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25년 9월 30일 출간된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59호에 실린 원고를 옮긴 글이다.)
마지막은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날 밤 나는 (쪽프레스와 함께 기획 및 진행하고 있는) 만화비평모임의 여섯 번째 기획 ‘윤아랑의 만화읽기: goat의 그래픽노블을 중심으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멤버들과 신나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후 11시가 임박하여 급히 자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멤버가 복잡한 표정으로 폰을 보더니 그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친구들한테 계속 카톡이 오는데, 비상계엄이 떨어졌다는데요?”
누구나 그랬겠지만,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이어서는 딥페이크거나 가짜뉴스라고 생각했고, 트위터(현 X)와 유튜브를 켜 YTN 생방송 뉴스를 막 봤을 때는 그새 북한과의 교전이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일어났나 싶어 긴장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쌓였던 속보들을 급히 훑으며, 손에 땀이 나고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구나, 무시무시한 일들이 이어지겠구나. 헛웃음, 공포,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과 말을 주고받던 우리는 일단 자리를 파했고, 나는 “우리 체포되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웃음을 섞긴 했으나 거기엔 어떤 과장도 농담도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 집에 들렀으나, 모두 (문자 그대로)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확인의 순간은 짜증과 안도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사이 국회 출입문은 봉쇄되었고, ‘처단’을 명시한 포고령이 선포되었으며, 국회 경내에 침투한 계엄군이 서둘러 국회로 향한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트위터와 TV 뉴스 그리고 유튜브 라이브를 번잡하게 오가며 소식을 체크하던 나는 날짜가 12월 4일로 바뀐 직후,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1990년대 후반생치고는 힘들고 위험한 시위에 많이 참여한 편인데도, 이날 여의도로 향하는 길은 드물게 목숨이 진정으로 걱정되는 긴장을 쭉 느꼈더랬다.
국회 안에 있던 친구들은 국회 본청 안에 들어온 공수부대와 그들을 막기 위해 만든 바리케이드 사진 등의 국회 내 상황을 보내주었고, 시위를 위해 국회 입구에 도착한 친구들은 경찰의 봉쇄를 피할 수 있는 우회 루트를 SNS에 신속히 퍼뜨렸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국회 안팎에 군인이라니, 심지어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올랐다. 국회의원은 물론 내 친구 동지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광경이, 곤봉과 최루액 그리고 총이 우리 몸을 강타하는 고통이, 그리고 한국에서 펼쳐질 수정의 밤[1]이. 이상하게도 그것은 국회로 가는 길에 있어 주저와 의지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국회의사당 정문에 도착한 것은 대략 새벽 1시 30분이었다. 다행히 이 이전에 비상계엄 해제안이 통과되긴 했으나 경찰과 경찰버스는 여전히 바글바글했고, 철수는커녕 때때로 인원이 증원되는 듯 하기도 했다. 기약 없는 대기와 암묵적인 위협에 나는 분하고 긴장했으며 기막혔다. 약속 없이 모인 이들은 그 분함만큼 대오를 짜고, 구호를 외치고, 경찰에 맞서며 저항을 표했다. 긴 밤 내내 침묵을 지키던 대통령과 재난안전문자는 각각 오전 4시 27분의 녹화된 대국민 담화와 오전 6시 20분의 도로 결빙을 조심하라는 얘기로 처음 입을 뗐다. 저 기만적인 말들은 내 삶에서 가장 길게 느껴진 이 밤을 한낱 예고편 따위로 만들어버렸다. 그래, 이후 오랜 기간 펼쳐질 지리멸렬한 내전의 예고편 말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가.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쿠데타[2]와 탄핵 정국이 그간 굳어 있던 내 생각들을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악의 재현에 대하여, 나는 정리된 생각들을 아예 새로 정립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비평가로서는 외면하고 싶었던 세계의 변화를 마주해야만 할 시간이 왔다고 쓰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 초유의 사태를 이루는 역학을 지금까지 논한 악의 재현의 방식들로써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은 하겠지만, 어딘가 조금씩 불충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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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정의 밤(Kristallnacht)은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독일 전역에서 자행된 유대인 대상 폭력 사태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헤르셀 그린슈판이란 소년이 감행한 반나치 테러에 독일 내 반유대주의 여론이 들끌었는데, 나치 독일 정부는 이를 기회 삼아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 백화점, 유대교 회당 및 공동묘지를 파괴하고 2천 여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조직적 백색 테러를 일으켰다. 훗날 이는 홀로코스트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기억된다.
