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의 만화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마치 <치는 만화>에서 예상을 배반하는 스트라이크를 성사시키는 볼링핀들처럼 인물이 처음에 지녔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패해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발화되었던 말은 반복되면서 본래 취했던 의미를 상실하고 배반한다. 설명과 소통의 구체성이 부재하는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미끄러짐은 필연적인 사태일 것이다(그리고 언제나 그 미끄러짐이 실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것 뿐인가? ooo의 인물들은 단지 상황의 애매모호함에 의해서만 미끄러질 뿐인가? ooo의 작업들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인물도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명탐정 고난>의 첫번째 컷에서 세 인물은 한 원 안에 모여있었는데, 마지막 컷에선 그 원은 온데간데 없고 넓고 각진 바닥만이 그들을 받치고 있다. <Ok go>에서 택시를 잡고 출발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첫번째 컷의 파란 하늘이 세번째 컷에선 노을로 바뀌어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작품에서 매 컷마다 배경을 이루는 색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있다. 산만하다 해도 좋을 정도의 구성. 그러니까, ooo의 인물들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 미끄러진다.
물론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어떻게 '미끄러진다'에 조응한다는 것인가? 거기서 실패나 의미의 굴절이 다뤄지고 있단 말인가? 그러한 변화 따위는 "아무도 모르"는 채 만화를 태연히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의 미끄러짐이란 앞서 열거한 것들-말과 제스쳐의 미끄러짐이 아닌, 더 크고 은밀한 영역에서의 미끄러짐이다. 인물이 각 컷에서 취하는 감정에 따라 컷의 배경색이 바뀌긴 하지만 -가령 <토끼>에서 두 인물이 느끼는 놀람("!", "!!")의 감정은 동일하게 검은색으로 표현된다- 그 바뀐 색이 지닌 알레고리는 사실은 조금도 중요치 않다.1* ooo는 컷으로 분리된 세계를 그럴듯하게 마름질해야할 배경색을 고정시키거나 일시적인 감정 표현 효과로 사용하는 대신 매 컷마다 구체적인 변화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채 변화하여, 배열된 컷들 사이에 잠재된 모종의 정합성을 깨트리고 그 차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표면의 끝없는 비약적 변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생략된 과정을 외려 강력하게 지시하며 우리에게 제시된 4컷의 이미지를 부조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때의 부조리는 무엇을 향하는가? 바로 (마르쿠스 가브리엘식으로 말하자면) 세계의 비존재다.
ooo의 만화에서 각 칸은 한 작품의 서사를 지탱하는, 깊이 있고 단단한 세계를 설정하거나 지시하는데 무력하며, 다만 인물이 취하는 감정에 조응할 각기 다른 색이 그 깊이 없는 평면/표면 위를 비약적으로 방황하며 스스로를 칸 가득히 현시할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를 분리한 순간의 측면(들)을 하나의 평면(들) 위에 나열하는 (것이던) 만화를, ooo은 세계를 분리하는 것을 넘어 기괴하게 파편화하는 것으로 인식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배경색은 인물의 감정 변이 양상을 드러내기 위해 칸 가득히 스스로를 현시하는 일시적 효과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지니지 않는 인물이, 프레임이, 칸이, 나아가 그 구조로서의 작품이 (그 배경색이 지시하는) 순간의 감정을 통해 겨우 서있을 수 있도록 하는 일시적 장소로서 기능하며, 곧 감각을 작동시키는 장이 된다. 잠깐, 감각이라니? 여기서 잠깐만 우회하자. 다수의 도트 그래픽이 아무리 해상도를 높인다 한들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육감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도트 그래픽에서 대상을 묘사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이 꽤나 큰 크기를 갖고 있어 셀 작화나 디지털 작화2*보다 채도가 높고 심도가 낮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웬만해선 쉬이 인식될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픽셀을, 대상을 이루는 최소 단위라는 점에서 일종의 분자로 간주하자.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분자.
ooo는 이 픽셀-분자들을 자신의 토대로 삼으면서 눈에 보이는 분자들과 보다 더 큰 분자간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더 큰 분자"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분자들의 조합을 품고 있는 것, 바로 배경색이다. 대개 단색으로 이루어진 배경색은 같은 색의 분자들의 조합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칸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큰, 하나 혹은 둘의 커다란 분자(들)로 보이며, 이 분자는 앞서 말했듯 감정으로 이루어진 일시적 장소이다. 그러니까 배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더 큰 분자가 (감정으로서 기능하면서) 눈에 보이는 분자들의 (집합의) 운동을 자극해 들뜨게 하는 것이다. 이 분자 수준에서의 원초적인 운동에 의하여 ooo의 인물들은 '일견' 다른 무언가처럼 보이는 변화를 겪는 게 아니라 '진정' 다른 무언가가 되는 변화를 겪는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담당하길 거부하는 분신이 외려 그 거부로 인해 역할을 잘 해내는 것(<감정분업 만화>)이나 도자기 같아진 피부가 실은 진짜 도자기가 된 것(<빛나는 피부 만화>)을, 그리고 나아가 하나의 도상이 모든 기의적 가능성의 가지를 폭력적으로 쳐내 도상 그 자체로 회귀하는 것(<중력의 시>)을, 다시 말해 원초적이고 직설적인 동일화로서의 미끄러짐을 목격한다.3* 혹은, 육감성은 감각으로 나아간다("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4*). ooo의 배경의 비약은 그러므로 "깊이있고 단단한 세계"(의 부재)에 대한 처절한 미끄러짐의 원리이다. 인물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만화를 살아갈 때, 이미 그들은 그 비약에 의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중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모든 미끄러짐이란 이 "더 큰 영역에서의 미끄러짐"에 의해 야기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반복한 바, ooo의 방법론으로서의 '미끄러짐'이란 정말 모든 것을 미끄러뜨리(려)는 것이다. 특히 무언가에 대하여 권력을 지니는 대상을 ooo는 도저히 버티지 못한다. ooo의 작품에서 어떤 배경이 작품 안에서 고정되어 등장할 때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은, 그 공간이 처음부터 거짓 위에 세워져있거나(<사기충전 만화>) 순응을 강요하는 폭력적 위계(<고요한 여름>, <좋은 사람>, <중력의 시>)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선단, 무대 등 권력의 우위를 상정하는 공간은 부정의 대상 혹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로 묘사되곤 한다.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인 <불신의 굴레>에서의 배경색이 일정하게 제시되는 것은 우연 혹은 미숙함에 의한 게 아니다. ooo는 모든 것을 미끄러트리고 모든 것에 대해 미끄러지면서, 그 미끄러짐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할 '고정'된 조건으로 세계 대신 이데올로기 장치들을 출몰시켜 (비판적으로가 아니라 부정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ooo는 '중점이나 깊이가 없다'는 결론에 그치(며 외려 그것에 연연하)는 포스트 모던적 냉소와는 다른 길을 가려한다. 루이 알튀세르가 크레모니니에 대해 한 말을 빌리자면, ooo는 "자유란 관념적인 자유 인식이라는 자기만족에 의해 성취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노예상태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그 법칙을 앎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알고 있"5*다.
