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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Sep 08. 2021

100퍼센트의 단짝

어린이 작가의 일 2 - 혼자 혹은 같이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뒷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작은 소설의 첫 문장이다. 100퍼센트의 여자라니! 100퍼센트의 남자, 100퍼센트의 친구, 100퍼센트의 고양이, 100퍼센트의 봄. 100퍼센트 다음에 여러 가지 단어를 붙여 본다. 어떤 단어가 뒤따르든 후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귀엽다.


어린이들이 만드는 이야기에는 단짝이 등장한다. 연필과 지우개, 별이와 달이, 사탕과 젤리, 분홍토끼와 보라 토끼, 그와 그녀, 초코와 초코, 소녀와 소녀. 이야기 속의 단짝들은 서로 싸우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매니저 입장에서는 친구끼리 갈등이 등장하고, 가슴이 쓰라리고, 극적으로 화해하는 이야기가 출현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그 편이 훨씬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의 교육적 이유도 있고. 하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는 매니저의 기대를 좀처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이야기 속 단짝들은 너무 친하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함께 놀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면 함께 물리치고, 함께 집에 들어간다. 서로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아는 것 같다. 누군가 쿵하면 누군가 짝하는 그런 사이다. 무엇보다 이 단짝들은 처음부터 단짝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이미 같이 등장하기도 하고, 처음 만나서 '우리 친구 할래." 한 마디로 친구가 된다.


사람과 관계를 떠올리면 "음, 복잡하군"이라는 대사부터 떠올리는 나에게, 이야기 속 단짝들은 신기하다면 신기하고, 부럽다면 부럽다. 서로 다른 생김새여도, 성격이 정 반대여도, 상관없이 어떻게 저렇게 잘 지낼까 싶다. 그야말로 100퍼센트의 친구, 100 퍼센터의 관계, 100퍼센트의 단짝이다. 역시 귀엽군, 후후, 아이들은 그래서 아이들이지, 후후. 귀엽군.

귀엽다는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알 테다. '100퍼센트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어른들은 안다. 알고도 아닌 척하거나,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어딘가에 가능한 '100퍼센트의'가 있을 거라고 믿는 어른이 있다면. 음 귀엽다기보다는 좀 무서울 것 같다.

아이들은 어떤 쪽일까? 잘 모른다기보다는 '100퍼센트의'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도 않고, '100 퍼센터의'가 가능한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아이가 '100퍼센트의'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 어린이는 이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린이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순도 100퍼센트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래서 그럴 것 같다. 왜 갈등 같은 걸 고민해야 하죠? 왜 서로 달라서 힘들어하는 걸 상상해야 하죠? 하고.


사실, 정작, 현실의 세계는 그 반대다. 아이들은 내가 만난 90퍼센트가 넘는 많은 아이들은 끊임없이 관계를 원하고 관계를 고민한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요." "언니가 다른 친구랑 놀아요." "걔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도저히 힘들어서 같이 안 놀래요."친구, 친구, 친구, 같이, 같이, 같이를 외쳐댄다.  가끔 그 관계 고민을 들어주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다. 그런 아이들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100퍼센트의 단짝을 등장시킨다는 건 도대체 뭘까. 욕구, 기대, 바램, 그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흠, 미인이었어?"라고 그가 묻는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좋아하는 타입이겠군."

"그게 기억나지 않아.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이 큰지 작은지, 전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거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이야."

"그래서 뭔가 했니? 말을 걷다든가, 뒤를 밟는다든가 말이야"라고 그는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부분


아이들도 그렇다. 누군가가 귀여워서, 누군가가 성격이 좋아서, 내가 이런 타입을 좋아해서, 그런 명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그냥, 그냥, 이상하게 어떤 100퍼센트의 친구를 바라는 것 같다. 심술을 부리고 싶다. "얘야, 그런 누군가는 없어." "우선 너를 알고 상대방을 알아야 해."라고 냉정한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꿈 참는다. 내가 알려주어야 할 진실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우쳐야 할 진실이다. 그 시간이 어린이 본인에게는 얼마나 고단할지, 얼마나 분주할지 짐작하는 게, 어른이 할 일이다.

싸우고, 말 못 하고, 울고, 하소연하고, 끙끙거리고, 그러다 좋아하고, 질투와 시샘과 안간힘과 노력으로 아이들은 바쁘고 힘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는 대사는 어른이라서 할 수 있는 대사이다.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걸 해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어린이 작가들은 이야기 속에 '100 퍼센터의 단짝'을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의 어린이 작가들은 요즘 열심히 작품의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프로그램 차시 수랑 상관없이, 책상에 재료와 종이를 한가득 놔두고 자기 작품에 푹 빠져 있다. 흐뭇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자기 그림을 그리다 아무렇지도 않게 옆 작가의 그림을 도와주는 아이, 이런 아이디어는 어때라고 친구 작품에 흥분하는 아이, 작품의 마무리에 모든 작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아이. 언니가 그려준 그림, 매니저 깔마가 도와준 장면, 어떤 선생님이 정성스럽게 그려준 꽃. 어린이 작가들은 저작권이니, 오리지널리티니, 도용이니 그런 자질구레한 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도와주고 도와주는 게 너무나 당연하든, 서로가 함께 한다. 물론, 도움은 도움일 뿐이다. 최종적으로 작품을 책임져야 하는 건 작가 본인이다.     


'100퍼센트의'가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될 즈음, 아이들이 서로 도왔던 이 시간도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관계는, 삶은, 세계는 그러하다는 사실을. 혼자 그러나 같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이 시간이 힌트를 줄 수 있을까?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서로를 스쳐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부분


하루키의 질문에 답한다면


슬픈 이야기는 아니에요. 말없이 서로를 스쳐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억을 하니까요. 설령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을 몸에 채웠으니까요.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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