[2] 윤석열 정부의 12.3 비상계엄은 총체적인 위헌의 권력 행사였(고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이 점이 인정되어 윤석열이 대통령에서 파면되었)으므로 나는 이를 쿠데타나 내란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윤석열과 그 일당에게 내란죄 판결이 내려지지 않기도 했고 세간에서 이 사건을 비상계엄으로 부르는 것이 소통에 있어 좀 더 일반적이기에, 본 지면에서는 일단 비상계엄으로 쓰도록 한다. ]]
가령 처음 체포된 순간에도 찰나의 뒤통수만 포착됐을 뿐 우리로선 그가 의도하지 않은 모습과 말소리를 전혀 보고 들을 수 없던, 즉 변명도 입에 발린 말도 없이 자기 이미지의 매체적·대중적 현시를 줄곧 통제하려 한 윤석열의 유령적인 면모는 언뜻 사악하고 완고한 권력으로서 ‘악’의 실체화된 표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탄핵심판 변론에서 즉석으로 김용현과 말을 맞추려 애쓴 광경[3]처럼 (김건희에 대한 애정 공세만 빼면) 모든 일에 얼렁뚱땅으로 임하는 그의 어리숙한 면모는 한편으로 그 자신을 찌질하고 진부한 (시쳇말의 용법으로서) ‘빌런’으로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비상계엄이 촉발한 망상증·편집증의 ‘평준화’[4]는 진영을 가리지 않는 혐오 정치와 정치혐오라는 결과로 치달으며 외려 사람들을 정치의 까다로운 부분으로부터 더더욱 떼어놓고 말았다(여기에 국내 부정선거 음모론의 원조가 어느 쪽이었는지도 떠올려보자).
사실 이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처음 당선된 2016년 즈음부터 극단주의의 대대적 득세란 방식으로 지구 전체의 수면에 드러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듯 동시대의 국면은 순수의지로서의 ‘악’을 더듬는 것으로도, ‘악당’을 자처해 ‘부정적인 것’을 전용(轉用)하려는 것으로도, ‘악당’이 성립될 수 있는 ‘부정적인 것’의 정도와 방식을 따지는 것으로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혹은 달리 말해, 악의 재현에 있어 새로운 분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현대의 재현 방식들을 불충분하게 만드는 새 분화의 조건으로서 삼각형을 간략히 그려보는 것으로 본 연재를 마무리짓는 게 좋을 성싶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 주체화로서의 극단화다. (사회적·국제적 안정 및 유대의) 부재와 (글로벌 인터넷의 자연화로 인한) 초연결의 대위(對位)로서 지속되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감각은 진영과 무관히 과격화 내지 극단화되고 있다. 불공정한 혜택을 없애자,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불순세력들을 불살라버리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놈들을 찢어 죽이자……. (목적어의 차이만 제한다면, 이렇게 추상화된 수사가 어느 진영에서든 쉬이 사용된다는 것을 당신께서도 알고 있으리라) 이런 극단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이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 지적한 대로 “‘전통적’ 파시즘의 배경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 경쟁주의적 국민주의에서 나온 것”이자 글로벌리즘과 문화적 자유주의를 취한 “집권 좌파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5]이며, 율리아 에브너가 『한낮의 어둠』에서 지적한 대로 새로운 극우 인사들이 그 틈을 포스트 인터넷 사회의 높은 접근성과 다양한 매력(간단한 해결책, 과격하고 유희적인 표현, 정치적인 자기효능감…)으로 파고들어 활성화된 결과다.[6] 즉 외설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대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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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 대통령은 “(……) 포고령이 추상적이라 법적으로 검토할 게 많지만, 실행 가능성이 없으니 놔두자고 웃으며 말했던 상황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 전 장관은 “말하니까 기억난다”며 “평상시보다 꼼꼼히 보시지 않는 걸 느꼈다”고 답했다.” 권희원 외 3인, 「尹 “국회 안에 특전사 몇명 없었잖나”…김용현 “280명 곳곳에”」, YTN, 2025년 1월 23일.
