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만화비평모임 <타카노의 뒷모습>의 진행자로서 작성한 기조 발제문 중 4편을 다듬어 묶은 글이다. 슬프게도, <타카노의 뒷모습>이 진행되던 와중 북스토리에서 출간된 『막대가 하나』와 『노란 책』이 절판되었다.)
『친구(おともだち)』는 1983년 출간된 타카노 후미코의 2번째 단편집으로, 이 이전에 타카노는 1977년에 동인 서클 가쿠쇼칸(楽書館, 악서관)의 일원으로 동명의 동인지에 <꽃>이라는 단편을 게재했고, 그 다음 해인 1978년엔 당시 막 창간한 여성향 BL 전문지 "JUNE" 4호에 <절대 안전 면도칼>을 투고 및 게재하면서 프로 만화가로 데뷔했습니다. 아주 꼼꼼한 작화, 시적인 플롯과 이미지, 매번 다른 화풍과 연출 방식을 엄청나게 빠른 집필 속도 ―그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20편 가까이 되는 단편들을 발표하여 이를 대부분 1982년의 첫 단편집 『절대 안전 면도칼(絶対安全剃刀)』에 수록했습니다― 속에서 거의 성공적으로 수행한 당시의 타카노는 빠르게 인지도와 지지를 얻었고, 일본 만화의 뉴웨이브에 있어 대표주자 중 하나로 인식이 됐어요.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타카노는 금방 일본 만화의 새로운 천재로 떠오른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타카노 후미코와 생년도 데뷔년도도 똑같은 유명 여성 만화가가 한 명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리고 놀랍게도, 첫 단편집 출간 바로 다음 해에 『친구』를 출간했고요. 분량으로만 보면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과 나머지 단편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5편의 수록작 사이에 편차가 큽니다만, 하여튼 타카노와 출판사는 이 작품들을 “친구”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냈습니다. 그럼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죠. 왜 이렇게 묶었을까? 사실 여기의 수록작들은 서로 공통점이 아주 희미해 보이고, '친구'라는 제목도 작품들을 묶는 데에는 큰 역할을 못 하는 것 같은데 말이예요. 제 생각에, 이 5편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무엇보다 '경계 너머에 대한 불안'입니다. <모리코 아가씨의 히나마츠리>에서 아사리판을 정리하는 게 가시적으로 나열된 캐릭터들이 아니라 (마지막의 조그만 칸의 연쇄에서) 문 밖에서 갑자기, 얼굴도 없이 등장한 유모이듯이, 혹은 <상하이의 길모퉁이에서>에서 연인의 이별을 야기하는 것이 명시적으론 해군의 "새로운 일자리"이고 암시적으론 급박해지는 중일전쟁의 전세이듯이, 혹은 <데이비스의 계획>에서 캐릭터들이 갑자기 칸/상황에 연달아 침투하며 서로의 뒷통수를 치는 다소 황당무계한 전개가 이어지듯이(164~172쪽) 말이죠.
달리 말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타자에 대한 불안이 『친구』 전반을 가로지른다고 말이예요. 그리고 그러한 타자는 경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경계를 불쑥 침범하곤 합니다. 여기선 <바비 & 허시>의 자전거 탄 소년들을 한 번 떠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만화에 있어 칸의 성질과도 묘하게 공명하지 않나요? 칸은 어떤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배경이면서 동시에 어떤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단위입니다. 약간 어렵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칸은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 표현과 부재, 재현과 해체, 현시와 잠재가 한데 공존하는 기묘한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칸은 (작가에 있어서든 독자에 있어서든) 항상 무언가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다른 칸(이나 말풍선 같은 만화적 기호)에 의해 그 의미나 이야기가 연결되고 변형되고 대체될 수 있는 성질을 갖게 됩니다. 유동적이고 불확정적인 성질 말이죠.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다른 이미지/다른 칸이라는 보이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에 항상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만화에 있어 칸의 성질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어쩌면 『친구』는 이러한 칸의 성질을 고도로 은유화한 만화들의 선집이 아닐까요? 다만 유동성과 불확정성을 불안정성으로 치환해서 말입니다. (이 다음에 나온 장편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에선 착각과 착시를 유도하는 구조를 좀 더 유연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친숙하게 다루기도 합니다) 바로 아셨겠지만, 저는 『친구』의 핵심이라 할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에 대해선 여기서 논하지 않았습니다. 타자에 대한 불안’들’과 이를 기반 삼아 펼쳐지는 온갖 몸짓의 관계들은 분명 금방 논한 칸의 성질과 맞닿아 있는데 말이예요. 하지만 이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저 관계들에서 흘러 나오는 기묘하고 신비한 시공간 감각을 곱씹고서 다른 곳에 풀어주시기를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진정 뛰어난 만화는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정반대로 만화가 할 수 없는 일에 천착하곤 합니다. 달리 말해 만화가 만화로 성립되기 위해 지불한 대가-곧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작품에 내재적으로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출판 만화의 펼침 면이 주는 시야의 팽창감에 그저 감탄하거나, 칸에 대한 메타적인 연출이 등장하는 장면을 두고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상찬하는 말들은, 적어도 제게는 귀담아 들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보다는 가령 '어른다운' 어른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만화가 겪는 난관을 직시하고 대결하려는 만화에 주목하는 게 훨씬 흥미진진한 일이죠.
