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괴담에서 <큐어>에 이르기까지
(아래는 2025년 2월 4일 출간된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55호에 실린 원고를 옮긴 글이다.)
악마는 자기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인간이나 짐승의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악마는 자기가 흠집을 내고, 설명할 수 없는 범죄들로 유혹하는 영혼들 속에 거처를 정하기만 하면 돼. (…) 때로는 악마와 협정을 맺으려는 의지만으로도 우리들 마음속에 악마가 나타날 수 있는 게 틀림없어.[1]
지난 해 영화 〈파묘〉를 보던 도중이었다. 심드렁한 영화에 지쳐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대사가 나를 확 붙잡았다. “화림아, 이거 하지 마라. 일본 귀신이다. 아무 관련 없어도 그냥 죽인다고, 근처만 가도 다 죽인다고!” 영화 후반부 무당 캐릭터 광심(김선영 분)은 자신들이 대적해야 할 상대를 깨닫고서 위기감에 이리 일갈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일본 귀신들은 뚜렷한 분별없이 근접한 모든 대상에게 저주를 퍼붓나? 반발심 보다는 위화감이 즉각적으로 들었는데, 사실 당시의 나는 일본 고전 괴담-즉 옛 일본 귀신 및 요괴와 그들의 맥락에 대해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대사를 제대로 곱씹어본 것은, 나중에 일본 괴담의 역사를 약간 공부한 이후였다.
일본사에서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괴담이 급증한 건 헤이안 시대(794~1185) 초기로, 스에키 후미히코에 따르면 이 당시 “정치적 음모에 의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영혼이 재액을 초래한다는 생각”과 “개인의 발병 및 돌연사도 종종 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생각”이 각각 귀족과 민간 모두에 퍼졌고, 여기서의 “악령에는 망자의 영혼 및 적대적 존재에 대한 저주, 생령(生靈), 갖가지 악마적 존재가 포함되었으며, 그에 대해서는 밀교적인 주술로 대항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 헤이안기부터 중세에 걸쳐 원령설을 포함한 재앙설은 널리 수용되어 일본에서는 천견설[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는 생각-인용자 주]보다도 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2] 그리고 이때의 악령(보다 정확히는 영혼의 나쁜 기운)을 포괄적으로 흔히 모노노케(物の怪)라 불렀으며, 시대가 흐를수록 명명의 범위가 넓어져 그 영혼이나 병 자체를 모노노케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파묘〉의 저 대사는 타당성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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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저 아래』, 장진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179~180쪽.
[2] 스에키 후미히코, 「재해와 일본의 사상」, 고희탁 옮김, 《일본비평 7호》, 그린비, 2012, 28~29쪽. ]]
하지만 이는 잡귀들에 맞서 치병(治病)의례에 힘썼던 한반도의 무속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또한 일본 전통 괴담에는 우리의 통념대로 키요히메(清姫)[그림 1][3]나 잇탄모멘(一反木綿)[4]처럼 무차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귀신과 요괴가 적지 않으나, 지진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요괴로 유구하게 인식되던 큰메기(大鯰, 오나마즈)가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직후 제작된 여러 나마즈에(메기 그림)[그림 2]에서 “잘못된 세상에 경고를 주거나 욕심 많은 부자들을 혼내주는 존재로”, 심지어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출해 주는” 존재로 그려지며 점차 긍정적인 성격을 얻기도 한 것처럼[5] 세월 속에서 상이한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성격과 위상이 달라지는 초자연적 존재도 여럿 있기에, 마냥 일반화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성싶다. 하면 이런 생각도 든다. 무차별적인 악행의 주체로서 일본 귀신(이란 통념)은 의외로 최근에, 현대에 구성된 상(狀)이 아닐까? 아마 당신도 그렇겠지만, 저 대사를 듣고 내가 곧장 떠올린 것은 사실 이른바 J-호러로 성급히 묶인 공포영화 〈링〉 시리즈(1998~2000)의 사다코나 〈주온〉 시리즈(2000~2009)의 카야코였으니 말이다.