[4] 가령 다수의 ‘블랙 요원’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에도 도처에서 대기중일 거라고 짐작하거나, 육군이 시신을 임시 보관하는 ‘영현백’ 3116개를 새로 구매한 것을 두고 대대적인 유혈사태에 대한 대비로 받아들였던 탄핵 찬성파의 여론을 떠올려 보자. 옳고 그름의 판단과는 별개로, 이는 허무맹랑한 비상계엄이 현실화하면서 국가 전체의 현실감각이 농담이나 망상증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크게 뒤흔들렸음을 보여주는 증상적 발화라고 할 수 있다.
[5]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지음, 정기현 옮김, 장석준 해제, 원더박스 펴냄), 198~200쪽.
[6] 『한낮의 어둠: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250쪽. ]]
이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큰 곤란 중 하나는 책임자나 구심점을 가려내는 일이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폭력의 행위는 더욱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폭력의 책임을 질 근원들은 끊임없이 숨고 달아나 잘 잡히지 않는다. (온라인 진보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SNS 커뮤니케이션의 익명성, 파편성, 탈중심성은 이런 방식으로 극단주의에 수혜를 준다. 일본 만화 〈단다단〉에서 부분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요즈음의 악행은 명확한 지휘자(로 지시되는 자)와 조직 없이 (자기충족적인) 정동과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자본을 동력 삼아 개별적으로 작동하고 모였다가 해체되고 다시 출현하길 반복하는 ‘아웃소싱’과 ‘전염’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속에서 분산되는 것은 폭력의 책임만이 아니다. 지난해 이스라엘의 틱톡 크리에이터들이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을 조롱하는 ‘챌린지’를 떼거지로 게시했듯이[7], 우리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온라인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폭력에 대한 사용자의 망설임과 죄의식 역시 극단주의와 연동된 채 빠르게 분산된다. 더더욱 영악하게 다성화(多聲化)하는 ‘악’, 혹은 칸트와 아렌트가 논한 ‘근본악’의 발전된 형태. ‘세계는 근본적으로 무심하고 잔혹하다’라는 운명론적 입장도 이 앞에서는 원론적인 것이 될 터이다.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비판에 있어선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이미영 옮김, 나무의철학 펴냄)나 카일리 리드의 『정말 재밌는 나이(Such a Fun Age)』처럼, '진보적' 선의가 파국을 야기하는 광경을 쫓아감으로써 ‘악’의 아이러니한 힘을 직시하려 한 소설들이 있다. 그러나 극단주의 세력이 취하는 분산적인 네트워킹과 거기서 발생하는 악행에 대해서는 이보다 훨씬 예민하고 복잡한 접근이 필요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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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러나 이런 과격한 온라인 운동의 원인이 이스라엘이나 고도로 발전한 SNS에만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령 틱톡을 이용한 폭력 투쟁에의 선동과 과시는 사실 시기적으로 팔레스타인 청(소)년 사이에서 먼저 나타났기에, 상기한 이스라엘 틱톡 크리에이터들의 틱톡 '챌린지'는 이에 대한 보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피드백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는 양비론이나 무슬림 책임론 따위의 설파가 아니다. ]]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길을 잃은 대안문화다. 자본과 국가와 기술의 ‘산만한’ 복합체가 자신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을 계속 또 다른 예속 수단으로 바꿔버린다는 것은 이제 (전유된 체 게바라 초상의 예시처럼) 상식에 가깝지만, 요즈음에는 그 빈도와 주기가 훨씬 짧아져서 ‘적폐’와 ‘저항’을 형식적 수준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바로 앞에서도 논했지만 한때 진보~좌파들의 문화적 전략이었던 도발과 유희를 오늘날에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대안우파들이 아니던가? 노무현을 표상하는 기표 일체를 사회적 금기로 만들어버린 일베와,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며 페미니즘 운동의 안팎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던 게이머게이트 등의 초기 ‘밈 전쟁’은 카일 와그너가 예언했듯 이 전략이 보편화되기 위한 과시적 전초전에 불과했다.[8] 적과 동지의 분간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심지어 (온라인상 극우 남성 커뮤니티와 페미니스트 커뮤니티가 그러하듯) 서로를 닮아가고 의도치 않게 연합하기도 한다. 