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불행했던 전번의 대전쟁이 한창일 때였습니다만, 이곳 스웨덴에서 아득히 먼 일본 열도의 시코쿠라는 섬의 숲 속에서 보낸 소년기에, 저를 마음속 깊이 매혹시킨 두 권의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닐스의 모험>이었습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공포가 세계를 뒤덮은 듯한 시대에, 제가 골짜기 사이의 작은 집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보다는 숲에 올라가 수목에 둘러싸여 자는 것에서 더 안식을 찾았던 아이였다는 점에서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있다 느껴집니다.
그리고 <닐스의 모험> -소년이 소인(小人)이 되고, 또한 새의 말을 이해해서 모험으로 가득 찬 여행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에는 다층의 관능적인 기쁨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섬의 깊은 숲에 갇혀 사는 소년에게 참된 세계란 것, 또 그곳에 산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해방'된 것이라는, 생생하고 멋대로인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데 닐스는 무엇보다도 스웨덴을 횡단하는 여행을 하면서, 또 친구인 기러기들과 협조하고 그들을 위해 싸우게 되면서 장난꾸러기였던 성격을 바꿔 순진무구하고 자신에 가득 찬 겸허함을 갖추게 됩니다. 그 과정에 다다르는 게 바로 기쁨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마침내 귀향한 닐스는 그리운 집의 부모님을 소리쳐 부릅니다. 그 말속에 그야말로 최상의 기쁨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 자신 또한 닐스와 함께 그 말을 외치고 있는 듯한, 정화되고 고양된 감정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어 번역문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이런 외침이었습니다.
"Maman, papa! Je suis grand, je suis de nouveau un homme!" cria-t-il. ("엄마, 아빠! 제가 커졌어요,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어요!" 그가 외쳤다.)
제가 특히나 매력을 느꼈던 부분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어요!"라는 대목입니다. 그 후 여러 차원에서 고난과의 투쟁을, 가정에서 시작해 일본 사회와의 관계에서, 또 이 20세기 후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하나의 연속성으로 경험하면서 -그것은 당면한 경험을 소설로 쓰며 참고 견뎌 가는 과정이었습니다만- 때때로 탄식하듯이, 저는 이 절규를 되풀이해온 것입니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어요!"
이처럼 사적으로 말하는 것은, 지금 제가 서 있는 장소와 시간에 어울리는 게 아니라고 느끼실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의 문학의 근본적인 스타일은, 개인적 구체성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사회, 국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잠시, 사적인 것에 대해 말한 것을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반세기 전, 숲 속의 어린아이였던 저는 <닐스의 모험>을 읽으면서, 거기에 숨겨진 두 개의 예언을 감지했습니다. 하나는 나 또한 새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게 될 것이란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친한 기러기들과 나란히 무리를 지어 아득히 먼 곳으로, 바라건대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하늘을 나는 여행을 할 것이란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진 저에게 태어난 첫 번째 아이는 -저는 그 아이에게 '빛'이란 의미로 히카리(光)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지적 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어릴 때 그 아이는 들새의 노래에만 반응을 보였고, 인간의 목소리나 언어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여섯 살의 여름을 보내기 위해 나선 산속 오두막에서, 수풀 저쪽의 호수에서 흰 눈썹 뜸부기 한 쌍이 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들새의 노래를 녹음했던 레코드 해설자의 악센트로 "쿠이나, 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들이 최초로 인간의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을 계기로, 그 아이와 우리들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지금 히카리는 일본 사회가 스웨덴으로부터 배워 만든, 장애인을 위한 복지 작업소에서 일하며 작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음악과 그를 이어주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새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히카리가, 새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예언을,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뤄준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하나, 제 생애에 가장 풍부하게 여성적인 힘을 발휘해준 제 아내와 함께, 그러니까 닐스에 있어서는 악카라고 하는 이름의 기러기와 같은 여성을 데리고, 저는 스톡홀름까지 날아왔습니다. 두 번째의 예언도 유쾌하게 성취되었노라고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로서는 최초로 이 자리에 섰던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이름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한 지극히 'vague'했습니다. 저는 지금 'vague'란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이는 일어로 '애매한'이란 의미를 지닌 형용사입니다. 이를 확실히 말해 둔 것은, 이 '애매한'이라는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이에 대한 번역어로서 여러 단어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가 아마 의식적으로 선택한 이 '애매함'은, 그 강연의 타이틀이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어로 "아름다운 일본의"라는, 그 조사 '의'의 기능에 의한 것입니다.