이런 맥락에서, 타카노 후미코의 1987년 작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ラッキー嬢ちゃんのあたらしい仕事)>은 꽤나 크리티컬한 만화의 한계와 씨름을 하는 작품입니다. 이 한계가 대체 뭐냐? 바로 미메시스(현실에의 모방)에 있어 단순화라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먼 브라이슨의 고전이 된 미술사학서 『시각과 회화(Vision and painting)』을 빌려 애기해보겠습니다. 서구 전통 회화에는 소실점이란 게 있죠. 이는 그림 속 대상들에 대해 각각 긴 선을 그었을 때 그 선들이 하나로 수렴되어 사라지는 점을 말하는데요. 르네상스 회화에서 이 소실점의 발견은 그냥 색다른 연출 방법의 시작을 넘어 아예 사고 체계의 변화를 일으켰어요. 왜냐하면 이 점은 그림 속 공간과 대상을 어느 지점에 작게 그리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느 지점에 크게 그리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즉 원근법을 분명한 감각이자 개념으로 일깨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여러 의미를 지닌 상징적 대상들을 조화롭게 배치하면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원근법(을 지닌 인간의 시점)을 제대로 소화하지 않으면 그림의 인식적/감정적 효과가 잘 발생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려진 크기를 통해 대상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입체적인 공간 묘사를 통해 그림에 통합적인 의미망을 만드는 등의 "기하학적 질서"가 가치판단의 주요 기준이 됐으니까요(물론 원근법적 구성이 획일적으로 지켜진 건 아니지만 그 중요성과 중심성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소실점에 충실하면 충실할 수록 회화는 (공간 묘사를 제대로 해야 하니) 더더욱 스케일이 커지고 (사물의 거리감을 잘 보여주어야 하니) 더더욱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형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요컨대, 소실점과 원근법은 서구 시각 문화에 있어 복잡화와 그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각적 주체성을 특권화한 거예요.
그런데 (카툰으로서의) 만화는 좀 다릅니다. 19세기에 천출(풍자화, 판화, 길거리 그림, 우키요에, 일러스트 등)로 세상에 나타난 만화는 그림 안에 소실점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큰 역할을 안 했어요. 원근법이 쓰이긴 해도 단순한 수준에서만 쓰이거나 묘하게 흐트러지기도 했죠. 즉 만화는 대상을 아주 단순화해서 표현해도 인식적/감정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장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지배적인 시각 문화에선 할 수 없던 온갖 유머러스하고 상스럽고 비현실적인 표현들이 만화로 확 밀려 들어왔습니다. 대중문화이자 대항문화로서 만화의 역량은 이렇게 태동기부터 생겨났죠.
그런데 왜 이게 한계이기도 할까요? 좀 과한 사례로, 만화 안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아주 조악한 기호 수준의 그림이 아닌 이상) 대부분 원치 않게 작품 내적으로 실제 사물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극사실주의 그림(트롱프뢰유)로 성립되곤 한다는 걸 떠올려 봅시다. 또 원이나 사각형 같이 극단적으로 추상화한 도형으로써 만화를 만들어보는 워크숍에서 수강생들이 작업을 발표하다가 자신이 그린 도형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여 몹시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오쓰카 에이지의 『세계 만화 학원』에 실린 일화도 함께 떠올려 봅시다(260~262쪽). 만화의 역량으로서 단순화는 곧 그려진 어떤 형태를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의 표현으로 너무 쉽게 인식시킬 수 있는, 지나친 무차별주의의 위험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럭키 아가씨>에서 깃털 두 개가 붙어 있는 반구를 그리면 그런 모양의 모자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모자를 줄곧 보여주면서 말풍선으로 (보이지 않는)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묘사해도 충분히 서사가 진행될 수 있는 것처럼요.
