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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r 02. 2019

만화는 무엇을 잊고 있나?

<가담항설>과 그 주변의 변모하는 풍경들

한참 랑또의 <가담항설>을 '정주행'하던 도중, 문득 어떤 기묘함을 느꼈다. 그건 디지털 문화의 (끝없는) 변모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령 넷플릭스에서 <킹덤> 전 에피소드를 한 번에 몰아보거나 유튜브에서 한참 디깅하는 것과 이 만화를 보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판단에서 생성되는 동시대적인 느낌으로, 나를 깊은 고민으로 이끌었다. 왜 하필 <가담항설>을 보면서 이러한 기묘함을 느꼈는가? 물론 답안은 이미 나와 있다. 나는 <가담항설>의 효과, 다시 말해 움직이는 프레임, 모션을 보면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 답안에 제대로 도달하기 위해선 좀 긴 서술이 필요하다.      


만화의 현재를 논하는 데 있어 플랫폼이든 축제든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가장 논쟁적인 곳은 네이버 웹툰일 것이다. 이 말은 (국내 최대의 만화 유통처라는) 플랫폼의 규모나 (소년만화, 재난만화, 사회비판물, 일상물을 포괄하는) 장르의 다양성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무료 서비스의 문제점이나 조회수 위주 정책으로 인한, 작품들의 전반적으로 낮은질 같은) 시스템의 마찰에 대한 게 아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디바이스의 발전으로 인해 디지털 문화의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다각화되는 작금에, 거기에 걸맞는 디지털 만화의 제작 및 경험 양식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 네이버 웹툰은 한 치의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무빙툰(프레임 내부의 요소 혹은 프레임 자체가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만화)에서 시작해 모바일 디바이스에서의 접근을 절대시해 제작되는 스마트툰(터치만으로 페이지를 여러 방향으로 전환하거나 확대할 수 있는 등 수용자를 위한 다양한 효과가 가미된 만화), 컷툰(개개의 컷을 페이지로 치환해 그 컷마다 댓글을 달거나 SNS에 공유할 수 있는 만화), 플레이툰(실상 애니메이션과 다를 게 없는 만화), 그리고 지난해엔 부분적인 AR 효과까지. 여기에 이제는 거의 무빙툰 감상의 기본적 효과가 된 햅틱 효과와 효과음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포맷들의 폭풍 속에서 세로 스크롤에 따라 칸=이미지들을 내려보던 기존 웹툰의 경험은 빠르게 ’기존’의 위치를 해체당한다.      


멀티미디어로서의 만화? 누군가는 “이걸 만화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우울하게 따져 물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것이야 말로 만화의 미래다”라고 환희에 찬 채 외칠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 거의 매체특정성 테제가 눈에 띄게 설 자리를 잃고 있는 포스트 미디어의 양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이러한 흐름에 마냥 휩쓸리기만 하며 당대 만화 비평의 패착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하여튼 분명한 사실은, (예술 매체로서의) 만화의 힘을 분절된 칸과 칸 사이의 화학작용에서'만' 찾는 믿음과 시도들이 네이버 웹툰의 여러 기술적 모색 이후인 지금엔 거의 통용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색이 제대로 된 ‘진단'을 동반하고 있느냐는 별개이나, 그럼에도 네이버 웹툰이 만화의 현재를 논함에 있어 수 많은 논쟁거리를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어쩌면 네이버 웹툰은 동시대 시각문화에 있어 넷플릭스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네이버 웹툰의 모색들은 현재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윤리적 태도를 가늠하거나 제시한다기보다는, 현재를 이루는 현상들을 조작해 ‘(만화) 이미지 일반’이라는 말의 기준을 바꾸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 흐름 안에서 무빙툰으로서의 <가담항설>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리라. 하지만 앞서 말한 “긴 서술”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긴 서술”을 위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만화의 전환을 ‘미래‘ 혹은 ’죽음’이라는 성급한 선언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보다 명확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좌 옥수역 귀신, 우 봉천동 귀신