두번째 에세이[6]에서 나는 “악의 재현에 한 근현대적 분화”를 예견한 사례로서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논했으며, 또한 여기서 제시된 재현 방식 중 하나로 “내적인 심리나 이해관계를 넘어 폭력에 대한 순수의지로서 ‘악’에 근접”하는 것을 꼽았다. 이는 폭력을 통해 사리사욕이나 특정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악당’을 구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무수한 프로파간다에서 볼 수 있듯, 그런 것은 오히려 악에 대한 가장 쉽고 편리한 재현 방식이다) 스스로가 없는 ‘악’, 오직 폭력과 증식만을 열심히 수행하는 비인격적 의지로서의 ‘악’을 통합적 자아를 지닌 대상으로 호명하지 않으면서 재현하려는 시도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학에 있어 “사고의 한계(…) 존재나 생성이 아니라, 비존재나 공허로 이루어진 한계”[7]로서 악마학(Demonology)을 밀고 나간 경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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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와카야마현의 설화에 나오는 여성 귀신. 이에 따르면 그는 안친(安珍)이라는 미남 승려에게 연심을 품고 집착했으나 거듭 거절당하자 엄청난 원념으로 인해 불을 뿜는 뱀이 되어 안친을 추격했으며, 도조지(道成寺)라는 (현재도 실재하는) 절에 다다라 범종 속에 숨은 안친을 끝끝내 찾아내어 결국 자기 몸으로 범종을 감은 뒤 불을 뿜으며 안친을 태워 죽였다고 한다.
[4] 카고시마현 키모츠키쵸의 설화에 나오는 요괴. 이에 따르면 기다란 흰 천의 모양새를 한 채 날아다니다 지나가던 사람을 덮쳐 질식사시키거나 어디론가 끌고 간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인 기원이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즈키 시게루의 저 유명한 만화 겸 애니메이션 〈게게게의 키타로〉에 조역으로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5] 박병도, 「일본의 요괴개념과 재해요괴: ‘나마즈’와 ‘아마비에’를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제43호,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22, 123쪽.
[6] 윤아랑, 「『라모의 조카』라는 예언」, 《미스테리아》 54호, 엘렉시르, 2024년 12월~2025년 1월, 136~143쪽.
[7] 유진 새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철학의 공포』, 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2, 73쪽. ]]
『라모의 조카』가 예언으로 던져진 이후 19세기 서구 소설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악당’이라고 부르기 석연치 않은 형상들이 종종 출몰했다. 직접 폭력을 저지르진 않으면서 주변에 파국(의 기운)을 퍼트리는 기묘한 ‘객체적(objective)’ 캐릭터.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1842)의 붉은 가면[그림 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1872)의 니콜라이 스타로브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1898)의 유령들은 그 중에서도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사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자아를 지닌 (혹은 ‘인간적’ 의미에서의 자아라는 게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이들은 의뭉스럽고도 굳은 침묵과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 자체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에 파국을 퍼트렸다.
그리고 약 한 세기 이후, 1990년대의 일본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형상들이 무더기로 출몰했다. ‘호러 붐(ホラーブーム)’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일 만큼 온갖 분야에서 공포를 표방하는 작품이 나온 이 시기에, 인간을 고통에 빠트리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 마냥 우직한 ‘악당’이 새로 힘을 얻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과 영화를 아우르는) 〈링〉 시리즈[그림 4]와 (비디오와 영화를 아우르는) 〈주온〉 시리즈를 포함해 이토 준지의 만화 「토미에」 시리즈(1987~),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만화 『좌부녀』(1993), 무라카미 류의 소설 『미소 수프』(1997),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큐어〉(1997) 등에 등장한 ‘악당’들은, 각기 다른 종(種)에 속하긴 하지만(귀신, 연쇄살인마, 정체불명의 생명체 등…) ‘평범한’ 인간으로선 이해도 해결도 모방도 불가능한 악행을 참으로 열심히 지속한다는 점에서 ‘악’에 대해 서로 같은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가령 〈링〉에서 비디오 저주가 사다코의 유해를 수습하든 말든 상관없이 세간에 계속 퍼지도록 설정된 것처럼, 혹은 『좌부녀』에서 ‘여자’의 의도와 동선과 정체 모두 불가해의 영역에 남는 것처럼, 이 ‘악당’들은 별안간 일상(적 공간)에 나타나 기괴한 몸짓과 함께 인간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준 뒤 이를 다른 인간에게 한없이 반복한다. 