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피해자가 되지 마십시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나

by 열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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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오전이었다. 팔뚝에 링거 주사를 맞은 채 병원에 누워 있었다.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겼다. 눈앞이 빙빙 돌았고, 머리 뒤쪽이 옥죄였고, 속이 메스꺼웠다. 학교에 전화를 했다.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자신이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겠다며, 푹 쉬라고 했다. 나는 “미안합니다.”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괴상한 몸 상태가 괴로웠고. 달팽이관 따위에 병이 생긴 게 짜증이 났고, 괜찮아질 거라고 편하게 말하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책임감이나 직업의식 같은 게 아니었다. 어떤 이유든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싫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혼자 짜증을 내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지러운 꿈, 깨고 나서 온 몸이 욱신거리는 그런 잠이었다.

눈을 뜬 후에도 링거 주사액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잠깐의 잠 덕분이었을까. 갑자기 내가 너무 웃겼다. 헛구역질을 해대면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몸으로 의사에게 애원했었다. 곧 수업을 해야 하니 어떻게 좀 해달라고. 수업을 못하겠다는 말을 할 때도 그렇다. 피지 못할 사정 아닌가, 내가 원해서 달팽이관에 고장이 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절절맸을까. 담당자가 아닌 나 자신에게 말이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 않다.’를 넘어 ‘도움은 필요 없어. 도움을 받을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해.’라는 무시무시한 암시가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게 아닐까?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완전하기를, 도움을 받지 않기를 바랄 수 있나, 그건 가능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스베들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원전 사고 이후에도 집을 떠나지 못하는 피해 지역 노인, 피해 현장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과학자, 피해 지역에 숨어든 범죄자, 원전 피해 어린이를 만나는 교사, 해체 작업에 참여한 군인과 소방관, 피해 현장에 제일 먼저 뛰어든 소방관의 젊은 안내,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친해진 아이들. 그렇게 서로 다른 각자가 ‘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편집과 다시 쓰기를 감안하더라도, 책에서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생생한 만큼 온몸을 찌른다.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요. 난 사랑하면 안 되겠지요?’라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죽는 상상을 한다.’는 아이의 목소리를 견디는 건 쉽지 않다.

한 숨을 쉬면서, 중간중간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끝까지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 역시도 원전 사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아니 원전이 아니더라도 무수한 사고와 제도의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지인이 원폭 피해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아들이 원폭 피해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걸로 상상해본다. 본능은 아들을 말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이성적 인간은 세상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원폭 피해자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 혹은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을 권리가 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가 답이었다.

사실은 저 질문을 받기 바로 전 들었던 어떤 말 때문에 몹시 당황하고 있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절대 피해자가 되지 마십시오.”


2014년 4월 16일 저녁,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던 아들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그 배 타고 한 달 뒤 수학여행 가기로 했었어.”

우리 집은 안산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잠이 들기 전 무언가가 내 목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상이 아니다. 실제로 목 가운데가 한 줄로 죄어들어가는 느낌.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사회의식이나 타인에 대한 상상력 대문에 잠을 들지 못하는 게 아니다. 난 불안하다. 그 배에 탔던 아이가 내 아이일 수도 있다는, 어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공포에 부들부들 떤다.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원인과 결과를 판단할 수 없는,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고 몸이 감정을 따르는 시간은 오래 지속되었다.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 피해자는 곧 죽은 상태와 다름없다. 난 죽고 싶지 않다.

그런데 피해자가 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니라는 걸 안다. 진짜 힘든 이유는,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 온몸을 휘감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을 확률이 낮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2016년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난 피해자일 수 있다. 불평등 고용, 갑의 횡포, 불합리한 자본주의적 질서….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어떤 피해자인지 따져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따지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만큼 내가 피해자라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싫다.


아무래도 더 솔직해져야겠다. 과연 나는 내 지인, 구체적으로 아들이 원전 피해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반대하고 싶다. 아들을 피해자로 만들 확률을 줄이고 싶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간힘을 쓴다고 해서 아들이 완전무결하게 피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한국의 원전은 안전한가, 북한의 핵실험은, 원전이 아니라도 2014년의 배는, 2003년 대구 지하철은, 다리는, 백화점은. 아니 한국 사회에서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이미 피해자인데.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아닌 ‘세월호의 목소리’ 혹은 ‘2016년 대한민국의 목소리’ 안에 나와 당신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2016년 새해를 목전에 둔 날 아침 병원에서 발견한, 도움받는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떠올린다. 이런 안간힘으로 악다구니로 살아갈 수 없다. 절대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도움을 받지 않는, 신세를 지지 않는 상황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당신의 지인이 원폭 피해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에 대한 답은 여전히 같다. 반대할 수 없다. 아니 반대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목소리를 내야 할 지도 모른다. 피해자니까,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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