네이버 웹툰이 해마다 만화가들을 모아 기획하는 (그리고 네이버 웹툰의 신기술 실험장이 되고 있는) 릴레이 단편선의 효시가 된 납량특집 ‘2011 미스테리 단편’의 일환으로 만화가 호랑이 <옥수역 귀신>과 <봉천동 귀신>을 공개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간단한 걸 넘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 스크롤을 내리던 독자들은 갑자기 눈앞으로 격렬하게 튀어나오는 귀신(들)에 놀랐고, 충격을 받았으며, 여기저기로 ‘전염’시켰다. 유튜브에선 <봉천동 귀신>을 본 외국인들의 리액션 동영상이 유행했으며, 심지어 <ZOT!>과 <만화의 이해>의 ‘그‘ 스콧 맥클라우드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 만화에 대하여 짤막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은 전 세계의 상업 목적 만화 플랫폼 중 어디에서도 영상 효과를 이 정도로 주/중요하게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진 기껏해야 배경이 패턴에 맞추어 움직이는 장식적 효과가 전부였다- 야기된 것이리라. 요컨대 호랑의 ’귀신 연작’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충격을 이용한 충격. 충격으로서의 모션은 이렇게 만화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봉천동 귀신>은 엄연히 따지자면 모션을 웹툰에 기입한 게 아니다. <봉천동 귀신>의 첫 ‘모션’을 본 직후 다시 스크롤을 위로 올려봤다면 앞의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의 ‘모션‘이란 (자바스크립트를 이용, 특정 지점에서 스크롤이 강제로 움직이게끔 만들어) 잘게 나뉜 컷을 빠르게 연결-연속해서 봄에 따른, 가장 기본적인 착시 효과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수용자에게 있어 경험적으로는 모션으로서 지각되기 때문에 논의에 함께 넣어도 괜찮으리라. 하여튼, 이 시도로 인해 이전부터 시장에서 다른 플랫폼들을 앞지르고 있던 네이버 웹툰이 거기서조차 도약할 방도를 구상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2011년은 웹툰의 흐름에 있어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귀신 연작‘에서 모션의 작동 이후에 그 이전 화면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 번 강력한 충격을 경험한 이후엔 결코 그 이전(의 경험)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후 마블, 다음 웹툰, 곰툰이 차례대로 무빙툰을 선보이는데, 이 중 플랫폼 차원에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다음 웹툰이었다. 2014년엔 공뷰라는 모바일 웹툰 플랫폼을 출시했는데, 프레임의 모션을 연재작의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은 물론 대사 음성을 지원하는 더빙툰, 만화 속 모든 상황을 모바일 메신저 채팅창으로 구현한 채팅툰, 독자가 제보한 사연을 만화화한 썰툰 등의 포맷을 선보였으며, 여기에 더해 다음카카오 측은 만화가가 공뷰를 비롯한 다양한 포맷의 웹툰을 쉬이 제작할 수 있도록 관련 저작 툴을 제작 및 제공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포맷들은 만화 안에 다른 ‘콘텐츠‘의 방법론을 교차시킨다기보다는 다른 ’콘텐츠’에 전적으로 기댄다는 인상이 강했고, 그렇기에 잠깐 눈길을 끄는 시도 이상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한 편 이미 2012년에 스마트툰을 공개한 네이버 웹툰은 모바일 시장의 개척을 꾀하면서 다시 무빙툰으로 눈길을 돌렸다. ‘귀신 연작’의 모션이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종종 작동하지 않았다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이러한 기기에서의 경험을 보다 정교하게 구현할 방도를 모색했고, 2015년에 그 결과물로서 만화가 작품에 손쉽게 모션, 원근 처리, 음악, 패럴랙스 효과, 진동 효과 등을 기입할 수 있게 하는 특수효과 소프트웨어 ‘웹툰 효과 에디터’를 개발해 곧장 하일권의 <고고고>와 환쟁이의 <악의는 없다>, 그리고 납량특집 단편선인 [2015 소름]의 수록작 전부를 이 소프트웨어로 작업하게끔 한다(네이버 웹툰 측은 이런 작품들을 마케팅 차원에서 ‘효과툰’이라 부른다). 흥미롭게도 이는 대략적으로 보면 앞서 설명한 다음 웹툰의 사례와 유사한데, 네이버 웹툰의 시도는 그와는 정반대로 (DAU의 높은 증가에서 드러나는) 독자들의 호응과 모바일 디바이스에 대한 무빙툰의 안정적인 접속이라는, 성공으로서의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16년 초, 이 지속가능성의 연장선에서 <가담항설>이 연재를 시작한다.      