코스믹 호러적인 폭력이 일상적인 풍경에서 펼쳐질 때의 공포감은 참으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무차별적인 악행의 주체로서 일본 귀신(이란 통념)”은 이들의 이런 강렬한 성질로 인해 성립된 게 아닐까? 무엇이든 마찬가지긴 하지만, 특히 괴담은 성공적인 아웃풋에 따라 ‘전통’이 사후적으로 구성되니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한국 귀신들의 모습이 대부분 〈전설의 고향〉(1977~1989)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떠올려보자)
사실 20세기에 있어 몇몇 예리한 예술가들은 이런 ‘악당’의 구현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다. 순수의지로서 ‘악’을 재현의 대상으로 여긴 이들에게는,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국면의 프로그램으로서 (비)가시적이고 (비)일관적인 ‘악’을 직접적으로 더듬고 탐구하는 것이 보다 시급하고 필요한 작업으로 여겨진 것이다. 헤르만 브로흐가 소설 『몽유병자들』(1931)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가치들의 붕괴(Zerfall der Werte)”를 겪으며 (이를 제도화하는) 잔혹한 근대에 포섭되는 군상들/사유들을 핍진하게 표상한 것처럼, 혹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영화 〈현기증〉(1958)에서 각각의 여성들의 이미지를 홀연히 가로지르며 그것들(과 여기에 홀린 남성)을 사악하게 조종하는 유령적 의지를 (비)형상화한 것처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악의 재현’의 시도들이 이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인 불가능성과 별개로) 구체적인 가시성의 신체를 지닌 ‘악당’을 순수의지로서 ‘악’에 근접한 존재로 구축하는 작업은 20세기 들어 점점 세속화되었다. 달리 말해, 이른바 ‘장르’가 이런 작업들을 위한 자리가 된 것이다. 구시대적 의미에서의 ‘문화’ 바깥에 있는 대중매체들을 장소로 삼으며 그에 걸맞은 익숙하고도 즉각적인 방식과 형태를 갖추길 꾀한 픽션들은 여기에 큰 몫을 했다. (재미의 자양분과 장소를 서로 교환하고 다졌다는 점에서 이는 양쪽 모두에 이득이었을 게다) 여러 장르 소설이나 만화, 영화, 게임 같은 대중매체 속 악당들을 떠올려보라. (니체의 ‘초인(Übermensch)’ 개념에 대한 오해와 함께) 고된 ‘수련’을 일상 삼고 표현을 철저히 제어하는 냉철한 범죄자나, 인간의 이해와 법칙이 통하지 않는 절대적 타자로서 귀신 및 괴물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광경들이 우리 머리 속을 무수히 스쳐 지나간다. 이들의 정체성은 막무가내이며 비인격적인 ‘악’의 성질을 적당히 소화하고 수용자에게 납득시키려는 세속적인 극적 장치(로서 설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8]
일본의 ‘호러 붐’을 이룬 작품들은 보통 이런 방향에 속했다. 가령 〈주온〉의 카야코는 집이나 어두운 학교뿐 아니라 이불과 옷 속에서 불쑥 출몰하곤 하며, 심지어는 분신술을 쓴 것처럼 한 곳에 여러 명이 나타나기도 하지만[그림 5], 관객인 우리로서는 이 괴이한 행위들을 강력한 귀신으로서 그의 능력에 따른 것으로 적당히 납득할 수 있다. 즉 세속화의 과정 속에서 이 작품군의 ‘악당’들은 ‘악’ 자체를 (전통적인 의미에서) 캐릭터화한 형상이 된 것이다. 물론 앞서 얘기했듯 이런 방식 자체는 나름 평범하고 그만큼 흔하지만, (가령 〈텍사스 체인톱 대학살〉(1974)에서 사이 좋은 가정과 인간 도살장이 하나인 것처럼) 정상성 사회의 가치체계가 교란 및 역전되는 광경을 이런 ‘악당’과 더불어 극화한 1970년대 미국 공포영화들[9]과 달리, 일상에 별안간 엄습하는 불가해한 폭력을 극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는 점에서 ‘호러 붐’이 지닌 특색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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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편 이렇게 극도로 비인간적인 ‘악당’들은, 사람들이 보통 무엇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또 그것에서 어떻게 ‘악’다움을 찾거나 덧붙이는지를 스스로 육화한다. 달리 말해 어떤 ‘부정적인 것’이 어느 수준에서 ‘악당’을 ‘악당’답게 보이게끔 만드는지에 대한 모종의 실험을 추동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섯 번째 에세이에서 DC 코믹스의 전설적인 악당 캐릭터 조커를 경유해 나누도록 하자.
