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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Sep 05. 2021

네가 만든 유일무이한 세계

어린이 작가의 일 1 - 창조의 어려움 혹은 쉬움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의 세계, 신비와 귀신이 살아가는 세계,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의 세계, 이 세상 모든 이야기는 어떤 세계에 살아간다. 픽션만 그런 게 아니다. 아미와 방탄의 대화,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보고 아 이곳은 또 다른 세계구나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아이들과 만나는 방과후 역시 타인이 생생한 디테일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이 세계는 뭐지 할 것 같다.

흰 도화지가 있다. 여기서 뿅, 저기서 뿅, 여기저기서 뿅뿅! 말풍선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도화지가 까만색이 돼버리는 것처럼, 무한대의 세계가 우주를 가득 채운다. 서로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지개 고양이가 씽크홀에 빠지면서, 분홍 토끼가 소풍을 나서는 순간, 보름이가 요리를 하려고 장을 보러 갔을 때, 어린이 작가들이 만든 스무 개가 넘는 세계가 시작된다. 그 세계의 시작에서 어른이 해야 할 일은 '가만히 있기'다. 다른 과정도 마찬가지만 시작만큼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생각이, 결심에 어른의 간섭이 개입하는 걸 싫어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거야, 이 세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 거야 하는 질문에도 별 대답을 하지 않는다. 2년 차 작가 매니저인 나는 처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냥 가만히 있는다. 질문도, 의견도, 응원도, 격려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내 생각. 아이들은 또 다르겠지. 그건 깔마 착각이에요. 우리한테 간섭했거든요 할 수도 있겠다.)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한다.     


게일 카슨 레빈이 어린이 청소년 작가들을 위해 쓴 <행복한 글쓰기> 2부에는 이런 조언들이 있다.

"세부 묘사는 글에 활기를 줘요." "이야기에도 세부 묘사가 필요해요." "등장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세요." "주인공이 힘들어야 이야기에 더 빠져들어요." "서로 말을 시켜요." 등등. 조언의 내용도 적절하고, 조언을 말해주는 목소리 역시 흥미롭고 친절하다. 고백하겠다. 처음 아이들과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조곤조곤하고 재미난 조언을 하고 싶어서 목 언저리가 간질간질 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이 작가들에게는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부묘사를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은 분주했고, 중요한 인물에는 이미 생명력이 가득했고,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 빠질지는 정해져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화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매니저인 어른은 중간 혹은 마지막에, 제일 좋은 건 어린이 작가들이 도움을 청할 때 조언을 해야 한다. 아니, 조언이 아니라 도움의 순간과 도움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옆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몇 명이 있다.

"나는 창의력이 없는데요." "싫은데요.(뭐가 싫다는지 잘 모르겠지만)" '안 할래요."

이 투정과 거친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정말 이야기 만들기가 싫은 건가, 이 아이에게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보다 자신의 경험과 좋아하는 소재로 책을 만드는 게 좋은지,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대부분은 그동안 관계나 특성으로 아이가 왜 저렇게 말하는지 추측을 할 수 있다.

"이야기 책 만들지 말고 놀이 책 만들자. 동생들 주게." "네가 방과후에서 그동안 채집했던 곤충을 소개하자.'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걸 우선 그려보자. 너는 우주를 좋아하잖아."등의 제안으로 금방 결정이 될 때가 많다. 결정이 되었다면 이제 걱정을 할 필요 없다. 매니저는 '가만히 있기'를 실천하면 된다.    

자신감이 없거나, 자신감 이전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때, 그 이유가 단순하지 않음은 물론, 쉽게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물론이라면, 어렵다. 옆에 있는 어른도 어렵지만, 제일 어려운 건 아이다.


세 명의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작년에 친한 언니와 같이 책을 만들었다. 책은 만들고 싶은데, 뭘 만들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해져서, 언니와 함께 만들기로 했다. 언니가 주로 아이디어를 내고 밑그림을 그리면 아이는 열심히 책을 칠했다. 아이를 보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언니의 핀잔에, 왜 같이 하냐는 주위의 말에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축을 한다. 작년의 긴 시간을 견딘 아이는 올해 혼자 힘으로 책을 만든다. 아직도 나와 주위 언니들의 조언에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혼자 힘으로 열심히 밑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두 번째 아이는 사 개월의 시간 동안 단 네 장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컴퓨터에서 그림을 뽑아달라고 한 뒤,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다. 따라한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찢어버리거나 화를 낸다.

세 번째 아이는 계약서를 쓰고 포기했다. 힘들어했고, 나도 같이 하는 건 힘들겠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아이와 세 번째 아이는 첫 번째 아이처럼 누군가와 같이 책을 만드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두 아이를 떠올리면 괴롭다. 좀 더 아이에게 말을 시키고, 아이에게 힘을 줘야 했을까 하다가도, 아냐,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가 왔다 갔다 한다. 지금이라도 힘을 내야 하나, 힘은 내는 데 어떻게 방법을 찾지, 아, 이번에는 말자, 내가 슈퍼 **도 아니고. 오락가락을 되풀이한다.               


모든 사람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이고, 우주라고 믿고 있지만, 나 역시도 그 이야기와 세계와 우주가 어떤 기준에 도달하기를 원하나 보다.  우주가 창조되고 그 많은 시간의 절반 넘게 우주를 가득 메운 건 암흑과 떠도는 물질 덩어리뿐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은하계와 태양과 지구의 탄생부터를 우주의 시작이라고 카운팅 하는 셈이다.


나름 이렇게 해 보고 저렇게 해 봤다고 자임하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작정을 했다. 두 번째 아이가 그린 몇 장의 그림과 세 번째 아이가 요즘 그리는 몇 장의 그림을 카드로 만들겠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다시 시도를 해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작정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이다. 캄캄하지만 반짝이지도 않지만, 그 절반 넘는 시간도 우주의 중요한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 카드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그림 카드는 아이의 이야기고 아이의 세계일 거야 라고 되뇌면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두 아이가, 작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두 어린이 작가가 과연 그림 카드로 만족할까, 왜 나는 그림 카드냐고 화를 낸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과 불안이 벌써부터 머릿속을 떠돌아다닌다. 별 수 없다. 모자란 나는 그동안 아이들과 나누었던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지 싶다.

"너는 너야. 다른 사람이 어떤 건 중요하지 않아."

"이 그림 카드는 너만 할 수 있는 거야."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닿을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허락한다면, 두 아이가 이해할지 이해 못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도 하고 싶다.


"이건 만든 거야. 네가 만든 이야기는, 세계는, 우주는 유일무이해."


두 아이는 내 말에 수긍을 할까? 다른 아이들은 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까? 나는 나의 말에 얼마나 자신이 있을까?


에이, 모르겠다. 세계가 어떻든, 유일무이가 어떻든, 지금 내 옆의 어린이 작가들은 자기 세계를 창조하느라 너무 바쁘다. 어려움을 겪는 두 아이도 마찬가지다. 바쁘고 바쁘게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아이들에게 파이팅을 외쳐줘야겠다. 응원이야 말로 매니저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아닌가!


세계를 창조하는 어린이 작가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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