요컨대 네이버 웹툰의 모색이 열어놓은 문은 산업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직설적으로 물어보자. 포털이 무빙툰 제작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초창기의 포털 사이트가 온라인상에 무료로 제공되는 만화-즉 웹툰을 통해 흥미를 끌어 시쳇말로 ‘트래픽 장사‘를 했듯, 무빙툰 역시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거기서 새로운 방식의 충격을 마주하리란 수용자들의 기대가 흥미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가장 가까운 논의를 제시한 이는 문화 평론가 서동진이다. 그는 「다중, 대중, 군중 – 관객성의 분석을 위한 몇 가지 주장」이란 논문의 초반부에서 작금의 이미지 생태계를 주목경제라는 키워드로 더듬어가며 다음과 같이 쓴다. “인터넷을 뒤질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고 주의를 끌기위해 발버둥치는 숱한 이미지들을 만난다. (...) 이미지 역시 주의를 끌기 위한 매력의 충격을 뿜어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인터넷 화면의 배너를 넘어, 신문의 사진 이미지와 잡지의 화보, TV 화면의 광고, 나아가 영화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 사이에 일련의 등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말과 이미지는 이제 ‘충격’을 전하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무빙툰이 공포물의 충격 효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매년 릴레이 단편선의 납량특집에서 지속적으로 그런 쓰임새를 보인다는 점에서 최근 웹툰의 흐름을 함께 논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화제의 대상이 되는 게 ‘이 바닥’에서 중요함을 증명한 <공감.jpg>을 같이 언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펙터클로서의 초과잉여가치의 (끝없는) 발생.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감각적 충격의 생산이 온전히 목적으로 자리잡았는가? 나는 지금 ‘갑툭튀’로서의 충격을 전적으로 밀어붙인 [2016 비명]이 대중으로부터 받은 혹평을 떠올리고 있다.      

<가담항설> 中

<가담항설>에 이르러 무빙툰은 보다 다채로운 효과를 보다 매끄럽게 선보인다. 하나의 칸 안에서 패턴에 따라 운동하던 레이어들은 디졸브되거나 교차로 제시되는 식으로 겹쳐지며 운동 이상의 운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달리 말해, 앞선 무빙툰들의 효과가 단지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충격에 머무르기만 한다는 인상이 강했다면 <가담항설>에서 랑또는 효과를 미메시스의 요소로 끌어들이며 칸이라는 구조의 근본을 건드린 것이다. 잠시 영화로 눈을 돌려보자. 컴퓨터 그래픽이나 3D를 비롯한 시청각적 효과들이 영화의 새로운 감각적 차원을 연다는 순진한 말들이 궁극적으로 틀린 이유는 이런 효과들(의 보편적 용법)이 오히려 내러티브에 철저하게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키틀러나 레프 마노비치까지 나갈 여유는 없다. 과시적인 사례로, 컴퓨터 그래픽과 3D의 새로운 좌표를 그었던 <아바타>의 놀랍도록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떠올려보라. 혹은 다시 만화로 눈을 돌리자면, 공뷰가 막 출시되었을 때의 홍보 기사에서 어느 관계자가 연재작들에 대해 “스토리 전개를 간략하게 구성해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로 웹툰 콘텐츠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것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낯선 경험의 제공자로서 수용자에 대한 상상적 방어선. 이 때 기술적 형식은 어떤 방식으로든간에 내러티브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니 기술적 형식을 이용하면서 이야기의 중력을 무시한 채 감각의 포화만을 앞세운다면 외려 지루한 충격이라는 실패를 맛볼 것이다(MCU와 DCEU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생각해보라). 자, 이제 내가 느낀 기묘함이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 모션이라는 이 단순한 방법이 ‘지금’ 만화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텍스트가 바로 ”효과를 미메시스의 요소로 끌어들이며 칸이라는 구조의 근본을 건드리는” <가담항설>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아주 단순하다. 모션은 만화에 무엇을 부여하는가?      


