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테즈카 오사무는 언제나 만화의 신이었지만 (일본) 만화의 아버지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전후 청년 세대의 카운터 컬처였던 극화 운동에 의해 종종 극복해야 할 구시대의 이데올로기-곧 아버지로서 (억지로) 자리매김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그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수 많은 자식들을 너그럽게 거느리는 고고한 아버지가 되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사업가 테즈카가 아닌) 작가 테즈카, "모든 만화가는 나의 라이벌"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던 테즈카는 그러하다. 데뷔 때부터 은근히 디즈니를 베끼고, 미즈키 시게루의 아이디어를 까내리고 차용해 <도로로>를 구상하고, 심지어는 당대에 스포콘(열혈 스포츠물) 붐을 일으킨 <거인의 별>을 읽고서 자신의 어시스턴트들에게 "도대체 이것의 어디가 재밌는지 알려줘"라고 하소연하는 등, 이 악독하고 집요한 작가는 언제나, 어떻게든 당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또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옳다. 작가로서의 테즈카 오사무의 궤적이란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한 광기어린 고군분투의 흔적이라고.
테즈카가 당시 아사히 저널에서 작품을 연재하던 '아방가르디스트' 사사키 마키를 "이런 건 만화가 아니다", "아사히저널은 미치광이의 작품을 실어서는 안 된다"라며 힐난한 일화는 유명하지만, 극화 운동이나 미즈키 시게루 혹은 오토모 카츠히로에게 그랬듯 이 도를 넘은 비난은 실은 (자신에겐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던) 사사키만의 개성과 방식에 대한 질투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키리히토 찬가>에서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초현실주의적 작화나 연출(위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사사키 마키는 증오의 대상이었을 지언정 무시하고 말 대상은 결코 아니었으리란 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즈카 오사무가 사사키 마키의 방식을 고스란히 훔치려했다는 말을 하고싶은 건 아니다. 내 생각에 <키리히토 찬가>는 테즈카가 사사키의 방법론인 넌센스를 자신의 만화 프로그램에 어떻게 이식할 수 있을지 시험하기 위한 모종의 실험장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질료로 인물들의 광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니 광기가 고조될 때에만 이런 연출이 쓰인다고 해서 이를 '광기어린 심상의 표현' 정도로 일축하지는 말자.
자, 위의 그림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그러진 우라베의 얼굴에서 안경이 벗겨지고, 고통스러워하는 키리히토의 얼굴이 소인들로 미분되고 나아가 단절적/이질적인 컷들 사이에서 키리히토 자신(의 얼굴)은 완전히 지워지며, 헬렌을 겁탈하려는 우라베는 여러 불상의 이미지와 겹쳐(지지 않고 조금씩 미끄러)진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 "벗겨진다", "지워진다". 요컨대 테즈카는 인물을 그 자신에게서 끄집어내고 있다. 광기와 그로 인한 자아의 붕괴를 버틸 수 없는 이들은, 마치 카프카의 단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해 내가 아닌 것, 그것도 실제의 생(生)에서 동떨어진 것들에 자신의 상태를 겹쳐는 것이다. 죽음 충동으로서의 회피의 제스쳐. 하지만 그 분리와 겹침은 인물-존재들을 (일시적으로라도) 완전히 전환하려는 시도이기에 인물들에겐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고, 인물의 '느낌'을 따라가던 만화는 마찬가지로 칸의 연속성과 구상성을 모조리 뒤흔들 정도의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들리지 않을 만화의 비명소리, 고통의 체험에서 새어나오는, 가장 순수하게 처절한 음향의 구현이다. 테즈카는 사사키의 넌센스에서 만화에서의 음향성의 가능성을 엿본 게 아닐까?
하지만 이 시험은 지속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실패한다. 테즈카가 소위 말하는 '이야기꾼'이라서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지속되기 위해선 광기 역시 카이로스와 함께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라베는 광기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리고, 광기 속에서 몬모우병에 걸린 두 노인(타츠가우라와 만 대인)은 병의 악화로 인해 자살할 힘도 의지도 없이 죽고 만다. 오직 키리히토와 헬렌만이 광기를 순화하고 (저항과 봉사로) 승화해 살아남는다. 어째서 프로그램은 이렇게 흘러가는가?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이 시험의 당사자가 테즈카라는 데서 기인한다. 티마고 아톰이고 메르모고 블랙 잭이고 할 것 없이, 테즈카 오사무의 주인공들이란 대개 '여기와 저기' 사이에 있는 존재, 비순수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그래서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그야말로 만화적 의지의 현전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키리히토와 헬렌은 '이미' 몬모우 병에 걸려 늑대인간으로 변태했으며, 그 변태는 광기로 인한 "분리와 겹침"을 내재화하고 있기에 "만화적 의지의 현전"으로서의 두 늑대인간에겐 광기(의 충동)를 견딜 면역이 생긴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몬모우병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광기에 찌든 이들에게 남은 회피란 진짜 죽음 말고는 없다. 그 자신의 의식적인 시험조차 '순화'할 정도로 강력한 테즈카의 픽션. 거의 무의식적인 구속이라 해도 좋을. 테즈카 자신이 이를 인지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후에 그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방식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광기의 표현에 대한 모색이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라, 후일 우리는 광기에 물든 인물이 (변태가 아닌) 변장의 형태로 "만화적 의지의 현전"으로서 작동하는 <MW>나 반창고라는 임시적 조치로 선천적인 광기를 억제하는 <세눈박이 나가신다>, 그리고 시대의 무드 자체를 광기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아돌프에게 고한다>와 <아야코>를 마주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키리히토 찬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테즈카에게 있어 모종의 시도, 그것도 아주 인상적이고 중요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