우선 이 제목은 '아름다운 일본'에 속하는 '나'를 의미합니다. 또 '아름다운'과 '나'를 동격으로 제시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번역자인 미국인 일본 문학 연구자(이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로, 카와바타의 <설국>을 '창조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 역주)에 의한 영어 번역은 '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인데, 이를 다시 일본어로 바꾸면 '아름다운 일본과 나'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숙달된 번역자가 꼭 배반의 번역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카와바타는 일본적인, 그리고 동양적인 범위로까지 확대한 독자적 신비주의를 말했습니다. 여기서 '독자적'이라 말하는 것은 선(禪)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현대에 사는 자신의 심경을 말하기 위해, 그는 중세 선승의 와카(대개 5/7/5/7/7 형식의 단가로 쓰이는 일본의 정형시가 - 역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와카는, 언어에 의한 진리 표현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와카입니다. 닫혀진 언어가 이쪽으로 전달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단지 이쪽이 자포자기해 닫혀진 언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게 바로 선승의 와카입니다.
어째서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런 와카를, 그것도 일본어 그대로 스톡홀름의 청중들 앞에서 낭독했던 걸까요. 이 훌륭한 예술가가 만년에 성취한 솔직하고 용감한 신상 고백의 태도를, 저는 정겹게 생각합니다. 소설가로서의 오랜 노작(勞作)을 편력한 후, 스스로 이해를 거부한 표현일 터인 이런 노래에 매료당하고 있다고, 그리 고백하지 않고서는, 카와바타에게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 문학에 대해, 즉 '아름다운 일본과 나'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던 것입니다. 그리고 카와바타는, 다음과 같이 강연을 매듭지었습니다.
저의 작품을 허무하다고 비평하는 자가 있는데, 서구의 니힐리즘이라는 단어는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의 예술과 밀접하게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도, 솔직하고 용감한 자기주장이 배어있다 생각합니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동양의 고전인 선의 사상, 즉 탐미감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러나 그것이 니힐리즘은 아니라고 특별히 못 박아 말함으로써,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알프레드 노벨이 신뢰와 희망을 당부한 미래의 인류를 향하여, 마찬가지로 음속으로부터 이를 외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는 26년 전 이 장소에 섰던 같은 국가의 사람에 대해서보다는, 71년 전 저와 같은 나이에 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에게 영혼의 친근감을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 천재와 저를 같은 수준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인이 이 세기에 부흥시켰던 윌리엄 블레이크에 의하면, 저는 "Across Europe & Asia to China & Japan like lightning(번개처럼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질러 중국과 일본으로)"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나라로부터 먼 땅의 한 은밀한 제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소설가로서의 생의 매듭으로 막 완성시킨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는 그 제목을, 그의 중요한 시의 한 연에서 따온 것입니다.
