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스>를 아주 간만에 다시 보다가 "이 드라마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이나 아벨 강스가 만들고 싶어 했을 법한 영화"라는 알랭 레네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의도하진 않았겠으나 나는 이 말 속에서의, 즉 <소프라노스>와 연결될 수 있는 스트로하임이란 질 들뢰즈가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자연주의자"라고 논한 그 스트로하임이리란 연상에 다다랐는데, 그의 영화에서 자연주의 -거친 형태의 욕망이 문명-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에는 들뢰즈가 『시네마 1 - 운동 이미지』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그 존재가 화면에 살짝 일렁이는 것 만으로도 현실적 인과율을 일그러뜨리는, 마치 인간 이상으로 이 세계를 통제하는 것만 같은 동물(성)의 출현이 있다. <어리석은 아내들>의 염소와 애완용 새, <결혼행진곡>의 돼지와 개를 떠올려보라(여담이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동물성을 출현시키는 방식은 마치 스트로하임에게서 자연주의적 태도를 제거한 것처럼 보인다). <소프라노스> 시즌 1 1화에서 소프라노 저택 수영장에 살던 오리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곧장 저 스트로하임의 동물(성)과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쨍한 햇빛 아래서 격정이나 살인같은 인물의 충동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주요한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동물들은 충동의 결과로서 일그러진 문명-세계의 징후가 아닌, 역으로 그러한 충동을 자극해 문명-세계를 일그러트리는 존재라 해야한다. 말하자면 근원적 세계로의 초대자들. 이 때 캐릭터들은 인간-짐승이 아닌 척 하는 인간-짐승이 된다. 그렇게 <소프라노스>는 <대부>나 <좋은 친구들>같은, 스스로의 주 레퍼런스로 거론되(며 작품 내에서도 여러번 언급되)는 선대 마피아 영화들의 근엄하고도 고독한 매너리즘이나 우스꽝스럽고도 씁쓸한 사실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무수한 그룹의 규범들 위에서 아주 위태롭게, 겨우겨우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며, 그 속에 자리잡은 자아는 조금의 균열로도 언제든 끔찍한 엔트로피, 짐승적인 세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 인간-짐승들의 이런 위기감이 바로 <소프라노스>의 궁극적인 주제이다. 이 드라마가 진정 폭력적이라면 이 때문일 게다. 어쩌면 나는 이 드라마가 정신과 카우치를 중요한 극적 장소로 끌어들인 목적을 이제사 제대로 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