰 불만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만은 그가, 혹은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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