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깔깔마녀 Aug 22. 2021

지장을 찍는 순간 00가되었다

매니저의 일 2 - 계약 체결

진지해지려고 마음 먹었다. 놀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야. 이건 정말 계약서야. 스물 세장의 계약서를 책상 왼쪽, 튼튼한 남색 바인더를 오른쪽에 올려놓았다. 빨간 인주와 휴지도 넉넉하다. 필요한 물건은 준비 완료, 이제 필요한 건 진중하고 심각하고 엄숙한 태도. 


계약을 체결하는 그날이다. 


워밍업 과정을 지내고, 아이들이랑 한 명 한 명 면담을 했다. 무슨 책을 만들고 싶어, 뭐가 제일 힘들 것 같아, 왜 작가 과정에 들어와 등등. 아이들은 비슷하고 닮고 다른 대답을 했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작년에 했으니까요, 형이랑 누나들이 부러워서, 책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힘들 것 없을 것 같은데, 글씨 쓰기가 어려운데, 모험 책을 만들 거예요, 용 그림, 핫도그 먹는 아이 책을 만들 거예요, 지금 꼭 정해야 하나요 등등. 

늘 만나고 수다를 떨고 혼나고 같이 놀았던 사이였는데, 아이들은 면담 시간을 쑥스러워했다. 긴장한 아이도 있었고, 평소와 다르게 말을 고르는 게 눈에 띄었다. 교사에서 매니저로 변신해야 할 내 표정에 웃음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신선했다. 

'아차. 조심'을 몇 번이나 외쳤다. 진지해야 해. 놀이, 장난, 연극 아니잖아. 오늘 우리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을 거잖아.   


계약서를 체결하는 주체는 <깔깔우동 대표 매니저>와 <어린이 작가>, 계약 기간은 2021년 5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내용과 약속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자기 힘으로 자기 만의 책 만들기

책을 만들어서 인쇄하기

매니저는 작가가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기

작가는 매니저의 도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책을 만들기

작가는 다른 작가, 다른 작품을 비하하거나 평가하지 않기

매니저는 작가와 작품을 비교하지 않고, 작가의 작품을 존중하기


계약서를 체결할 당시 교사인 나의 의도가 절절히 드러나는 계약 내용이다. 얼마 안 가서 포기 선언을 하는 아이가 등장할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해 보자는 나의 의견을 얼마나 싹둑 자를지를 알기 때문에 등장한 계약 조항, 어쩔 수 없다. 아마 나는 내년 계약서에도 이 항목을 포기 못할 것 같다. 

언제나 안타깝고 언제나 아쉽고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문제가 '비교'였다. 거창하게 인생이나 궁극의 행복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결과물이 드러나는 뭔가를 할 때 '비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고 저쩌고 가르쳐주고, 어쩌고 저쩌고 약속을 해도, 아이들은 나와 남의 것을 비교했다. 비교에 익숙하거나, 자기 속을 잘 드러내는 아이는 공공연히 비하와 열등감과 질투와 과장된 찬사를 표시했다.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어 보였다. 

아이들의 작품을 보는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다. 무신경해서, 진짜 가지 기준이 그래서 툭툭 내뱉는, 어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이들은 주눅 들고 눈치 보고 공허한 자부심을 갖는다. 

역시  '작가는 다른 작가, 다른 작품을 비하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와 '매니저는 작가와 작품을 비교하지 않고, 작가의 작품을 존중한다'는 항목은 내년에도 계속될 예정.


한 명 한 명 계약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어떤 아이들은 계약이 뭔지, 사업이 뭔지 단어의 뜻을 질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모든 계약 내용을 문제 제기 없이 수긍했다. '진짜 다른 말하기 없기다, 끝까지 해야 해'라고 확실한 약속을 받아야 하는 건가, 아이들이 혹시 이 항목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언제나 떠들썩하고 분주하고 재빠른 아이들이 단정한 얼굴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계약서 앞에서.    


다음은 자기 이름 또박또박 쓰기. 어린이 작가 누구누구. 

그다음이 진짜 마지막. 엄지 손가락에 빨간색 인주를 묻히고 작가 이름 옆에 꾸욱 눌렀다. 하얀 계약서에 붉은 엄지 손가락 지문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 다르듯이, 스물세 명의 다른 지장이 계약서 한 장 한 장에 찍혔다. 


"자 이제 여러분은 지장을 찍었으니, 정식 작가가 되었습니다."


시작, 시작, 본격적 시작이다. 지장을 찍었으니까,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무엇인지, 작품을 창조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책을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가가 되었다. 지장을 찍었으니까, 계약서라고 적힌 흰 종이에 빨간색 흔적을 남겼으니까, 나만이 지닌 엄지 손가락의 지문을 드러내으니까. 지장을 찍는 순간 우리는 작가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은 예비 작가, 예비 매니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