[9]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다음을 참조하라. 로빈 우드,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이순진 옮김, 시각과 언어 펴냄, 1994, 115~123쪽.
[10] 왜 하필 1990년대에 이런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나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 버블 붕괴와 옴진리교 사린 테러 사건 등에 의해 드러난 일본 사회의 ‘해결불가능성’이 호러 장르와 자연스럽게 뒤섞인 것이라는 다카하시 도시오의 『호러국가 일본』(김재원 외 옮김, 도서출판b, 2012)이나, 70년대의 국제적인 오컬트 붐과 80년대의 일본 내 종교 난무의 잔해들이 일본 문화시장 안에서 세기말적 코드 그리고 ‘정신세계 붐’과 만나 패스티시화된 결과라는 『오컬트 행성: 1980년대, 또 다른 세계 지도 (オカルトの惑星: 1980年代、もう一つの世界地図)』 등이 그 예시일 것이다. ]]
그런데 ‘호러 붐’의 일원으로 묶이면서도 나머지와 궤를 전혀 달리하는 독특한 케이스가 있다. 영화 전체가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큐어〉의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형사 타카베(아쿠쇼 코지 분)는 최면 암시를 통해 엽기적 살인을 연쇄로 교사한 범인 마미야(하기와라 마사코 분)를 다시 취조하고자 그가 격리 감금된 시설을 찾고, “당신의 얘기가 듣고 싶어”라는 마미야의 반복적인 요구에 응하듯 그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름 모를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평생 돌보는 건 자신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며, 마미야 같은 범죄자가 태연히 잘 사는 반면 형사로서 열심히 살아온 자신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 그렇기에 마미야 너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런 속내를 들은 마미야는 (조롱인지 진심인지 모를 어투로) 그에게 감탄한다.
이에 타카베는 “그럼 이제 네 놈 차례다”라며 취조를 시도하고, 마미야가 말이 없자 (그의 최면 도구로 쓰이던) 라이터를 키며 조롱하듯 응수한다. “라이터가 없으면 지껄이지 못하나?” 이 순간 난데없이 창 밖이 어두워지고 세찬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금방 천장에 물이 고인다. 거기서 샌 물방울은 기이하게도 딱 라이터를 향해 계속 떨어져 곧 라이터 불은 꺼지고[그림 6], 거의 어둠이 내린 화면 속에서 (사실 물을 이용해서도 최면을 걸 수 있는) 마미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카베에게 최면을 걸려 시도한다. “기분 좋게 텅 비어버려... 다시 태어나는 거야, 나처럼.” 이 장면은 〈큐어〉를 비롯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에서 ‘악의 재현’이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마미야가 마법에 가까운 최면 능력을 가졌음을 알고 있으며 또 납득도 하지만, 그가 날씨를 조종하거나 염력을 쓸 수 있다고는 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전혀 설명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큐어〉 속에서 마미야는 그 자체론 평범한 신체를 지닌 인간으로 묘사된다. 하나 한편으론 아무도 없던 해변에서 갑자기 (트릭 필름 혹은 점프 컷의 수법으로) 솟아나기도 하고, 그의 필요에 부합하는 자연 현상이 딱 맞게 일어나기도 하는 등 마미야를 초자연적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신기하고도 비합리적인 순간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마미야는 이례적인 캐릭터가 전혀 아니다. 〈카리스마〉(1999)의 나무, 〈회로〉(2001)와 〈절규〉(2006)의 유령들, 〈크리피〉(2016)의 연쇄살인마 니시노, 〈산책하는 침략자〉 연작(2017)의 외계인들 모두 극 안에서 설명되는 능력과 설명되지 않는 사건 사이에서 의뭉스럽게 진동하는 ‘악당’으로서 구현된다.[11] 이렇듯 기요시는 영화에 있어 물의 흐름, 지진,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날씨와 명암의 변화, 공간의 구조 같은 ‘객관적’ 사건이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걸 넘어) 서사 속 사악한 상황과 깊이 연동하여 왜곡되게끔 만들지만, 이것이 ‘악당’의 명시적인 영향으로 환원되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호하고 불가사의한 관계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불안? 단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을 넘어, 영화 속 세계가 이미 자연의 수준에서 ‘악’에 침윤돼 근본적으로 기형화되었다는 공포로서 불안. (〈카리스마〉의 반복되는 키워드를 따라) 달리 말하자면 의지로서의 ‘악’이 이미 “세상의 법칙”이라는 불안. 