<럭키 아가씨>로 돌아와 말해보자면, 이 작품에선 인간과 사물이 너무 쉽게 혼동되거나(45~46쪽 혹은 91~92쪽) 사물이 시각적 전개를 이끌곤 합니다(6~8쪽 혹은 115~116쪽). 나아가 사물들이 자아내는 감각의 한계가 사건을 급격히 전환하기도 하죠(190~195쪽). 이런 연출 방식은 단지 이례적이고 특이해서 흥미로운 게 아니에요. 타카노 후미코가 인간과 사물의 구분 그리고 위상 차이를 앞서 언급한 방식들로 유머러스하게 해체하려 하기에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만화의 어떤 근본적인 한계, 그리고 배치하는 순간 현실의 표현이 되어버린다는 형상성의 한계와 맞닿아 있죠. 타카노는 이런 한계를 직면할 뿐만 아니라 한계를 갖고 놀아봅니다. 말하자면 <럭키 아가씨>는, 사물들이 줄곧 인간을 앞질러 허구적 세계의 주축이 되는 '사물화'의 광경을 잔뜩 담은 만화인 것입니다.
물론 그 광경들이 너무 과시적이어서(유리나 거울 클로즈업-장면 전환의 수법이 짧은 사이에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 또 화려한 연출 기법이 종종 서사의 템포를 난삽하게 만든다는 점 등), 사물화가 방법론 내지 체계로 근사하게 확장된 [막대가 하나]와 [노란 책]에 익숙한 후대의 독자가 보기에 <럭키 아가씨>는 치기 어리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연재할 당시 타카노는 29~30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치기 어린 만화가 굉장히 즐겁게 느껴지는 건 분명하죠. 그건 타카노가 여기서 자신의 재능과 문제의식을 갖고서 최선을 다해 놀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대가 하나(棒がいっぽん)』는 1987년부터 1994년에 걸쳐 발표된 6개의 단편을 수록한 1995년의 작품집으로, 타카노 후미코의 5권째의 단행본이자 1983년 『친구』 이후 3번째 작품집입니다. 참고로 이 사이인 1988년과 1992년에 타카노는 (국내에선 『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란 제목으로 출판된) <루키씨(るきさん)> 시리즈를 (타카노의 작품 중에선 이례적으로) 장기 연재했어요. 버블 시대의 독신 OL 여성을 주인공 삼은 나름 선구적 '치유계'인 이 시리즈로 타카노는 비평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성공한 만화가가 됩니다만(실제로 일본 현지에선 타카노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루키씨> 작가님'에 가깝습니다) 그게 정말 성에 안 찼는지, 『막대가 하나』에는 <루키씨>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세 가지 선례가 떠올라요. '무(無)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한 뒤 저 기념비적인 소설 『마담 보바리』를 펴낸 귀스타브 플로베르, 묘비에 이름도 뭣도 아닌 '無' 한 글자만이 새겨진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극 중 주역인 조지 코스탄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시트콤 <사인펠드>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에 관한 쇼"라 말한 제리 사인펠드와 래리 데이비드요. 이들은 뚜렷한 주제도 교훈도 드라마도 없이, 오직 세부적인 형식과 스타일만으로 강렬하게 구성되고 지속되는 작품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막대가 하나』 역시 이런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무에 관한 만화, 아무것도 아닌 것에 형식과 스타일을 가득 채워 아슬아슬하게, 또 강렬하게 작품으로 성립되는 만화말이죠.
실로 여기에선 드라마가 없다시피 하거나, 되게 꼬인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한 것 같기도 한 이야기만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한편으로 『막대가 하나』의 수록작들은 보면 볼 수록 이상하고 복잡하고 난해하게도 느껴지거든요.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아마도 그건 이 작품들이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같은 책으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사이토 타마키의 말을 빌리자면 "모기의 시점"이고 만화평론가 오혁진의 말을 빌리자면 ‘모더니즘적 과잉’인 자유자재의 시선을 밀어 붙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선의 주체에게 몸과 중력이 없는 것처럼 펼쳐지는 역동적인 앵글(<병에 걸린 토모코>, 56~59쪽/<버스로 네 시에>, 72~73쪽)과 비현실적인 시각성(<오쿠무라씨의 가지>, 186~193쪽)을 밀어 붙이는 만화를 만드는 거죠.