A tree there is that from its topmost bough
Is half all glittering flame and half all green
Abounding foliage moistened with the dew
한 그루 나무 끝 가지로부터
반은 모두 반짝이는 불꽃이고
다른 반은 이슬 흠뻑 머금은 무성한 잎사귀의 푸르름
1*
아울러 그의 모든 시집은, 이 작품 전체 곳곳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시인 W.B. 예이츠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일랜드 상원에 제출된 결의안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명은 그의 힘 때문에 세상에서 평가될 것이다... 파괴의 광신으로부터 인간의 바른 정신을 지켜준 그의 문학은 귀중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도 예이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현재, 문학이나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기술에 의해 그 힘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저의 조국의 문명을 위해, 또한 가까운 과거에 그 파괴의 광신이 국내와 주변 여러 나라의 인간의 바른 정신을 짓밟았던 역사를 가진 나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예이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현재에 살며, 이와 같은 과거에 얼룩진 쓰라린 기억을 가진 사람으로서, 저는 카와바타처럼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저는 카와바타의 '애매함'에 대해 말하면서 'vague'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지금 저는, 역시 영어권의 위대한 시인 캐서린 레인이 블레이크에 대해 씌운 "ambiguous지만 vague는 아니다"라는 정의에 따라, '애매한'이란 일본어를 똑같이 'ambiguous'라 번역하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제가 저 자신에 대해 '애매한 일본의 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국 이후, 120년 간 근대화를 계속해 온 현재의 일본은 근본적으로 '애매함(ambiguity)'의 양극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애매함'에 깊은 상처를 입은 표시가 뚜렷한 소설가로서 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인간을 모두 갈라놓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이 '애매함'은, 일본과 일본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로지 서구를 배운다, 모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일본인은 전통적인 문화를 확고히 지켜오기도 했습니다. 그 애매한 진행은, 아시아에 있어 침략자 역할로 일본을 몰고 갔습니다. 또 서구를 향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근대의 일본 문화는, 그러면서도 서구 측에게는 언제나 이해가 불가한, 혹은 적어도 이해를 지체시키는 어두운 부분을 온존시켜 왔습니다. 게다가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고립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근대문학에 있어 가장 자각적이고, 동시에 성실했던 '전후 문학가', 즉 세계대전 직후의 폐허에 상처입으면서도 새로운 삶에로의 희망을 짊어지고 나타난 작가들의 노력은, 서구 선진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와의 깊은 골을 메웠으며, 아시아에서 일본 군대가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에 함께 고통을 느끼며 배상하고, 그 위에서의 화해를 조촐하게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억될 만한 표현 자세의 최후미(最後尾)에 연결될 것을, 저는 계속해서 지원해왔습니다.
포스트 모던한 일본의, 국가로서의, 또한 일본인의 현상도 양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일본인은 거의 50년 전의 패전을 계기로 -즉 근대화 역사의 한가운데에, 바로 그 근대화의 나쁜 여파가 초래한 태평양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후 문학가'가 당사자로서 표현한 그대로, 커다란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재출발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일본인을 지탱하고 있던 것은 민주주의와 부전(不戰)의 맹세였고, 그것이 새로운 일본인의 근본적 모랄2*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랄을 내포하는 개인과 사회는 Innocent하고 상처없는 순진무구한 존재가 아니라, 아시아 침략자로서의 경험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또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인류가 입은 최초의 핵공격을 받은 사망자들, 방사선 장애를 거머쥔 생존자와 그 2세들, 그것은 일본인에 그치지 않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많은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모럴에 대해 계속 의문을 던져왔던 것입니다.
현재, 일본이라는 국가가 유엔을 통한 군사적 역할자로서, 세계 평화의 유지와 회복을 위해 적극적이지 않다는 국제적인 비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귀에는, 고통과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재출발을 위한 헌법의 핵심에 부전의 맹세를 해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통과 함께, 일본인은 새 삶을 향한 모럴의 기본으로 부전의 원리를 택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적 징역거부자에 대한 관용에 있어 오랜 전통을 가진 서구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사상이지 않을런지요? 이 맹세를 일본국의 헌법에서 뺀다면 -그로 향한 책동은 국내에 항상 있었고 국제적인, 이른바 외압을 그것에 이용하려는 시도도, 이런 책동에 포함되어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들은 아시아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희생자들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 끔찍한 새로운 배반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가를, 저는 소설가로서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원리를 뛰어넘은, 더욱 높은 곳에 절대적인 가치를 둔 구 제국주의 헌법을 지탱한 시민 감정은, 반세기에 이르려고 하는 민주주의 헌법 속에서 그립게 생각된다기보다는 더욱 생생하게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전후 재출발의 모럴이 아닌 다른 원리를 일본인이 새삼스레 다시 제도화하게 된다면, 일단 무너져내린 근대화의 폐허 속에서 보편적 인간성을 추구했던 우리들의 염원은 결국 허무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저는 그것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일본의 경제적인 커다란 번영은 -세계 경제의 구상에 비춰, 또 환경 보전의 측면에서 여러가지로 위험의 싹을 내포하고 있을 터입니다만- 일본인이 근대화를 통해 만성적 질병처럼 길러온 애매함을 가속하여 보다 새로운 양상을 부여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국내에서 감지하는 것보다도, 국제적 비평의 눈에는 더욱 확실한 것이 아닐까요? 일본인은 전후의 철저한 빈곤을 참고 견뎌내며 부흥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현재의 이상한 번영에서 몸을 빼고자 하는, 앞서가는 것에 대한 거대한 불안감도 견뎌내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번영은 아시아 경제의 생산과 소비 양면에 걸친 잠재력의 증대로 통합되고, 바야흐로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기에 이르러 동양의 소비문화의 비대와 세계적인 서브컬처의 반영으로서의 소설과는 다른, 진지한 문학의 창조를 바라는 우리들은 어떤 일본인으로서의 자기 재확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딘은 다음과 같이 소설가를 정의했습니다.
