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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이후의 '악의 재현' 재고

by 그냥저냥 ㅏ랑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59호(2025년 9월호)의 연재 기획 VILLAIN 코너에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글을 실었다. 제목은 「재현의 곤란: 새로운 삼각형을 더듬으며」로, 여기서 나는 윤석열 정부의 12.3 비상계엄/쿠데타와 그 이후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과도하게 드러난, 근현대적 '악의 재현'의 방식들을 불충분하게 만드는 새 조건들에 대하여 숨가쁘게 논해보았다. 달리 말해 (사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비상계엄의 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 동시대 픽션의 정세를 벌써 혹은 드디어 정리한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로서 극단화, 길을 잃은 대안문화, 진부하고도 굳건한 ‘빌런’들의 득세,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거듭 찾아가야 하는 동시대의 픽션... 물론 이는 나의 문제의식을 간단히 서둘러 정리한 것에 불과하며, ―이제와서 후회되는 것은, 비상계엄 직전의 정치적 맥락은 지우고 윤석열만을 악마화한 것으로 비칠 것 같다는 점, 그리고 '빌런'의 오늘날 성격에 대한 얘기를 눙친 감이 있다는 점이다― 보다 구체적이고 신중한 논의는 훗날의 단행본과 그 사이에 나올 이런저런 작업들에서 풀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필 이 글이 발표되는 타이밍이 찰리 커크의 죽음 이후라는 게 참 기구하단 생각도 드는데, 그런 만큼 여러 독자들이 읽고 적극적으로 비판을 더해주면 좋겠다. 약 1년 동안 《미스테리아》에 이 주제로 연재를 할 수 있어 참 즐겁고 좋았다. 함께 해주신 독자와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후 연재분을 기반으로 나올 책도 기대해주시기를 바란다.







"마지막은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날 밤 나는 (쪽프레스와 함께 기획 및 진행하고 있는) 만화비평모임의 여섯 번째 기획 ‘윤아랑의 만화읽기: goat의 그래픽노블을 중심으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멤버들과 신나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후 11시가 임박하여 급히 자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멤버가 복잡한 표정으로 폰을 보더니 그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친구들한테 계속 카톡이 오는데, 비상계엄이 떨어졌다는데요?”"


"그런데 왜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가.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쿠데타와 탄핵 정국이 그간 굳어 있던 내 생각들을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악의 재현에 대하여, 나는 정리된 생각들을 아예 새로 정립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비평가로서는 외면하고 싶었던 세계의 변화를 마주해야만 할 시간이 왔다고 쓰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 초유의 사태를 이루는 역학을 지금까지 논한 악의 재현의 방식들로써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은 하겠지만, 어딘가 조금씩 불충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가령 처음 체포된 순간에도 찰나의 뒤통수만 포착됐을 뿐 우리로선 그가 의도하지 않은 모습과 말소리를 전혀 보고 들을 수 없던, 즉 변명도 입에 발린 말도 없이 자기 이미지의 매체적·대중적 현시를 줄곧 통제하려 한 윤석열의 유령적인 면모는 언뜻 사악하고 완고한 권력으로서 ‘악’의 실체화된 표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탄핵심판 변론에서 즉석으로 김용현과 말을 맞추려 애쓴 광경처럼 모든 일에 얼렁뚱땅으로 임하는 그의 어리숙한 면모는 한편으로 그 자신을 찌질하고 진부한 (시쳇말의 용법으로서) ‘빌런’으로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큰 곤란 중 하나는 책임자나 구심점을 가려내는 일이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폭력의 행위는 더욱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폭력의 책임을 질 근원들은 끊임없이 숨고 달아나 잘 잡히지 않는다. (온라인 진보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SNS 커뮤니케이션의 익명성, 파편성, 탈중심성은 이런 방식으로 극단주의에 수혜를 준다. 일본 만화 〈단다단〉에서 부분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요즈음의 악행은 명확한 지휘자(로 지시되는 자)와 조직 없이 (자기 충족적인) 정동과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자본을 동력 삼아 개별적으로 작동하고 모였다가 해체되고 다시 출현하길 반복하는 ‘아웃소싱’과 ‘전염’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속에서 분산되는 것은 폭력의 책임만이 아니다. 지난 해 이스라엘의 틱톡 크리에이터들이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을 조롱하는 ‘챌린지’를 떼거지로 게시했듯이, 우리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온라인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폭력에 대한 사용자의 망설임과 죄의식 역시 빠르게 분산된다. 더더욱 영악하게 다성화(多聲化)하는 ‘악’."


"바로 앞에서도 논했지만 한때 진보~좌파들의 문화적 전략이었던 도발과 유희를 오늘날에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대안우파들이 아니던가? 노무현을 표상하는 기표 일체를 사회적 금기로 만들어버린 일베와,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며 페미니즘 운동의 안팎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던 게이머게이트 등의 초기 ‘밈 전쟁’은 카일 와그너가 예언했듯 이 전략이 보편화되기 위한 과시적 전초전에 불과했다. 적과 동지의 분간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심지어 (온라인상 극우 남성 커뮤니티와 래디컬 페미니스트 커뮤니티가 그러하듯) 서로를 닮아가고 의도치 않게 연합하기도 한다. 그러니 퀴어 아티스트 이반지하의 (비상계엄으로부터 며칠 후에 진행했던 〈이반지라디오〉에서 나온) 말처럼 “위기는 곧 [기회가 아닌] 위기”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신중하고 정의로운 발화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상식’으로서 진보주의’라는 형용모순이 자연스러워진 뒤틀린 시대."


"지난해 (당연히 비상계엄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 〈베테랑 2〉를 한번 떠올려보자. 여기에는 절대악의 화신이자 서도철(황정민 분)의 거울상인 해치(정해인 분)를 비롯해 여러 ‘악당’들이 등장하지만, 유독 취급이 다른 ‘악당’ 캐릭터가 하나 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을 처단한다’란 이유로 해치를 추종하는 사이버 렉카 박승환(신승환 분)이 그것으로, 연쇄살인과 이에 대한 대중적 호응에 편승하여 이익을 챙기는 박승환은 물론 징그럽고 악독한 캐릭터로 묘사되긴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다른 '악당'들에 비하면 (스튜디오에서 유튜브 촬영을 할 때 상반신만 양복을 입고 하반신은 팬티 바람으로 있는 게 드러나는 식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들이 나오는 등, 그 구차함으로 말미암아 ‘개그캐’스럽게 다뤄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본작의 감독 류승완은 요즈음 활개를 치는 사이버 렉카들이 악당도 못 된다며 비꼬고자 박승환을 이리 묘사했을 테다. 하지만 과연 이 정도로 괜찮을까? 우리네 현실을 돌아보면 박승환과 같이 구차하고 진부한, 그러나 굳건하게 사회를 망가트리는 ‘빌런’들이 훨씬 많고 훨씬 실질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하다’라거나 ‘진지하지 못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라는 등의 멋 모르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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