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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r 27. 2019

<우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고백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이 영화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혼자 고민하고 다른 리뷰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우상>이라는 퍼즐을 합리적으로 맞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조선족이나 창녀를 대상화하지 않고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 시나리오 단계에서 투자자를 찾지 못해 엎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성기고 조악한 플롯, 극적 장치가 되지 못하고 거창할 뿐인 상징으로만 남는 유리창이나 흐르는 물 등의 모티프, 자신의 몸에 쓰인 연기-이미지를 답습할 뿐인 배우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 기어이 이것을 무려 러닝 타임 2시간 24분의 실제 영화로 만들어버린 (거의 부조리극에 가까운) 사태는 나를 거의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수 많은 대사를 놓쳤기 때문이다. 배우의 딕션 문제인지, 프로덕션 당시의 동시 녹음 문제인지, 사운드 믹싱 문제인지 아니면 극장 스피커 음질 문제인지 당장 명확히 알 겨를은 없으나 -물론 그 구체적 사유를 밝히는 건 내 몫이 아니라 씨네21의 몫이다- , <우상>에서 인물의 대사는 자꾸만 뭉개지고 퍼지거나 지나치게 큰 음악과 효과음에 파묻힌다.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보니 아예 극의 전개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힘겨울 정도인데, 가령 왜 중식이 법정 싸움을 포기하고 명회의 선거캠프에 들어가는지, 왜 련화가 명회의 집에 처들어가는지가 영화를 보는 와중이 아닌 영화가 끝난 이후에야 고민 끝에 겨우 납득되는 것이다. 과연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서 그 누구도 음향의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감독 이수진이 시사회 기자회견에서 내뱉은 같잖은 변명("사투리가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중요한 대사라서 고민을 했는데, 바꾸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 연기톤의 뉘앙스만으로도 전달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그런 지점에서 생각하면 뉘앙스로도 감정이 전달된다.")은 뉘앙스 뿐인 사건으로 극을 구성할 때 서사론적인 구체성은 그로 인해 번질 대로 번진다는, 극히 기본적인 극작술의 원리마저 배우지 못한 듯한 무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우상>의 '잘 들리지 않음'이 정말 제작상의 실수일까? 어쩌면 이는 작품의 의도적인 장치가 아닐까? 이런 터무니없는 의심이 싹을 틔우는 건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다. 중식의 내래이션이 끝나자 화재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는 명회가 단상에서 연설을 한다. 카메라는 그를 직접 바라보는 대신 그의 연설을 듣는 청중을 바라보는데, 처음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음향 문제인지 착각한 명회의 뭉개진 발음은 실은 부상 때문으로, 그의 연설은 부정확한 걸 넘어 아예 말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이수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지 그의 고조된 감정의 뉘앙스만이 그 장소를, 씬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후 터져나오는 박수. 아마 영화 속의 청중들 역시 영화 밖의 우리들처럼 아무것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리라. <내부자들>의 '명대사'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 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것입니다."를 번안한 듯한 이 씬은 '잘 들리지 않음'이 <우상>만의 문제가 아닌, 꽤 오랫동안 한국영화에 제기된 비판이라는 사실을 문득 상기시킨다.


'현실 사회/정치'를 다룬다고 나서는 한국 영화들이 공유하는 인식 중 하나는 대중에 대한 멸시다. 마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구스타브 르봉의 어록을 외우고서 으스대는 듯, 대중은 그저 특정한 사실(의 측면)의 발견에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우매한 군집에 불과하다는 인식 말이다. 대중의 잠재적인 영향력을 무시하는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오만할 뿐 아니라 대중을 이야기에서 편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 정도로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극작술 상으로도 매우 게으른데, <곡성>이 이 인식을 주제로 삼아 전반적인 프로그램을 짠 반면 <우상>은 이 인식이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르다 생각해 대중에 잘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대중이란 기껏해야 카메라와 붐마이크에서 멀리 떨어진 채 누군가에게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따르는 간접적인 뉘앙스만을 겨우 비출 뿐인 것이다. 스스로를 표상하는 방식을 모르는 것들. 하지만 마지막 씬에서의 명회는 대중의 그것과는 달리 뉘앙스 만으로 스스로를 너무도 명확히 표상하는데, 명회가 우상이 되는 극적 매커니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듯 그의 연설의 내용을 영화 안팎의 누구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뉘앙스만은 영화 속 청중-대중에게서 박수를 이끌어낸다. 극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중-대중을 제대로 바라보는 카메라는 명백히 우매한 군집에 대한 경멸적 시선이다. 달리 말해, "대중은 이야기가 있는 자를 좇을 뿐"이라는 극 중 대사는 권력자들의 인식을 꼬집기 위한 게 아니라 외려 영화 자신의 믿음이다. 앞서 인용한 이수진의 말을 영화의 마지막 씬과 연결한다면, 이는 뉘앙스만 있어도 대중-관객을 설득하기엔 충분하다는 적당주의적 자만으로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을 게다.


수 많은 한국 영화들이 공들인 음향 작업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개봉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관객-대중에의 이러한 자만이 <우상>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국 영화에도 적용된다는 합리적 의심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심에 따른다면 <우상>은 한국영화에 팽배한 이 자만을 밀어붙인, 거의 자기희생적이기까지 한 관객 모독극이 된다! 어쩌면 한국 영화계의 자만을 과시적으로 드러내 관객-대중으로 하여금 '잘 들리지 않음'이란 말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이 영화에 대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농담이다. 더 이상 이런 영화는 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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