바른 자들 가운데서 바르고
깨끗하지 않은 자들 가운데서 깨끗하지 않고
만약 가능하다면
가냘픈 그 자신의 몸으로서
인류 모두의 피해를
무던한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직업으로 오래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의 습관'을 -이것은 플래너리 오코너에 근거한 말입니다만- 획득한 자들로서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 바람직한 일본인 상에 대하여, 조지 오웰이 그가 사랑하는 인간의 성격을 나타냈던, 역시 영어에서 그 타당한 단어를 찾는다면 'Humane(인정있는)', 'Sane(분별있는)' 등의 단어와 병치되는 것으로서의 'Decent(점잖은)' 일본인으로 생각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심플한 이 단어와 대비될 때, '애매한'이라는 자기규정의 의미는, 더욱 확실해지지 않을런지요? 우리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상태와 내부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상태와는 명명백백히 어긋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점잖은' 인간으로서의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를 프랑스어의, 휴머니스트로서의 일본인이라는 표현에 중첩시킨다면, -관용, 인간다움이라는 내용을 매개로 하여, 그런 두 개의 형용사를 연결한다고 해서 오웰이 이의를 제기하진 않겠죠- 그런 일본인의 건설을 꿈꾸며 힘겨운 노력을 거듭한 우리들보다 앞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과 사상의 연구자, 와타나베 카즈오입니다. 와타나베는 세계대전 직전과 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의 애국적인 광기 안에서 홀로 고뇌하며, 그래도 뿌리째 뽑혀진 것은 아닌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과 자연관에 -그것은 카와바타의 '아름다운 일본'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인 인간관을 부여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근대화를 꿈꾸며 국가가 거칠게 지향했던 방법과는 달리, 그러나 그와 복잡하게 서로 연관된 방식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은 서구와 그들의 섬나라를 깊은 차원에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괴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만, 동시에 기쁨에 넘친 일이기도 했겠지요. 그중에서도 와타나베 카즈오의 프랑수와 라블레에 대한 연구는, 분명 그 결실이 풍부한 결과였습니다.
젊은 와타나베가 세계대전 전에 유학했던 파리에서, 지도교수에게 라블레를 일어로 번역할 결의를 털어놓았을 때, 늙고 노련한 프랑스인은 야망에 불타는 일본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L'entreprise inouie de l'intraduisible Rabelais.", 그러니까 번역 불가능한 라블레를 일어로 번역한다고 하는 전대미문의 시도라고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의 조언자는 보다 솔직하게, "'Belle' entreprise Pantagrueline(팡타그뤼엘적인 '훌륭한' 시도)"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와타나베 카즈오는 전시 체제와 점령하의 빈궁 속에서 이 대사업을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라블레보다 앞선 사람들의, 그리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리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는 다양한 휴머니스트들의 삶과 사상을 혼란기의 일본에 이식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저는 인생과 문학에 있어 와타나베 카즈오의 제자입니다. 저는 와타나베로부터 두 가지 형태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소설에 대한 견해입니다. 미하일 바흐친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또는 민중의 웃음에 대한 문화의 이미지 시스템"이라 칭하며 이론화했던 것을, 저는 와타나베가 번역한 라블레를 통해 구체적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물질적, 육체적 원리의 중요성, 우주적, 사회적, 육체적인 모든 요소의 긴밀한 연결, 죽음과 재생의 정념의 중첩, 그리고 드러난 상하 관계를 뒤집어 보는 홍소(哄笑)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미지 시스템이야말로 일본 변두리의, 게다가 시골에서 태어난 제게,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에 이르는 표현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것은, 지금 내세워지고 있는 경제적인 신진 세력으로서의 아시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 영속적 빈곤과 혼란으로 가득 찬 아시아라고 하는, 오랫동안 친숙했던,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은유 군에 있어, 저를 한국의 김지하나 중국의 정이, 모옌 등과 연결 짓기도 하였습니다.