그러니 퀴어 아티스트 이반지하의 (비상계엄으로부터 며칠 후에 진행했던 '이반지라디오' 39회에서 나온) 말처럼 “위기는 곧 [기회가 아닌] 위기”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신중하고 정의로운 발화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상식’으로서 진보주의’라는 형용모순이 자연스러워진 뒤틀린 시대. 요컨대 ‘악당’을 자처하는 것만으로는 정말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악당’과 다를 바 없어지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속에서 길을 잃은 오늘날의 픽션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곤 한다. (흔히 알려진 것과 반대로, 진영에 무관히[9]) 표현 너머의 음모를 가정하며 표현 자체를 문제시하는 캔슬컬처의 조류에 (‘예민한’ 표현을 스스로 금하거나, 음모론에 흥분조로 찬동하는 식으로) 그저 휩쓸리거나, 이런 조류에 우려를 표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감히 자만하거나. 즉, 오염된 포퓰리즘과 교만한 냉소주의. 가령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의 대대적인 개인전을 통해 한국에서도 흥행한 설치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후자의 대표 사례다. 백보 양보해서 (아이웨이웨이나 히토 슈타이얼처럼) 진작에 밈의 장이 되어버린 현대-동시대 미술의 상황을 과도하게 육화하여 하찮고 우스운 미술의 상태를 풍자하는 게 그의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의 작업은 스태그플레이션에 가까운 밈 경제로서의 미술에 일조하는 것 외에 어떤 유의미한 효과도 내지 못한다.[10] 실패한 사캐즘 농담은 자학보다 끔찍한 법이지 않던가? 세간의 압력과 잘못된 방향을 향하는 픽션들이 이루는 무한 피드백 루프는 재현의 환경을 극도로 악화시킨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예속의 힘에 맞서려는 창작자에겐 과감하기 위한 용기와 사려 깊은 신중함이 함께 고강도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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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Kyle Wagner, 「The Future of the Culture Wars Is Here, and It’s Gamergate」, Deadspin, October 14, 2014, deadspin.com/the-future-of-the-culture-wars-is-here-and-its-gamerga-1646145844.
[9] 국내에서 진정 캔슬컬처라 할 만한 운동을 펼치는 건 페미니즘 사상 색출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반페미니즘 진영이다. 이에 대해선 이민주의 『페미사냥』(민음사 펴냄)을 참조하라.
[10] 미술에 있어 이런 냉소주의의 보다 끔찍한 사례로는, 가자 휴전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썼다가 미국의 대표적인 미술평론지 《아트포럼》의 편집장 직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경우와,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의 도록을 위해 쓴 원고에서 비상계엄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로 전시 주관처인 서울시립미술관으로부터 원고 배제 통보를 받은 미술평론가 남웅의 경우를 거론할 수 있다. 이 두 사례의 진정한 문제는 유력 플랫폼이 동시대의 정치적 의견을 검열했다는 데 있지 않다. 미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고민한다는 스탠스를 줄곧 내세우던 유력 플랫폼들이 이렇게 검열을 행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수많은 정치적 의제들이 적당한 화제와 도덕적 평가를 받기 위한 밈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게 실은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진부하고도 굳건한 ‘빌런’들의 득세다.[11] 지난해 (당연히 비상계엄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 〈베테랑 2〉를 한번 떠올려보자. 여기에는 절대악의 화신이자 서도철(황정민 분)의 거울상인 해치(정해인 분)를 비롯해 여러 ‘악당’들이 등장하지만, 유독 취급이 다른 ‘악당’ 캐릭터가 하나 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을 처단한다’란 이유로 해치를 추종하는 사이버 렉카 박승환(신승환 분)이 그것으로, 연쇄살인과 이에 대한 대중적 호응에 편승하여 이익을 챙기는 박승환은 물론 징그럽고 악독한 캐릭터로 묘사되긴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다른 '악당'들에 비하면 (스튜디오에서 유튜브 촬영을 할 때 상반신만 양복을 입고 하반신은 팬티 바람으로 있는 게 드러나는 식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들이 나오는 등, 그 구차함으로 말미암아 ‘개그캐’스럽게 다뤄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본작의 감독 류승완은 요즈음 활개를 치는 사이버 렉카들이 악당도 못 된다며 비꼬고자 박승환을 이리 묘사했을 테다. 