그런데 이상하다. ooo는 그 대상이 통념상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할 지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부정의 대상으로 묘사해버리고(<무법소심만화>) 있지 않은가? ooo의 만화에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관계(의 가능성) 따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관계가 낭만으로 수렴될 수 있는 경우는 <도적드라마 만화>나 <보는 만화>의 경우처럼 불투명한 매개를 통해 마주하고 있을 때 뿐이며, 작품이 맞이하는 거의 대부분의 결론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즉 변화의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허무는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여기서 ooo식 블랙 유머의 보다 가혹하고 냉소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변화의 요구가 작렬하나, 결국에는 다른 문제의 대두라는 가능성은 출몰하지 않은 채 모순과 함께 닫히는. ooo는 자유를 성취하긴 하나 그것을 실현시켜 변화하지는 않는다. 이 때 우리는 ooo의 만화에서 체험되는 감각이 항상 어떤 강제성('안에서'가 아니라)으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에 이른다. 달리 말해, 아이러니하게도 인물들이 완전히 닫힌 상태에 처할 때 만화는 완전히 열린 상태가 된다. ooo는 인물에게 잠재된 자유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소진시킴으로서 그 자신의 활력을 얻는 것이다. <치는 만화>에서 아래층의 인물이 천장을 두들기는 충격이 윗층의 스트라이크를 성공시키는 것처럼. 어쩌면 ooo는 이렇게 중얼거릴 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주장해본다. 난 결코 가지와 줄기를 뻗지 않을 것이다."6* 그것만이 그에게 다른 것을 지시하고 그리로 미끄러질 힘을 주니까.
요컨대 ooo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정형화된 대상이나 그것의/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대상과 그 대상의 역 사이의 순차적인 충돌, 즉 관념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부정으로 이행(=미끄러짐)하는 과정과 거기서 생성되는 힘이다. 인물들 사이에 고정되어있던 관념이 그 관념을 배반하고 거세하는 차이로 향하여 그 차이에 의해 크게 미끄러질 때 ooo는 즐겁게 냉소하리라. 처음에 제시된 소망같은 관념은 분명 실현되긴 하나, 그 관념이 들러붙어있는 것은 항상 인물(의 감정)이 아니라 인물이 내뱉은 말이다. 어떤 관념도 말들의 차이라는 구조 없이는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을 '우둔하게' 역이용하는 것이다. 말에 들러붙은 관념이 그 말을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실현시킬 때, ooo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관념과 말이 서로에 대해 조화롭게 대응하리라는 보편적 인식론에 균열을 낸다. '다시' 말하자면 "원초적이고 직설적인 동일화". 언어라는 것이 그것이 발화되는 맥락에 따라 그 상태가 뒤바뀌는, 지극히 얇디 얇은 임의적 '레이어'에 불과함을 ooo는 유머러스하게 폭로한다. ooo에게 미끄러진다는 것은 곧 언어의 역습이다.
각주
1. <영어만화>는 일견 이것이 배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사례이나, 여기서 다뤄진 "Blue"라는 단어가 파랑이라는 색과 우울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ooo이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색의 비유적 효과가 아닌 문자의 차연 효과이다.
2. 엄밀히 말해, 이 구분은 애니메이션에 있어선 틀린 분류법이라 할 수 있다. 웬만한 2D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셀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굳이 디지털 작화라 부르는 것은 200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 작업에 있어 후반파트의 디지털화에 따라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에선 불가능했던 색감과 연출이 가능해져서 이다. 예컨대 <카드캡터 사쿠라>TVA와 <너의 이름은.>을 비교해보면 이해가 쉬우리라.
3. 이것이 ooo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ooo 이전에도 각 칸마다 배경을 바꾸어 정합성을 깨트리는 작업을 한 만화가들은 있었지만 이는 대개 독특한 요소들의 차이를 통한 감각적 효과의 창출을 염두에 둔 작업 방식이었으며, ooo는 그런 감각적인 효과가 아닌, 그 차이들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감각에 주목한다.
4.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5. 루이 알튀세르, "추상화가 크레모니니"
6.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본문은 ooo의 작품집 [무슨만화]의 출간에 맞추어 쓴 글로, 이전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것을 재업로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