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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모임은 아직까지 내 최고 업적임 반박 안 받음

by 그냥저냥 ㅏ랑


출판사 화이트 리버는 군산북페어 2025에 (접촉면과의 연합 부스로) 참여하면서 새로 무가지 시리즈를 출간했다. 그리고 는 이 기획에 「'안전한' 분란의 현장 - 만화비평모임의 필요성에 대하여」란 제목의 긴 글로 참여했다. 당신도 알고 계시듯 나는 2023년부터 판사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를 읽고 논하는 만화비평모임을 기획 및 진행 중인데, 여기서는 "만화비평모임의 '크리티컬한' 필요성을 설명해달라는" 화이트 리버 측의 의뢰에 따라 모임이란 포맷이 수행할 수 있는 비평적 기능을 한 번 경험적으로 탐색해 보았다. "작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가능한 자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 그렇게 제시된 생각들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 작품의 중핵(들)을 (진행자 역시) 함께 더듬는 것"의 급진적이고도 신중한 방법 말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에는 이런 비평적 기능에 있어 지양되어야 할 것들(그 자체로 목적이 된 사업 따먹기, 완곡 어법의 자기 자랑, 개방성이나 즉흥성만으로 뭔가 이루었다 여기는 '리더'...)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 역시 수반되었다. (이전에 채널예스 연재 칼럼 <써야지 뭐 어떡해>에 「만화비평모임을 계속 하는 이유」란 글을 발표하긴 했으나, 이는 모임의 발동력으로서 복수심에 대한 글이었으므로 「'안전한' 분란의 현장」과는 방향이 상당히 다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발표한 작업 중 나의 비평관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이기도 한데, 그런 만큼 여러분의 솔직한 감상이 궁금하다. 아쉽게도 나는 이번 군산북페어에 가지 못하지만 당신이 만화비평모임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모임이란 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궁리하고 있다면, 군산북페어에서 이 무가지를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쪽프레스와 지금껏 이 만화비평모임에 참여해주신 여러 멤버분들께 감사와 함께 이 글을 바친다. 그리고 이 글은 사실 9월 말에 발표될 다른 글과 암묵적인 짝패로 집필되었는데, 이는 한 달 뒤에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필자로서 무엇을 쓰고 싶다는 욕구 대신 무엇을 쓰면 안 된다는 자제가 먼저 필요한 글이 종종 있다. 12.3 비상계엄/쿠데타에 대해 쓴다면 '윤석열과 그 잡배들을 마냥 욕하고 그 반대편의 응원봉과 '말벌 동지'들을 찬양만 해선 안 된다'라는 의지가, AI와 예술에 대해 쓴다면 'AI가 새롭다 혹은 새롭지 않다란 결론을 섣불리 내려선 안 된다'라는 의지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특정 공동체의 '상식'에 호소하며 쉽고 빠른 결론으로 향하려는 태도, 즉 진부한 보신주의를 멀리하기 위해서는 저런 자제를 쭉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 역시 내게는 그런 경우에 속한다. 화이트 리버 측이 이 지면을 위해 의뢰한 것은, 내가 출판사 쪽프레스와 함께 기획 및 진행 중인 일종의 북클럽 '만화비평모임'에 대한 글이었다."


"소개된 해외 만화들의 너비만 따진다면 사실 한국 만화계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지평을 갖고 있다. 타카노 후미코의 <노란 책>, 빈슐뤼스의 <피노키오>, 크리스 웨어의 <러스티 브라운>이 함께 시장에 유통되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될 것 같은가? 하나 이를 가능케 하는 편집자/번역가들의 노고와 달리, 평론가나 교수란 작자들은 그저 얼빠진 얼굴로 귀한 작품들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사회적 의미’나 ‘웹툰 제작의 변화’ 따위의 말만 늘어 놓으며 사업 따먹기에 열중하는 그들의 양심과 쓸모란 아무리 눈을 씻어도 보일 생각을 않는다. 즉 시장에 개입하기는 커녕 시장을 따라가려는 대화와 담론조차 없다는 게 큰 문제인 것이다. 내가 만화비평모임을 이어가며 견지한 복수심은 바로 이런 상황을 향한다."


"첫번째 장면. 6번째 기획 <윤아랑의 만화 읽기 - goat의 그래픽노블을 중심으로>에서 『사랑에 서툰 사람들』을 다루는 4회차 모임이었다. 미국 독립만화의 금자탑 <사랑과 로켓> 시리즈의 근작인 이 작품은, 젊었을 적 정비공이자 펑크 록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격렬한 만남과 다툼과 이별을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이제는 ‘평범하게’ 정착하길 요구받는 중년이 된 주인공 매기와 그 주변 인물들의 진부한 애정사를 냉혹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쫓아가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인지라 멤버들이 어떤 감상을 나누어 줄 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중 만화비평모임의 단골 멤버 A가 다음과 같은 제목의 리뷰를 준비해 왔다. 「야망가 같아.. 에이씨 기분이다 이번 북클럽 최애작 선정!!!」."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포맷과 전략을 채택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주관적 감상의 방법과 그 언어를 함께, 순전히 수렴에 이르지 않으면서 수련할 수 있는 포맷과 전략.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강사가 자신의 지식을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거나, 수강생들의 '비제도화된' 감각으로 강사가 새로운 사유의 계기를 얻거나, 전문가들이 다 함께 토론을 주고받는 식의 지식 모델들과는 다르며 또 달라야한다. 이를 위해 나는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가능한 자리'란 말을 급진화하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리뷰를 준비하는 데 있어 멤버들은 그냥 웃긴 장면들을 모아봐도 좋다. 강간, 대디/마더 이슈, 정신병 등의 키워드로써 캐릭터나 작가에 대한 모종의 정신분석을 펼쳐 보아도 좋다. 만화의 장면들을 직접 재구성하는 등의 2차 창작을 해도 좋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역사적, 신화적, 사회적, 오타쿠적) 지식을 작품의 맥락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다. 눌변이어도 좋으며, 그냥 재미가 없었다는 말이어도 좋다."




+ 군산북페어 2025가 끝나고 약 일주일이 지났기에 「'안전한' 분란의 현장」 배포본의 PDF 파일을 여기에 게재한다. 말미에 쓰인 것처럼 오픈 소스이니 "누구나 자유롭게 복제·전재·배포할 수 있"다. 늘 그렇듯 재밌게 읽히길 바라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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