제게 있어 문학의 세계성은, 우선적으로 이런 구체적 연관 속에서 성립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국의 훌륭한 시인(김지하)의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단식 투쟁에 참가했던 저는 지금, 천안문 사태 이후, 표현의 자유를 잃고 있는 중국의 높은 질의 소설가들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와타나베로부터 부여받은 또 다른 영향은, 휴머니즘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소설의 정신'과 겹쳐진,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유럽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와타나베는 라블레를 에워싸듯이 하여 에라스무스에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의, 게다가 앙리 4세를 둘러싼 마고 여왕부터 가브리엘 데틀레라는 여성들까지, 상세한 사료에 입각한 평전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여 보다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특히 관용의 소중함과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이나 자신이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기 쉽다는 것을, 와타나베는 일본인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의 근면한 노력은, 덴마크의 위대한 문법학자 크리스토프 니로프의 "항의하지 않는 인간은 공모자와 다름없다"라는 말을 전하는 시사적인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와타나베 가즈오는 휴머니즘이라는, 모든 사상의 가장 서구적인 모태를 일본에 이식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이야말로 "L'entreprise inouie de l'intraduisible Rabelais(전대미문의 시도)"를 감히 시도했던 것이며 실로 "Belle entreprise Pantagrueline(팡타그뤼엘적인 훌륭한 시도)"를 이룩한 이였던 것입니다.
저는 와타나베의 휴머니즘의 제자로, 소설가인 자신의 작업이 언어의 표현자와 수용자를 개인의, 또 시대의 고통에서 모두 회복시켜 각각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그 자신이 애매함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저는 말했습니다만, 그 고통과 상처로부터 (그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기에, 저는 문학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것은 일본어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같은 방향으로 향하길 염원하는 저의 표현작업이기도 합니다.
새삼스레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지적 장애를 지고 살아가는 제 아들은 새의 노래로부터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고, 결국 자신의 곡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작은 작품은 풀잎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슬과 같은, 신선한 놀라움과 기쁨 그 자체였다고 생각됩니다. Innocent라는 말은 'in noceo', 결국 '상처받지 않았다'는 말에서 온 것 같습니다만, 히카리의 음악은 실로 작곡가 자신의 innocence의 자연적인 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작곡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 아버지로서 저는 히카리의 음악에 그 '울부짖는 어두운 혼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적인 발달이 늦은 장애아 나름의, 그러면서도 현명한 노력이 그의 인생의 습관인 작곡에 기술의 발전과 구상의 심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그 자신의 가슴속에, 여태까지 언어로는 찾아낼 수 없었던 어두운 슬픔의 응어리를 발견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울부짖는 어두운 혼의 소리'는 아름답게 음악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 그 자체가 그의 어두운 슬픔의 응어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더불어 히카리의 작품은 일본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도 하는 음악으로 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술의 신기한 치유력에 관한 근거를, 저는 여기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잘 검증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신조에 따라서 20세기가 기술과 고통의 괴물적인 발전 속에 쌓아놓은 피해를, 가능하다면 연약한 내 자신의 몸으로써 고통을 받아들이고, 특히 세계의 주변에 사는 사람으로서 여기서부터 전망할 수 있는 인류 전체의 치유와 화해에 어떻게 품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휴머니즘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 W.B. 예이츠, <출렁이는 마음(Vacillation)>
2. 모럴(moral)을 굳이 '도덕' 내지는 '윤리'라 번역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에서 뜻하는 모럴이 한국어의 그것들보다 좀 더 중의적인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본문은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あいまいな日本の私』를 번역한 것으로, 이전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조금 수정한 판본이다.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의 21번으로 출간된「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에 부록으로 수록된 '오에 겐자부로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은 본문과는 다른 내용이니 유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