아니, 이 말은 좀 부족하고 부정확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막대가 하나』는 그냥 이미지들이 다채로운 구도로 펼쳐지는 만화라는 게 되니까요. 당연하지만 타카노는 한참 더 굉장하고 어려운 일을 합니다. 잠시 우회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만화를 논하는 방식에 대한 제 작은 불만 중 하나는, 자꾸 어떤 연출을 얘기하면서 카메라를 들먹인다는 거거든요? 거의 대부분의 만화는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로 만드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어떤 이미지의 시각적 구도와 전개를 논하기 위해 '카메라의 시점' 같은 촬영장의 비유를 갖고 오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왜 그런 지는 당연히 알아요. 영화와 만화 사이의 깊은 상호 영향 관계도 있고(특히 영화에서 많은 걸 따온 전후 일본 만화와 그 자장 아래 있는 한국 만화는 영화이론을 상당히 참조하죠) 오늘날의 만화에선 사진적-실재적 구도의 이미지를 잘 구사하는 게 '그림 잘 그림'의 척도가 되기도 했고(타카노 후미코의 경우엔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 100~102쪽의 유려한 '카메라 워크'나, <아름다운 마을>, 41~43쪽의 자연스러운 조명 사용에 주목해주십시오), 만화적 이미지의 위치성(positionality) 즉 이 이미지가 누구/무엇/어떤 의도/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진 거냐 하는 문제는 설명하기 꽤나 애매하고 어렵기 때문에 카메라라는 직관적인 비유를 쓰는 것이기도 하죠(실제로 제 동료 만화가들 여럿이 이런 이유로 촬영장의 비유를 씁니다). 문학비평에서 '인칭'이 항상 문제가 되고, 영화비평에서 '감독의 시선' 같은 말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만은 가시지 않습니다. 제 고집일 수 있겠지만, 저는 만화에서 카메라를 가정할 때 놓치는 게 결국 생기기 마련이라고 봐요. 닐소의 <키미 - 늙은 개 이야기>처럼 공간의 공간성을 어그러뜨리는 작품을 이런 전제에서 어떻게 충분히 논할 수 있을까요. 『막대가 하나』로 국한하자면, <버스로 네 시에>나 <내가 아는 그 아이>처럼 텅 비고 추상화된 공간을 묘사하는 작품은 어떤가요. 또 <오쿠무라씨의 가지>처럼 하나의 행동을 한 페이지에 분절하고 패턴화해서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연출의 작품은 어떤가요(142쪽). 이렇듯 만화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이미지가 사진적-실재적 구도의 기준만으로 다룰 수 없는 무엇이기도 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카메라 얘기를 갑자기 길게 한 건 『막대가 하나』가 바로 이 지점, 즉 만화적 이미지의 위치성에 있어선 카메라나 인간 같은 시선(나아가 심상)의 주체를 전제하거나 지속하는 게 몹시 불편한 일이라는 걸 실천적으로 다루기 때문이에요.
