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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Aug 28. 2021

주인공이랑 나는 달라요! 정말?

매니저의 일 4 - 주인공

주인공 설정하기. 주인공 궁리하기. 주인공 만들기.


주인공 다음에 어떤 단어를 쓸까 생각해본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내게 가장 익숙한 표현은 설정이다. 한 캐릭터가 있고, 그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려하면서, 주인공의 성격, 외모, 가치관, 말투를 정리하곤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아이는 뭘 제일 좋아해,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어떤 친구가 있어 등등. 나름대로 아이가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짐작하며, 주인공이 좀 더 두텁고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


주인공 궁리하기. 이리저리 따지고 깊이 생각하는 궁리. 좋아하는 단어다. 내가 좋아해서 그럴까. 어쩐지 예술가는 궁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말한다. "생각해 보자. 그냥 고양이 말고,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나이는 몇 살이야?"  역시 질문 공세. 아이들이 궁리를 하면 할수록 구체적인 주인공가 촘촘한 이야기가 탄생할 것 같았다. 역시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


주인공 만들기, 조금 더 세련된 표현을 하자면 주인공 창조하기. '창조'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예술 양식이 무엇이든 예술가는 창조의 기쁨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을 창조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르다. 아이들은 너무 빨리빨리, 무성의하게 보일 정도로 주인공을 만드다. 뚝딱, 뚝딱.


고양이, 토끼, 공룡,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한다. 특히 고양이를. 현실의 고양이보다는 주위에 가득 차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들 덕분이다.

드래곤, 레고, 귀신, 만화와 게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겠다고 하는 순간, 내 머리는 핑핑 돌아간다. 어떻게 말리지, 말릴 수 있을까.

쫄라맨, 쫄라맨, 쫄라맨. 그냥 놔둔다. 쫄라맨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기 싫어서, 그리는 데 자신이 없어서, 만화 쫄라맨이 마음에 들어서 등등. 그 이유 대부분에 수긍된다. 쫄라맨이 좋아하는 깊은 이유를 아이들은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니까, 그러려니 한다. 그리기 싫고, 그리는 데 자신이  없다는 것만큼 정확하고 솔직한 이유가 어디 있겠나? 대신 중간쯤 아이에게 건넨다. 주인공은 좀 달라야 하지 않아? 주인공 얼굴색을 정하자, 오렌지 색 어때, 주인공한테 모자 씌울까?

연필과 지우개가 주인공이 되거나 쌀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는 그냥 좋다. 내가 원하는 설정, 궁리, 고민이 담겨 있는 캐릭터 같아서. 왜 주인공이 연필과 지우개야, 쌀이야 라고 질문하면 대답도 정확하게 한다. 내 주위의 친근한 물건을 주인공으로 하고 싶어서, 쌀이 밥이 되는 과정을 유치원생들한테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역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은 아이들 자신과 닮아 있거나 비슷한 경우다. 친구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 모험에 나서는 남자아이, 나이도 성격도 외 모두 비슷하다. 정작 아이들은 이야기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는 것 같다. "너랑 닮았네."라고 말하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닌데요." 짜증 섞인 반응도 있다. 무슨 말이에요, 이 아이는 이 아이고 나는 나인데.

자신과 이야기 속 주인공을 딱 부러지게 선명하게 구분하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겸연쩍나, 자기 자신이 별로인가, 민망해서 그러나 했다. 


모든 면에서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들고, 주인공을 생각하는 방식은 정말 다르다. 쉽고 편하고 빠르고, 한편으로는 자기랑 전혀 상관없다는 저 태도는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작품을 만든 어린이 작가는 자기 책 앞에서 뚱하다. 나도 물론이고 여러 어른들, 옆 친구와 동생들이 이 작품이 재미있고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는데 본인은 별로인지 뚱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유도 신통치 않다. 글자 틀린 게 있어서 같은 작은 이유다. 평소에 묵직한 자신감과 자유로운 영혼을 자랑하는 어린이라 자존감 어쩌고 하는 이유는 전혀 아니다. 어떤 책을 만들지 고민하던 작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이 어떤지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나인지라 더 궁금하고 약간은 안달이 나기도 했다.

요즘에야 이유를 알 것 같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일은 뭔가 이상한 일이다. 숱한 영향을 받고 형성된 어른에게, 그래서 진짜 내가 누구인지 찾고 싶은 어른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아니 이상한가?), 아이는 어른과 다르다. 아이가 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그 세계를 거침없이 살아간다. 영향과 살아감은 '언어'로 정리되고 표현할 이유를 찾기 힘들 정도로, 끊임없이, 빠르게, 계속 일어난다. 그 흐름과 물결 한가운데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일은 얼마나 생소한가. 자신이 쓰고 그려 놓고도 어색하다. 어? 내가 이렇다고, 내가 정말? 으악! 이런 느낌 아닐까?


아이들은 모른다. 자기가 창조한 주인공이 자신을 닮았다는 걸. 아이들은 알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서슴없이, 거침없이 주인공을 만들고 주인공은 이야기속에서 거침없이 달린다. 나는 그런 아이들 곁의 어른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내게 <나는 누구인가?>를 포함한 아이들의 책과 이야기 모두가 사랑스럽다. 아이들이 모르고, 부정하더라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그 아이로 다가온다.


너희들이 아무리 안 닮았다고 해도, 주인공이랑 너랑 상관이 없다고 해도, 나는 아니야.

나는 어른이니까, 나는 너희들의 매니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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