자신이 “터무니없는 비현실”[12]이라 부른 부자연스러움의 미학을, 기요시는 주로 이렇게 순수의지로서 ‘악’과 결부시켜 육화한다. 다만 서둘러 덧붙이건대, 기요시의 ‘악당’들은 ‘악’ 자체를 캐릭터화한 형상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들은 제 존재 자체로써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악’의 공기를 홀연히 퍼트리고 구체화하는 위험한 감염자와 같다. 마미야가 죽고 나서 그의 능력과 묵시록적 세계관이 타카베에게 불현듯 옮겨갔듯이, 혹은 TV 드라마 〈속죄〉(2012)에서 처음의 살인사건이 거기 연루된 이들의 여생에 예기치 못한 악영향을 파급시켰듯이 말이다.[13]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장르적 컨벤션으로 ‘악당’의 형상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비)가시적이고 (비)일관적인 ‘악’을 직접적으로 더듬고 탐구하”는 복잡한 기획을 제 도전과제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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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실 제작순으로만 따진다면 〈큐어〉의 마미야는 여기서 언급한 기요시의 다른 ‘악당’들에 있어 원형이라고 봐야 할 테다.
[12]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홍지영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03쪽.
[13] 서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성격이 점점 유사해진다는 도플갱어와 전염의 모티프는 기요시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조하라. 하스미 시게히코, 「’선악의 피안’에서 –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 『영화의 맨살』, 박창학 옮김, 이모션 북스, 2015. ]]
말년의 임마누엘 칸트는 (‘제목이 곧 내용’인) 『유작(Opus Postumum)』의 한 글뭉치에서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우리 모두가 미친 건 아닐까?”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과 『유작』 같은 생애 끝자락의 저작들에서야 뚜렷이 나타난 것이지만, ‘판단’을 평생의 문제로 삼았던 그는 근대의 문턱에서 (상호주관성의 기형적 부재로서) 광기를 개개인의 주관적 말썽이 아닌 의학적·역사적·보편적 악습(과 그 효능)으로서 바라보았던 게다. 다만 그것이 늘 (미치광이라는) 특수한 주관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평범한’ 사실이 칸트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 같다.[14] 그리고 기요시는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영화작가로서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런데 〈스파이의 아내〉(2020)부터 최근의 그는 ‘악’과 ‘악당’ 사이의 관계를 이전보다 더욱 불확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근작 〈차임〉(2024)에서 일상 곳곳에 박힌 괴이들을 망연히 맞닥뜨리던 주인공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츠오 분)는 집 초인종 소리를 듣고서 인터폰을 바라본다. 거기엔 구형의 무언가가 있다[그림 7]. 움직이고 있는 형상인지 아니면 노이즈 낀 화면인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무언가는 기계 소음만을 내며 마츠오카의 시선을 뺏는다. 이 의뭉스럽게 공포스러운 장면에서 우리가 본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도 감이 안 잡히니 허황된 생각도 든다. 어쩌면 〈차임〉의 세계 속 ‘악’이 직접 마츠오카를 찾아온 건 아닐까? 그러니까 기요시는 여기서 ‘악’의 (보이지 않을) 얼굴을 소묘해본 게 아닐까?
사실 정말로 공포스러운 것은, 그의 영화에 있어선 이런 허황된 생각도 완전히 부정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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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광기에 대한 칸트의 사유를 간략히 정리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Polianskii, Dmitrii V. “Kant’s concept of madness, psychiatry and anti-psychiatry.” SHS Web of Conferences 161 (2023): 07007. http://dx.doi.org/10.1051/shsconf/202316107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