근대적인 출판 만화와 웹툰은 페이지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전적으로 종이에 들러붙어있던 출판 만화의 경우 한 번 책장을 넘기면 두 페이지가 하나의 펼친 면으로 펼쳐져, 수용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따라가던 이야기의 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다른 칸과 맞은편 페이지에도 눈을 흘기며 펼친 면 전체를 조형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그렇게 출판 만화에서 펼친 면은 서로 분리된 칸들의 집합을 넘어 칸들의 조합, 거칠게 말해 한 장의 파편적인 그림으로서 작동한다. 칸 속에 있는 인물이 홈통을 ‘물리적으로’ 부수거나(테즈카 오사무의 경우) 동일한 구도의 대상을 시간의 진행에 따라 칸으로 조각내어 전체적 조형성을 강조하는(프랭크 킹의 경우) 모더니즘적 연출들은 바로 이러한 자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웹툰의 경우 이러한 방식의 연출을 찾기 어려운데, 웹툰 특유의 경험 방식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크롤 한 번에 당장 화면에 띄워진 이미지만을 볼 수 있는 인터넷 페이지의 특성이 만화에 부여되면서, 조망의 가능성을 지닌 모종의 조형적 단위로서의 펼친 면은 한 번의 스크롤에 몇 개의 부분적인 컷만이 눈에 들어오는 화면으로 대체되었다. 즉 시선-경험에 대한 제한. 그런데 어떤 제한? 순서라는 제한.     

<가담항설> 36화 中

그리고 모션이 만화 안으로 들어오자 이 제한은 더욱 엄격하고 견고해졌다. 앞서 무빙툰으로서의 <가담항설>이 “칸이라는 구조의 근본을 건드리는” 작품이라고 썼는데, 이는 지속을 가능케 하는 기능을 칸에 부여한 것에 대한 말이다. 지속이라니? 복수의 컷을 하나의 칸 안에 중첩/압축시키는 –이는 방식에 있어 디졸브와 교차로 나뉜다- 효과로서의 지속. 하나의 칸에 보다 오랫동안 시선을 집중하게끔 하는 것은 물론 기호의 변화를 시간적으로 느끼게끔 한다는 점에서 이를 지속이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36화에서 아들의 목을 든 홍화의 시어머니의 모습 위에 목련꽃을 손에 가득 담은 과거의 모습이 스크롤에 따라 조금씩 덮어씌워질 때,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아들을 키운 자신의 젊은 날을 '함께' 애도하기 위한 디졸브로 다양한 시간성을 느끼게 한다. 혹은 38화에서 칸을 다 내리지 않았을 때엔 남아있던 결계가 스크롤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갑자기 지워홍화가 곧장 추국에게 주먹을 날리는 충격적인 교차의 순간은 앞서 말한 지속의 명확한 사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주목고자 하는  이러한 지속들이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에 있어 얼마나 효과적인 표현 방식이냐가 아니다. 근대 이후로 만화는 시간의 흐름을 찰나의 칸에 박제함에 따라 생겨난 복수의 시간의 중첩(말풍선에 부여되는 순서)을 드러내는, 지극히 기괴한 시간성의 예술 매체였다. 그런데 웹툰이 수직 스크롤을 보편적인 형식으로 삼고  <가담항설>에서 패럴랙스 효과가 칸의 지속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이 시간성은 중첩/압축된 컷이 제시되는 순서를 직접적으로 지니게 되어 제한되고 순화된다. 그러니까,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종종 칸의 구조를 기괴하게 비트는 무빙툰 효과는 그럼으로서 근대 이후 지속되었던 만화의 기괴함을 점차 지우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정한 흐름을 독자가 순서대로 마주치길 거의 강요한다는 점에서 여기엔 어떤 외설적인 면모마저 느껴진다.      


