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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Aug 29. 2021

처음과 다른 그 다음

매니저의 일 5 - 작가노트

함께 하는 시각예술가가 말했다. "학교 다닐 때 작가노트 진짜 별로였어요." 이유가 뭔지 물어보았더니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뭔가를 계획하라는 숙제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의외였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예술가가 되지 못한, 앗,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예술가가 되지 않은, 이라고 하고 싶다. 아무튼 예술가가 아닌 내게 작가노트는 로망 같은 물건이었다. 선이 없는 백상지 노트. 종이의 무게도 꽤 나가서 손에 쥐면 묵직한 노트를 옆에 끼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와 단어를 쓱싹쓱싹 적는 모습은 멋지지 않나? 전공과 직업이 예술가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나? 여러 가지로 궁금했다. 

어린이 작가들이 작가노트를 어떻게 대할까도 궁금했다. 작가노트의 쓰임새를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첫 번째 반응. 대부분 아이들이 작가 노트를 선사받는 첫 순간, 좋음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에게 건네진 작가노트의 표지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몇 사람 빼고는, "우와!"하고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첫 장에는 보통 작가 필명을 적어 보라고 권한다. 필명을 적고 자기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열이면 열, 아이들은 매니저의 권유에 관심이 없다. 필명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하는 모드다. 어린이 작가들은 얼른얼른 자기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옮기고 싶어 분주하다. 같은 이유로 주인공 캐릭터를 그려보고 이름을 붙여 보라는 매니저의 권유도 억지로 받아들인다. 매니저인 나는 어떻냐면, 필명은 몰라도 캐릭터 그려보기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두 번째 반응. 시련이 시작된다. 시련의 양상은 아이들마다 다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변하지 않는 어린이 작가는 끝을 마무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작가노트를 채운다. 작가노트 한 권을 다 쓰고, 다음 노트를 주문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본격적인 원화를 그리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서, 중간쯤 되면 지루함을 호소한다. 아, 힘들어는 아, 지루해의 표현이다.

다음 유형. 자기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평소에 무엇을 하든 최선과 완벽을 지향하는 어린이 작가다. 작가노트는 그렇게 자세히 안 해도 돼라고 말하지만, 첫 장부터 공을 들이느라 진이 빠진다. 이건 원화가 아니야, 연필로 스케치만 해도 돼라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작가 노트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원화 그리기를 시작해야 할 즈음에도 작가 노트는 여전히 몇 장 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그 다음다음 유형. 다양한 이유로 거듭 "다른 걸 할래요."를 외치는 작가들이다. 이 만큼 그렸더니 이건 아닌 것 같고, 저만큼 그렸더니 저건 아닌 것 같고. 매일매일 바뀌는 마음. 이 유형의 어린이들은 다시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원화를 그리기 직전 '결정'에 매번 바뀌는 마음을 다잡는 아이들과, 원화를 그리고 나서도 계속 바뀌는 아이들. 당연히 뒷 쪽의 아이들과는 오랜 실랑이와 충고와 협박과 칭찬이 필요하다. 


마지막 반응. "우와!" 작가 노트를 마무리하고 원화 시작을 알리면 나오는 탄성이다. 지겹게 끝을 마무리했든, 완성도를 높이느라 몇 장 밖에 없는 작가 노트를 가지고 있든, 뭘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든 우선은 작가 노트를 마무리한다. 우리의 작가 과정은 이렇게 한다. 이 정도 되었으면 원화 시작이야. 네 작가노트에 무엇이 있든, 뭔가 없든, 작가노트와 이별의 인사를 건네는 거야. 안녕하고. 


프로 작가라면 이 아무튼 작가노트와 작별을 고하는 우리의 과정이 못마땅할지 모른다. 교육하는 어른들 중 일부도 그럴지 모른다. 매니저인 내가 헐렁해서 그런 걸까, 나는 작가노트를 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너무 쉽게 공감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린다. 

이야기의 끝이 머릿속에 있는데, 손이 따라오지 않으니 얼마나 지겨울까. 나라도 당장 본격적 작업에 들어가고 싶을 거야. 

아, 저 제대로 하고 싶은 욕망. 나는 알아. 스케치만 하면 하다가 말 것 같아. 한 번 그릴 때 최고의 장면을 연출하고 싶을 걸.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 변덕이라면 나도 한 변덕하지. 여러 가지의 선택지가 있는데, 얼마나 힘들겠어. 더욱이 연습인데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건 당연하지. 

공감의 바다에 빠진 나는 아무렇지 않게 결정한다. 완성도, 작품의 기승전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 등등 그냥 뻥 차고, 시작을 알린다. 


연습 끝! 원화 작업 시작!


아이들의 원화 작업은 확실히 다르다. 세 유형 어린이 작가 모두 어딘가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작업의 수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처음과 끝을 정했던 아이들 중 일부는 원래 정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을 선택하기도 하고, 작가 노트부터 온 심혈을 기울였던 아이들의 작업은 오히려 꼼꼼함이 없어진 것 같고, 뭘 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뭘 할지 결정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니까 수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만약 원화 작업 다음에 또 다른 수정과 퇴고의 작업이 있다면 수준이 더 높아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건 오랜 시간의 수정과 퇴고를 시도해보지 않아서 패스. 

누군가 왜 작가 노트라는 연습 과정을 거칠냐고 질문한다면, "어딘가 더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자세, 조금 더 진지해진 표정, 뭔가 자신감이 생긴 것처럼 보이는 손, 이런 모습의 총합이 작가 노트의 필요를 알려준다.    


아직 아이들은 "다시 한번"이 왜 필요한지, "다시 한번"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아이는 앞으로 쭉쭉 나가고 싶은 욕망의 집합체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다. 그 "다시 한번"이 얼마나 소중한지 살아오면서 경험했고, 살아오면서 정리했다. 그렇게 우리의 작가 노트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  


처음과 다른 그다음의 원화 작업. 


아이들 대신 나라도 작가 노트에게 고마움을 전해야지.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너라는 존재가 있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다음에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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