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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Aug 23. 2021

이름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매니저의 일 3 - 필명과 명함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작가다. 무얼 할까'라고 아이들에게 물어봤어야 하는데, 매니저인 나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습이 배인 몸은 이다음에 이다음이 저절로 나왔다. 하던 대로 작가 필명을 짓고, 명함을 만들자고 했다. 나의 상상은 이랬다. 작가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필명을 짓는다. 필명을 짓고 나서 그 필명에 맞는 그림을 명함에 자유롭게 즐겁게 그린다. 앗, 그런데 뭔가 그림대로 상상대로 되지 않는 이 분위기는 뭘까. 


아이들은 작가 필명을 짓는 일을 어려워했다. 필명이 뭐예요, 부캐 같은 거야, 왜 놀면 뭐하니에 나오는 그런 부캐, 어떤 필명을 지어야 해요, 네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 생각해 봐, 아직 무슨 책을 만들지 안 정했는데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는 어때, 어떤 작가가 되는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랬다. 아이들은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작가라고 하더라도,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어른이라도 과업으로 책을 만들거나, 정리된 의지로 교육 과정이 참가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책, 어떤 작가에 관한 자기 심상을, 자기 단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두뇌는 하늘의 구름 같다. 뭉쳤다가 형성되었다가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저 두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생각해 보자.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작년 선배들의 책을 볼까, 어떤 필명이 있지 볼까, 루비 작가, 당근 작가, 머리카락 작가.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제야 아이들이 편안해진 것 같다.


필명과 명함의 관계도 역시 흘러가는 구름 같았다. 필명 따로, 명함의 그림 따로, 필명은 청룡인데, 명함에는 왜 칼이 있을까, 왜 다르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온다.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바뀌는 아이도 있다. 새를 그렸다, 공룡을 그렸다, 네 장의 그림을 그려보고 어떤 걸 하면 좋을지 물어본다. 여기 있는 다른 작가들에게 물어보자고, 제일 많은 표가 나온 걸로 하자고 했더니 알겠다고 한다. 결과는 네 장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그리겠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제멋 대로, 필명이나 명함과 상관없는 그림이 쏙쏙 등장했다.


이 형식 없고 무질서하다면 무질서한 순간에 나는 어떻게 했을까? 처음에는 어떻게든 정리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빨리 포기했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고 했다. 어린이들한테 밀렸다고나 할까, 수동적이었다고 할까 그랬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그때 필명과 명함을 만들 때 나는 여전히 아이들이 어떠한지, 현실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교육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관점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몰랐다. 아이들을 잘 관찰하고, 아이라는 존재를 존중하고, 관찰하고 존중한 존재에게 적절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지 못했다. 포기라도 빨리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어쨌든 명함을 완성했다. 아이들은 필명과 명함의 진지한 의미와 상관없이, 명함을 많이 만들어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명함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럴 때는 빨리빨리 답을 해야 한다. 

"책 인쇄되면 그때 다시 만들자. 분명히 작가 필명이 바뀔 거야."

고맙게도 아이들이 알겠다고 해주었다. 기다리겠노라고.


네 달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은 언제 명함을 만들었는지 관심도 없다. 그리고 쓰는 데 온 힘을 다 쏟고 있다. 작가 필명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내 필명이 뭐였지부터 필명이 뭐냐는 답이 나왔다. 필명이 바뀐 아이도 많았다. 


바꿔도 되지요?

당연하지.

또 바꿔도 돼요?

당연하지. 


아마 인쇄 직전까지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작가 필명을 바꾸고 싶어 할 것이다. 어제 마음과 오늘 마음이 다른 게 아이들이다. 변덕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변하고 변하는 게 아이들이다. 나는 그 변하고 변함이 단순한 마음의 바뀜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짧다면 짧은 생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경험을 몸에 쌓아두고, '나'를 얼른 바꾼다. 오늘은 새가 되고 싶었지만, 내일은 공룡이 되는 게 나을 것 같은 데는, 분명히 그 사이, 뭔가 다른 일과 뭔가 다른 환경과, 뭔가 다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러울 정도로 시간에 충실하고 변화에 재빠른 존재다.    


내일은 또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


어린이 작가와 함께 하는 나 역시 그들처럼 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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