나원영님이 흥미진진한 리뷰로 써주셨듯 타카노는 <병에 걸린 토모코>에선 1인칭의 관습을 통해 1인칭의 구성을 으스스하게 내파시키고, <버스로 네 시에>에선 고전적인 의식의 흐름을 기반 삼아 마키코가 몽상을 늘어 놓는 것 같기도 하고 마키코가 몽상들의 이미지화를 위한 매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는 이중성의 플롯(syuzhet)을 펼쳐봅니다. 혹은 <내가 아는 그 아이>의 주인공의 관점과 서술자의 관점 사이의 미묘한 균열이나, <오쿠무라씨의 가지>의 '사건'과 관련은 없지만 끈질기게 분석되는 사람들의 행동처럼, 칸은 모두 근사하게 성립하는데 서사는 일그러지거나 본말전도가 일어나는 이상한 사태를 벌이기도 하죠. 이렇듯 사건이나 서사의 주체가 교묘히 또 고도로 탈중심화되는 여러 방식들이 『막대가 하나』에 아주 밀도 높게 응집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막대가 하나]에서 “사물화가 방법론 내지 체계로 근사하게 확장된”다고 말씀드렸던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비인칭화/비인간화(Impersonalization)로서의 사물화 말이죠.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선/심상의 주체를 비인칭화/비인간화 내지 탈물질화하여 자유로운 시점을 얻으려는 욕망과, 상상한 모든 것을 시각적·공간적 체계에 복속시켜 만화로써 표현하려는 욕망(저는 <오쿠무라씨의 가지>의 비디오를 비유로서 떠올리고 있습니다)이 조우할 때 어떤 이상하고 애매하며 독특한 인식이 창조될 수 있는 지를 타카노 후미코가 여기서 탁월하게 제시했다고요. 그리고 이는 오프닝 렉쳐에서 란탄 작가님이 하신 말씀, ‘칸과 칸이 연결된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란 인식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결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타카노의 뒷모습> 소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타카노가 제시하는 글자와 그림, 이미지와 이미지, 칸과 칸 사이의 현란한 작용은 독자의 안정적인 관점을 계속 위협하면서, 일상적인 서사조차 매번 긴장하고 볼 수 밖에 없게 하죠.” 이 말의 의미가 이제는 여러분께 와닿았기를 바라봅니다.
『노란 책 - 자크 티보란 이름의 친구(黄色い本 - ジャック・チボーという名の友人)』는 1996년부터 2001년에 걸쳐 발표된 4개의 단편을 묶어 수록한 2002년의 작품집으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표제작 <노란 책>을 위해 제작된 단행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대략 4년을 이 작품에 '몰빵'했다고 밝히기도 했던 타카노 후미코는 후일 한 인터뷰에서 "이걸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라고도 말했죠.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약 10년 간 사실상 현역 은퇴 상태였고요. 물론 여러분도 직접 확인하셨듯, 2014년에 『도미토리 토모킨스(ドミトリーともきんす)』를 발표하면서 『노란 책』이 마지막 만화가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 시기로 오면 타카노는 그림체와 미장센을 철저히 '카툰적'으로 단순화하면서 칸의 구성과 제스쳐 묘사는 최대한 치밀하게 배치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만화를 만들어요(참고로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어시스턴트 없이 제작됐거나, 어시스턴트의 작업을 타카노가 폐기 처분하여 발표되었습니다).
그럼 그 치밀한 배치가 목표로 삼는 게 무어냐? 물론 유소년기적/매니아적 '과몰입'의 경험을 (가령 <Take on Me> 뮤직비디오와 같은 허구의 실체화 없이) 고스란히, 즉 소설의 글씨와 소설이 주는 강렬한 감각과 현실의 한계를 모두 동등하게 가로지르며 충만히 만화화하는 것이었겠죠. 그런데 저는 약간 달리 생각해보고 싶어요. 여기에는 주인공 미치코의 독자성(Readership)만이 주제가 되는 게 아니라, 타카노 후미코의 만화관(觀)이 주제가 되기도 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건 상상된 것을 실재적으로 표현하려는 창작 충동이 아닐까요. 달리 말해 <노란 책>을 독자 입장이 아닌 작가 입장의 만화로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상상된 것을 실재적으로 표현하려는 것, 이는 실로 만화가로서 타카노의 궤적을 관통하는 주요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실재적으로 표현한다는 건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과 좀 다른 일입니다. 후자가 트롱프뢰유나 사진 같은 걸 지칭한다면, 전자는 상상을 실현시키는 걸 지칭하죠. 한데 '상상한'이 아닌 '상상된'으로 썼듯이, 타카노는 적극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아니라 (<버스로 네 시에>의 경우처럼) 상상이 멈출 수 없이 터져 나오거나 그것이 형식으로 육화되는 광경에 큰 관심을 가집니다. <절대 안전 면도칼>에서 자살하려는 소년이 계속 퍼포머티브한 자살을 추구하는 것처럼, <타나베의 덩굴>에서 치매에 걸려 자타에게 '어린 애'로 여겨지는 노인 여성이 쭉 조그마한 소녀로 그려지는 것처럼,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에서 가극의 내용과 쓰유코의 주관적 서사가 뒤얽히면서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완전히 불확실해지는 것처럼, <병에 걸린 토모코>에서 종잡을 수 없이 난삽하게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1인칭인 ‘듯한’ 유령적 시점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말이죠.