하지만 과연 이 정도로 괜찮을까? 우리네 현실을 돌아보면 박승환과 같이 구차하고 진부한, 그러나 굳건하게 사회를 망가뜨리는 ‘빌런’들이 훨씬 많고 훨씬 실질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가짜뉴스를 퍼뜨리거나 폭력을 전시하는 유튜버들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군 간부와 병사들을 포섭하지도 않은 채 비상계엄을 실행했다가 실패하자 “[12.3 비상계엄은] 경고성 계엄이자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고 줄곧 자가당착의 말장난을 하는 전직 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하다’라거나 ‘진지하지 못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라는 등의 멋모르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잘생기고 무시무시한 해치와 우락부락하고 진부한 박승환 사이의 묘사 차이는 어째서 생기는가? 당연하게도 후자의 ‘악당’은 픽션에 있어 매력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일 터이다. 악당이라는 멸칭도 아까울 만큼 ‘평범하게’ 진부한 ‘악당', 아니 ‘빌런’의 득세를 직면하는 데 있어 (수용자에게 줄곧 흥미진진함의 감각을 전달해야 하는) 대부분의 픽션은 무력하다. ‘빌런’이 다뤄진다 한들 이들은 대개 작품 속에서 일회성으로(혹은 우리네 일상에서) 소환되어 ‘사이다’를 위해 강하게 처벌당하고 서둘러 치워질 뿐이다. 《미스테리아》 58호에 게재된 지난 에세이 「조커는 매번 달리 웃는다」에서 언급했듯, 이는 사람들이 사악하고 광폭하며 카리스마 있는 ‘악당’ 캐릭터에게서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심미적인’ 당연함이 동시대의 상황으로부터 꽤나 거리가 있는 인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사실 선에 비해 악은 시시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이에 대응하려 하지만, 이미 대통령이 ‘빌런’으로 거하게 나선 이 허구적인 마당에 이는 픽션의 책임방기를 어느 정도 종용하는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빌런’들로써 순전히 진부하게 현현하는 ‘악’을 다루려는 시도의 픽션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작은 불씨가 큰 화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그 불씨들이 호흡기와 기둥을 갉아먹는(그리고 사람들이 여기서 모종의 돌봄과 진리계기를 찾는) 광경을 직시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악당’에 대한 기존의 심미성의 기준에 도전하려는 시도가 불가피하게 병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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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단락의 내용은 한 동료 비평가와의 대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풀어놓은 것임을 알려둔다. 익명의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
... 하지만 음울하고 냉소적인 어조로 끝을 맺을 생각 따위는 없다. 첫 에세이 「악, 악당, 부정적인 것의 삼각형」에서 말했듯, 세계의 변화를 직시하거나 예견하여 그에 걸맞게 유효한 악의 재현을 선보이려 한 픽션의 시도가 이 세계에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동시대의 새로운 분화 속에서 픽션을 계속 창작하거나 향유하는 것은 고되고 또 고된 일일 것이다. 아니, 아예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낯선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할 수 있게끔 하는 픽션의 역할과 역량이 쪼그라든 곳에선 현실 역시, 나아가 양자를 아우르는 세계 전체가 (맹목 혹은 허무의 형태로) 쪼그라들기 마련임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 우리로선,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으리라. 이 말들은 절망이 아닌 낙관의 자리에서 나오는 중이다. 그런 만큼 예민한 낙관의 대가 밀란 쿤데라의 말로 연재를 마치도록 하자.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예술이 절대로 말해진 적 없는 것을 찾기를 그만두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기를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덧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12] 그렇다, 예술의 시끄러운 지저귐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당신께 가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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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커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23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