“외설적“이란 말은 요근래 네이버 웹툰의 모색 전반에 적용 가능하다. 지난해 여름 분기의 릴레이 단편선 기획인 [2018 재생금지]에서 AR 기술이 쓰인 작품들을 보기 위해선 반드시 스마트폰에 깔린 네이버 웹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야 했으며, <연의 편지>를 플레이툰 버전으로 보기 위해 수용자는 먼저 “iOS 6.1 / Android 4.4.2 이상의 모바일 기기로 접속“해야만 한다. 게다가 <가담항설>은 앞서 말한 모바일 전용 만화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 스크롤의 매끄러움과 그로 인한 모션 효과의 매끄러움이란 측면에서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작품에 속한다(당장 제목의 반짝임 효과의 차이를 확인해보라!). 여타의 서브컬처들이 대중과 만나는 장소에 있어 견고해 보이던 빗장이 풀어지고(TV로 진출하는 아프리카 BJ들과 1인 미디어로 향하는 정치인과 연예인들, E-Book과 웹소설의 부흥) 장소들이 다양해지고 있는 반면, 만화의 경우엔 갈수록 어떤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 만화의 장소가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다 진보된 기술을 끌어들인 작품일수록 모바일 디바이스를 자신의 주 거처로 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만화와 영화는 서로의 반대 지점에서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그러면서 수용자는 자율적으로 칸과 칸, 페이지와 페이지를 오가는 대신 만화(를 둘러싼 디지털 기계 장치) 자체에 부여된 감각적 기능을 철저하게 따라갈 필요가 생긴다. 그렇게 웹툰은 기존의 출판 만화의 구조를 거의 붕괴시켜 만화 제작과 감상의 패러다임을 전환해버렸다. 현재의 적잖은 한국 청소년들이 일본 만화 특유의 복잡하고 현란한 컷 구성에 멀미를 느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무빙툰을 비롯한 웹툰의 기술적 발전이 독자에게 능동적인 경험 방식을 부여하리라는 기자와 기업 홍보팀의 말들은 전부 거짓말에 다름 아닌 게다. 오히려 기술적 발전은 결과적으로 웹툰에 드러나고 또 잠재되었던 “순서라는 제한”, 즉 ‘질서‘에의 지향을 보다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경험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빙툰으로서의 <가담항설>을 살펴봄에 있어 중요한 건 모션의 돌출 효과 자체가 아니라, 만화를 특정한 방식으로만 볼 수 있게 하는 ‘질서‘이다. 출판 만화들이 최소 단위인 칸을 아예 지우거나 대체하는 식으로 페이지라는 조형적 단위를 자율적 -물론 여기서의 "자율적"이란 좀 엄격하게 쓰여야 한다- 으로 쓰고 확장하는 반면 웹툰은 한 칸으로까지 스스로의 조형적 단위를 축소해 단순화하며 근대적 만화에서라면 가능할 자율성을 억제하는 추세에 비춰볼 때 이는 선형적인 흐름이 아닐까. 하나의 기술이 예술 안으로 들어와 기능이 되고 그 기능이 자율성의 벡터를 얻게 될 때, 기존의 어떤 기능은 마치 대가를 치르듯 서서히 벡터를 잃어간다. 선형적인 진화로서 비선형적인 진보라는 모순. 말하자면 <가담항설>은 디지털 만화의 탄생과 동시에 잠재되었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하지만 기자와 기업 홍보팀의 말들을 믿을 수 없듯, 이를 앞에 두고 만화 고유의 능동성이 죽고 웹툰은 다른 예술이 되어간다는 식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평자 역시 믿어선 안 된다. 웹툰이 기존의 만화에는 없던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한들, 앞서 말했듯 그것이 ‘미래‘ 혹은 ’죽음’을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가치판단이나 예언이 아닌 엄격한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상황은 단지 기존의 만화가 처한 반-만화적 전환일 뿐이다. 하지만 ‘반‘이 없는 전환이 애초에 가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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