앞서 예시로 든 경우들에서 볼 수 있듯, 타카노에게 있어 상상된 것을 실재적으로 표현한다는 건 마냥 긍정적인 현상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꽤나 불온하거나 기이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죠. 그리고 이는 『노란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를 살아가는 소녀가 소설에 약 1년에 걸쳐 소설에 아주 깊이 감화되었다 빠져 나오는 과정을 '주로' 보여주는, 설정에 있어서도 엄청 노골적인 <노란 책>도 그렇지만 타키와 스네우치가 추리의 과정에서 상상과 행동을 공유하게 된 후(109~111쪽) 비약해서 결혼까지 가는 <마요네즈>도, 모든 캐릭터들의 불온한 상상이 결국 모든 "인연"을 흐지부지로 만드는 <2-2-6>도 그렇죠.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카노 후미코는 상상의 실재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복합적인 관계들의 역학에 주목해서 아예 그걸 자신의 만화관으로 삼기까지 했다고 말이죠. 때론 상상의 공유가 그 모든 불만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고, 때론 상상의 불일치가 모든 가능성을 붕괴시켜버리는 그 역학이요. 그리고 이건 당연하게도 창작의 충동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창작이란 어떤 경험이나 생각(ex: 쇼타가 퍼리 아저씨 역키잡하는 거 보고 싶다/인터넷 생활이 내게 안겨준 삶의 감각을 만화로써 표현하고 싶다)을 상상의 영역에서 소화한 뒤 이를 실제의 매체(조각, 캔버스, 종이, 인터넷...)에 표현하는 일일 겁니다. 여기서 '상상의 영역에서 소화하는 것'과 '실제의 매체에 표현하는 일'이 동등하게 중요하며 또 때로 뒤섞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술 강의 20』이라는 근사한 책에서, 저자 알랭은 예술에 있어 상상력의 과대표화된 위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한 부분을 발췌해보겠습니다.
"시인은 오히려 플롯에서 소리를 내듯이, 자신 속에서 소리를 끌어내고, 미리 소리의 시구에, 음의 시절에, 예상되는 소리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이 아직 모르는 말을 출현시키려 합니다. (...) 그렇다고 시인이 계획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건축가나 화가가 계획을 갖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그것으로 시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정반대로 노래 자체, 음절의 수, 각운에서 나오는 뜻밖의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소음에서 나오는 이미지이며, 반성이 관념을 비추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념을 비추는 이미지입니다. 진정한 시에 그런 기적은 불가피합니다. 시인에 있어 관념의 출처는 자신의 몸이거, 조화를 이루는 몸의 움직임과의 만남이며, 그래서 그는 시인인 것입니다. 모든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것은 실행 그 자체이지 계획이 아닙니다."(103쪽)
요컨대 알랭은 제작 과정의 '신체성', 즉 예술가의 상상이 엄연한 실재로서의 매체/모델/텍스트와 상관하면서 마모되고 수정되고 우회되는 과정의 고군분투가 예술성의 근원이라고 역설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한계로서 유한성을 인지하고 이와 대결하는 것으로서 창조랄까요? 여담이지만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전체적으로 문장과 문단의 앞뒤가 어색하게 읽히지 않게끔 생각을 정돈하는 고군분투를 하고 있답니다.
『노란 책』에서 타카노는 창작의 이런 성격을 아주 크리티컬하게 소화합니다. 소설책의 글씨를 파편적으로 몇 번씩 직접 보여주거나, 타인의 사소한 제스쳐를 자주 삽입해 리듬을 이완시키고 육체성을 환기하는 (33~36쪽에서 아빠의 제스쳐들) 등 상상된 것을 실재적으로 표현하려는 (독자 미치코를 넘어) 작가 자신의 의지에 여러 변수를 도입하면서, (다중적인 차원에서) 상상의 한계들과 대결하고 뒤엉키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서 스스로를 (한계들을 포함한) 세계 내적으로 격렬하게 구축하는 픽션을 만든 거죠. 이 작품의 제작에 타카노 후미코가 그토록 매달렸던 건, 어쩌면 그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충동과 적나라하게 대면하고 격렬히 대결하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창작자에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제이며 어려운 일이요 과업이니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노란 책』은 진정 모험적인 만화, 모험 자체인 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